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6차 협상이 끝났다. 이제 '결국 협상은 타결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만 남았다. 정부는 촉박한 일정을 들어 협상을 서두르고 있지만, 반대 목소리는 여전히 높다. 한미FTA를 서두르는 이유, 협상의 내용 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찬반 양측의 토론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한미FTA를 둘러싼 대립은 더욱 가파르게 전개될 모양이다.
이럴 때, 떠올리게 되는 것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다. 팽팽한 대치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차분히 상황을 뜯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 중 하나가 앞선 삶을 살았던 원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서울 신라호텔에서 한미FTA 6차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17일, 시내 한 찻집에서 박중기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추모연대) 의장을 만났다.
많은 이들에게 다소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지난 14일 열린 박종철 열사 20주기 추모 행사에 관한 기사를 유심히 살폈던 이라면 그를 기억할 게다. 당시 박 의장은 "추모가 아니라 사죄를 하러 나왔다"고 말했다. 고(故) 박종철 씨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희생을 통해 형식적인 민주화를 부분적으로나마 이뤘지만, 살아남은 이들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제대로 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행사에서 박 의장은 전시 작전통제권(작통권) 환수를 비난하는 보수 언론을 규탄하는 한편, 과거 민주화 운동 경력을 등에 업고 정치권에 진입한 이들의 기회주의적 행태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런 내용은 당시 행사 주최 측이 배포한 원고에 없던 것이다. 그래서 참가자 중 일부는 좀 당혹스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고교 시절 '암장(岩漿)'이라는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들과 "바위 밑으로 흐르다 어느 순간 화산으로 분출하는 용암처럼"('암장'이라는 이름은 이런 취지로 붙여진 것이다) 한국 사회의 모순 구조를 부수겠노라고 다짐한 이래 그는 줄곧 직선의 삶을 살아 왔다. 구부러진 역사를 직선의 삶으로 관통한 대가는 컸다. '암장' 동지들이 중심에 놓인 1964년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으로 호된 옥고를 치른 후, 〈한국여론조사〉취재부장을 지낸 인텔리였던 그는 고물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다.
보수 언론은 흔히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한 이들이 현 정권에서 기득권 집단화됐다며 비아냥댄다. 하지만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추모연대 의장'이라는 직함에서 편안한 의자 위의 삶을 떠올리면 안 된다. 박 의장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올해 일흔 셋의 나이로 그는 지금 서울시내 한 상가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간다.
이런 그가 〈프레시안〉과 만난 자리에서 14일 박종철 열사 추모행사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했다. 주로 한미FTA 협상을 서두르는 정부, 그리고 현 정부에 참여한 과거 민주화운동 출신 인사들을 향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박 의장은 "왜 (현 정권을) 뽑아준 다수 국민들이 바라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느냐"며 강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에게 당장의 성과나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큰 시각으로 역사에 성과를 남기는 삶을 택할 것을 당부했다. 다음은 이날 박 의장의 이야기를 글로 옮긴 것이다. 〈편집자〉
"일본인 교사의 폭력에서 사회의식에 눈 뜨다"
경상남도 밀양시 근처에 초동이라는 곳이 있어. 지금은 농공단지가 들어선 면 단위 농촌마을이지만, 일제시대에는 완전히 시골이었지. 내 고향이야. 내가 소학교에 다닐 무렵이었어. 1, 2학년 때는 몰랐는데, 3학년쯤 되니까 좀 이상한 느낌이 들더라고. '왜 일본인 선생들이 조선 학생들을 유독 심하게 때리고, 무시할까' 하는 의문이 든 거지. 학년이 올라가니까 의문이 아니라 분노가 생기더라고.
당시 일본인 지주의 농사일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거든. 정말 심하게 일했지. 어떻게 불만이 없을 수가 있겠어.
내가 사회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은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아. 일종의 반항심에서 출발한 거지. 그리고 철이 들면서 보다 체계적으로 깨닫게 됐지. 일본인 선생의 회초리는 단지 선생 개인의 폭력이 아니라는 것을 말야. 배후에 일본 제국주의가 있고, 그것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을 말야.
"진정한 해방은 4·19혁명, 민주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해방이 됐어. 하지만 제대로 된 '해방'은 잠시였지. 미군정이 들어섰으니까. 그리고 일제에 부역했던 이들이 과거 일본인들의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아서 똑같이 행동했으니까.
답답했지. 그래서 난 우리 역사에서 진짜 해방은 4·19혁명이었다고 봐. 과거 동학운동에서부터 축적돼 온 우리 민중의 힘이 제대로 분출한 것이거든. 물론 해방이 길지는 않았지. 4·19혁명 당시 열린 공간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이듬해 5·16 쿠테타 이후 다시 숨죽여야 했으니까.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부터는 끔찍했지. 진보정당은 커녕 진보적 생각조차 허용되지 않았어. 민주, 자주, 통일 등을 이야기하면 죄다 형무소에 들어갔지. 그렇다고 우리가 운동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 결국 4·19 공간에서 검증된 이들끼리 몰래 만났지. 서로 잘 모르는 경우도 많았어. 숨도 쉬기 힘든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당시의 운동은 4·19혁명이 뿌린 씨앗인 셈이지.
