메인화면으로
경찰 "옷 벗고 성폭행 재연하라"…누구를 위한 수사?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경찰 "옷 벗고 성폭행 재연하라"…누구를 위한 수사?

'범죄 피해자 인권 보호' 토론회 열려

만 5세 아이가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찾아간 경찰서에서 남자 수사관은 아이에게 다시 옷을 벗도록 강요했다. 사건을 재연해보라는 것이다.
  
  성폭행 당한 아이에게 "가해자의 성기를 그려보라"던 경찰
  
  지난 2002년 아이를 데리고 경찰서를 찾았던 곽 모 씨가 실제로 겪은 일이다. 이런 곽 씨의 경험이 27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소개됐다. 국가인권위원회 범죄 피해자 인권보호 태스크포스팀이 '범죄피해자 인권보호, 그 현안과 쟁점'이라는 주제로 마련한 토론회다.
  
  5년 전 성폭행의 가해자는 곽 씨의 아이가 '이모'라 부르며 따르던 보육여성. 처음에는 곽 씨도 아이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가 잠을 설치고 난폭한 행동을 하더니, 항문에서 종종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야 비로소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아이에게 이유를 캐물었다. 한참 머뭇거리다 어렵게 입을 연 아이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온갖 엽기적 방법으로 아이를 성폭행한 뒤, 이런 사실을 어머니 곽 씨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협박을 일삼았다는 것. 더구나 일부러 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도록 유도하고서 잘못을 어머니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한 대목에서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충격을 안고 경찰서를 찾았지만, 진정한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경찰은 곽 씨, 그리고 곽 씨의 아이가 하는 이야기를 믿으려 들지 않았다. 아이가 일관된 진술을 하면, "(진술 내용을) 미리 교육시킨 것 아니냐"고 의심했다. 반대로 일관성이 없으면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했다.
  
  더 끔찍했던 것은 가해자와의 대질 조사. 수차례의 협박으로 공포가 내면화된 아이는 가해자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가해자를 마주 대하는 것 자체가 아이에게는 고통이었다. 더구나 경찰서의 위압적인 분위기는 마치 아이도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게 했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곽 씨와 아이의 상처도 깊어갔다. 지나간 고통을 다시 떠올리도록 강요하는 조사 과정에서 '중도포기'의 유혹도 커졌다. 경찰은 아이에게 "가해자 성기를 직접 봤느냐. 그렇다면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요구했다. 또 부모의 성기를 본 적이 있는지, 있다면 가해자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묻기도 했다. 심지어 옷을 벗고 당시 상황을 재연하라고도 시켰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아이도 괴로웠지만, 옆에서 조사를 지켜보던 곽 씨 역시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게다가 조사 및 수사에는 긴 시간이 걸렸다. 간신히 진정을 찾아가던 아이는 조사를 받을 때마다 다시 상처가 덧나는 듯 했다. (☞'경찰의 무리한 사건 재연 요구' 관련기사 : "그때 경찰이 윽박지르지만 않았어도…")
  
  범죄 피해로부터의 치유, 개인이 아닌 사회의 몫
  
  결국 곽 씨는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은 이들을 찾아 모임을 꾸렸다. '미성년 성폭력피해자 모임'이 그것. 곽 씨가 현재 회장을 맡고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는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27일 토론회에서 자신과 아이의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내기로 결심했다. 보호를 받아야 할 범죄 피해자가 오히려 상처를 받게 되는 현재의 수사 방식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이날 토론회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우리나라 형사사법 체계에서 피의자(피고인)의 권리는 법적으로 보장되고 있는 반면, 피해자는 매우 부차적인 존재로 취급돼 왔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이 범죄 피해로부터의 치유를 개인의 몫으로 돌려왔다는 것.
  