그리고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감옥에 갔지. 그때부터 계속 (감옥에) 들락날락했어. 감옥에서 나오면 (정보)기관원이 우리 집을 항상 감시했지. 기관원이 철수한 것은 김영삼 정권이 출범한 뒤였어.
(인혁당 사건으로) 감옥에 있을 때, 지금은 세상을 떠난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과 가까워졌지. 박 선생은 대단했지. 그 엄혹한 시절에도 어떻게든 진보적 생각을 전달하려 애썼으니까. 대학에서 만나는 학생들에게만이 아니었어. 교회당 같은 곳에 주민들을 모아 놓고 라면을 나눠 먹으며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는 했지. 요즘 박 선생 생각이 많이 나.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더니"
과거 그렇게 바랐던 진보정당이 생겼지만, 참 답답하잖아. 분열 때문이지. 원래 옛날부터 진보 진영에는 분파주의가 심했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닌 셈이지.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토론이 되는 것은 좋지. 하지만 그것이 파벌주의로 가면서 '대립을 위한 대립'이 돼서는 안 되는데. 참 걱정스러워. 내가 추모연대 일 때문에 여러 지역을 찾아가거든. 그런데 어디서건 이게 문제야. 근데 이런 조직적 갈등이 워낙 뿌리가 깊어서 잘 안 풀리는 것 같아.
박 선생이 말년에 줄곧 걱정했던 것도 이 문제였어. 박 선생이 술자리에서 욕을 참 잘 하거든. 이렇게 말하곤 했어. "야, 이것들아. 이론투쟁, 노선투쟁은 좋아. 하지만 적 앞에서까지 싸우지는 말아야지."
그런데 박 선생이 가고 없는 지금, 이런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이들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걱정이야.
"이근안 말고 누가 과거의 잘못을 고백했어?"
지난 14일에 박종철 열사 추모행사에서 한 이야기를 놓고 젊은 친구들이 너무 세게 이야기한 것 아니냐고 한마디씩 하더라고. 사실 작심하고 한 이야기였어. 나는 대한민국 공안 담당 경찰 중에 이근안이 그나마 양심적인 사람이었다고 봐. 그래도 자기 잘못을 시인했으니까. 경찰서마다 공안 담당 형사가 대여섯 명씩은 있었을 텐데, 그럼 그 숫자가 몇이야. 그런데 이근안 외에 누가 과거의 잘못에 대해 고백했어? 없었지.
사실 박종철 열사 20주기를 맞아 하고 싶었던 이야기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어. 그런데 과거 민주화운동 했던 친구들이 금배지를 꽤 달았지. 하지만 정말 필요한 반성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거야.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국회의원이 된 친구들에게도 하고 싶은 것이었어. 그들이 처음부터 그 자리를 바라고 운동한 것은 아니겠지. 결과적으로 권력을 잡게 된 거잖아. 그런데 한번 권력을 맛보고 나면 왜 자신이 그 자리에 앉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것 같아. 자신들이 잘나서 그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하면 안 돼. 국민들이, 그리고 역사의 큰 흐름이 떠밀어서 그 자리에 앉았다고 봐야지.
이렇게 생각하면 문제가 좀 풀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권력 부스러기에 연연하지 않게 되거든. 대신 역사에 어떤 성과를 남길까를 고민하게 되지. 이런 고민을 하다보면 지나온 역사도 자연스레 살피게 되고 말야.
그런데 과거를 제대로 반성하는 목소리가 그들(옛 민주화운동 세력)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다들 역사보다는 당장의 눈앞에서 성과를 거두려고 하는 모양이야.
"한미FTA 무조건 반대한다는 게 아냐. 준비를 먼저 하자는 것이지"
지금 노무현 정권만 해도 그래. 지난 대선에서 사람들이 그를 뽑았던 게, 꼭 좋고 지지해서만은 아니었잖아. 이회창 집권을 막자는 의도가 더 강하게 작용했지. 그런데 집권하니까 어때. 긴 시각으로 정책을 운영하기 보다 눈앞에 보이는 요구를 따라가기에 급급하지.
노 정권이 미국의 요구에 대해 당당하지 못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봐. 긴 역사에 성과를 남기겠다는 자세로 일하면 자연스레 미국에 당당해질 텐데 말이지. 어차피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라는 것도 영원한 것은 아닐 테니 말야. 그것도 그저 역사의 한 국면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한 방식일 뿐이잖아.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한나라당의 반대 편에 서 있으면서 한나라당처럼 친미적으로 군다고. 한미FTA 협상에서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지.
나는 일제 시절을 겪어 봐서 알아. 외세에 예속된 삶이 어떤 것인지를. 그런데 자주적인 정부가 없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실제로 외세에 대한 예속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조차 정작 생각은 외세의존적인 경우가 많지. 이런 의식을 깨는 게 과제인데 쉽지 않아.
아, 오해는 하면 안 돼. 물론 지금 한미FTA를 반대한다는 것이지, 영원히 반대한다는 뜻은 아냐. 우리의 자주적인 역량이 갖춰지면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협상 내용조차 모르면서 찬성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억지지. 국민들도 대개 반대하잖아. 다들 반대하는 것을 정부가 왜 하려고 드는지 도통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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