  하지만 세계적인 추세는 이와 다르다. 이 소장은 "1985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범죄와 권력남용 피해자에 대한 사법의 기본원칙선언'에서 '피해자의 권리'가 명문화된 후, 범죄피해로부터의 회복을 더 이상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김지선 연구위원은 범죄 피해자 보호를 위해 국가와 민간영역이 협력 체제를 구성한 사례를 소개했다. 김 위원은 "영미권 국가의 경우, 1960년대 중반 이후 범죄피해자 지원을 위한 민간 차원의 자원봉사활동이 전개됐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이런 활동이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국가적 지원을 확충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민간단체들의 네트워크도 구성됐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1986년 범죄피해자기금을 조성하여 피해자 지원활동을 하는 단체에 보조금을 지원한다. 영국에서는 피해자 지원활동을 하는 단체 예산의 90%를 국가가 지원한다. 또 독일은 벌금, 보석 보증금 등을 범최 피해자 지원 기금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뒤늦게 대책 마련한 정부, 장기 대책은 아직 없어
  
  하지만 한국은 최근까지도 범죄 피해자 지원활동의 불모지에 가까웠다. 그나마 이뤄지는 경우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다. 전국 173곳의 성폭력상담소가 있지만 1990년대까지는 각 상담소의 역량에 따라 알아서 활동을 진행하는 수준이었다. 2000년 이후 상담소를 찾아온 성폭력 피해자에게 1인당 300만 원의 의료비가 지원되고 있지만 넘어야할 산이 많다.
  
  특히 성폭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고, 피해자를 섬세하게 배려하는 의료진이 많지 않은 상황이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전담병원이 있지만 전국의 성폭력상담소가 연계하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이다. 검찰이나 재판부에 출석하게 되는 등 번거로움이 뒤따르는 성폭력 피해자 치료에 대해 아무런 제도적 인센티브가 없는 상황이어서 일반 병원을 이용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상황을 인식한 정부는 여성 폭력 피해자를 위한 긴급의료지원센터와 성폭력 전담의료기관을 확충하고, 성폭력 응급키트를 전국 병원에 배포하는 등 대책마련에 나섰지만 피해자의 장기적인 치유와 회복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아직 크게 미흡한 실정이다. 특히 범죄 피해자들이 종종 호소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는 지속적인 후유증을 낳을 수도 있지만 정부는 아직 대책의 필요성만 인식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도와주려고 하는데 뭐가 문제냐"라고?
  
  그리고 국가가 범죄 피해자 지원을 위해 나설 때, 기존의 권위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아서는 별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특히 여성, 아동, 노인, 빈민 등 사회적 약자에게 주로 범죄 피해가 집중되는 상황, 그리고 이들이 국가기관의 권위적 태도에 더 쉽게 상처받는다는 점 등을 고려한 지적이다.
  
  이에 대해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김덕진 씨는 "나의 '선의'가 모두에게 '선의'는 아니다"라는 말로 설명했다. 극도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범죄피해자들에게 국가기관이 "도와주려고 하는데 뭐가 문제냐"라는 태도로 접근할 경우, 피해자들의 상처는 덧나기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김 씨가 국가기관의 권위적이고 무성의한 면모가 드러난 사례로 소개한 것은 최근 법무부가 개설한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홈페이지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센터의 홈페이지의 소개란은 대부분 해당 지역 검사장의 인사말로 채워져 있다.
  
  이게 왜 문제라는 걸까? "범죄 피해를 당한 직후부터 수사과정에서 줄곧 사건 해결을 위한 '증인'으로만 취급당했을 뿐"인 피해자들이 다시 '검찰'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당연히 부담을 느낀다는 것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사무실은 해당 지역 검찰청 안에 있다. 김 씨는 "이런 지적이 지엽적인 문제로 비칠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고 못박았다.
  
  범죄 피해자는 '사건 해결의 도구'가 아니다
  
  결국 제도의 마련과 발상의 전환이 함께 이뤄져야한다는 지적이다. 김 씨는 "그동안 피해자자의 진술은 사건 해결을 위한 '도구'로 취급돼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기보다는 경찰이나 검찰이 묻는 말에 대답하는 수준이었고,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왜곡, 첨삭될 가능성도 있었다"며 범죄 피해자를 '섬세한 인권적 배려 속에서 치유받을 권리를 가진 존재'로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특히 아동, 장애인처럼 자신의 의사를 조리 있게 전달하지 못 하는 경우는 인권 감수성이 무딘 수사기관과 상대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앞서 소개한 곽 씨의 아이가 겪은 게 바로 이런 경우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