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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리랑>은 '항일영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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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리랑>은 '항일영화'가 아니었다?

[화제의 책] 김려실의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1926년에 개봉된 영화 <아리랑>은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항일 영화'로 알려져 있다. '무성영화기 최고 영화'로 전해지는 <아리랑>을 제작하고 그 자신이 주연을 맡았던 나운규 감독은 1993년 '항일 영화'를 만들어 민족혼을 고취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그런데 <아리랑>이 애초 항일 영화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의 저자 김려실은 "<아리랑>은 상상된 민족영화였다"며 기존의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그는 "현재 '아리랑'의 필름이 한 자락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소설 '아리랑'은 간접적으로나마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며 "그런데 의아하게도 '아리랑'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항일민족영화 <아리랑>과는 달리 어느 한 부분에서도 항일적인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저자는 현재 교토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원작 <아리랑>에는 항일적인 내용이 없다"

저자는 그 증거로 <아리랑>이 개봉된 지 3년 뒤인 1929년 출간됐던 '영화소설 아리랑'의 줄거리를 소개했다. 이 소설의 원작자는 나운규가 아니지만 당시 <아리랑>의 변사였던 서상필의 도움을 받아 집필됐던 점에서 원작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소작인으로서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주민들이 사는 한 농촌마을. 어느 사립 전문학교 2학년을 다니다 귀향한 후 철학을 연구하다가 실성한 최영진은 대지주 천상민의 청지기인 오기호를 보기만 하면 덤벼들어 싸운다. 어느날 천상민은 영진의 아버지에게 내일 안으로 빚을 안 갚으면 집을 차압하겠다고 통고하고, 기호는 영진의 누이 영희를 아내로 주면 빚을 대신 탕감하겠다고 구슬린다.

마침 방학을 맞아 고향에 온 대학생 현구는 이 마을의 선각자인 박 선생 아래서 영진과 함께 배운 죽마고우다. 실성한 영진 대신 현구를 대접했던 영희는 현구와 서로 사모하는 사이가 되지만 기호는 영희의 아버지에게 영희와의 결혼을 허락하도록 협박한다.


마을에 행사가 있는 날 기호는 하인들과 함께 영진네 집에 쳐들어와 혼자 있던 영희를 겁탈하려 하고, 현구는 이들과 맞서 싸운다. 이때 집으로 돌아온 영진은 다 죽게 된 현구를 보고 광기에 휩싸여 낫을 휘두르며 기호 일당을 닥치는 대로 찍어 넘어뜨린다. 충격을 받은 영진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순사는 영진을 체포한다. 포승줄에 묶인 영진은 슬퍼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리랑을 부르며 기쁘게 작별하자고 하고 모두가 한 많은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영진을 배웅한다."

위의 줄거리에서 항일적인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리랑>은 총독부의 검열에서 문제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오히려 관변단체에 의해 선무 공작에 사용된 적도 있다. 김려실은 "게다가 감독조차 나운규가 아니고 일본인일지도 모른다"고 언급했다. 이에 앞서 1997년 나운규 감독의 전기를 펴냈던 조희문 교수는 '아리랑의 감독이 나운규가 아니라 츠모리 히데카즈일 가능성과 '아리랑'이 항일영화가 아닐 가능성을 제기해 한차례 논란이 일기도 했다.

또 <아리랑>이 개봉됐을 당시 <조선일보>는 시사평에서 '농촌의 현실과 동떨어진 묘사, 편집의 미숙함, 기존 영화의 영향'을 영화의 결점으로 짚었고, <동아일보>는 캐스팅과 연출이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즉 <아리랑>의 영화적 성취도에 집중했을 뿐 사회 비판적인 측면은 개봉 당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항일적 요소' 덧붙여진 리메이크판 <아리랑>

저자는 "만약 <아리랑>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언제부터 그 신화가 만들어졌는가를 밝힐 필요가 있다"며 "영화소설 '아리랑'과 해방 후 리메이크된 김소동 연출의 <아리랑>(1957)의 시나리오를 비교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1957년 나운규의 사후 20년을 맞아 제작된 리메이크판 <아리랑>의 시나리오를 살펴보면, 줄거리는 기존 영화소설과 차이가 없으나 세부적으로는 많은 변화점을 찾아볼 수 있다. 기존 영화소설에는 없던 박 선생과 배달부가 일본순사의 감시를 피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 등 반일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이 삽입되기도 했다. 무성영화가 발성영화로 리메이크 되면서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로 항일 감정이 직접적으로 토로됐던 것이다.
▲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 1901~1945년의 한국영화사를 되짚다>(김려실 지음,삼인,2006) ⓒ프레시안

원작인 나운규의 <아리랑>은 무성영화였으므로 리메이크판 시나리오의 대사 부분은 전적으로 새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리메이크판 <아리랑>은 원작을 충실히 영화화했다는 평가를 받아 같은 해 문교부의 최우수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자는 "그러나 이 같은 차이점은 <아리랑>이 항일영화라는 평가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하다"며 "그렇다면 해방 이전의 사료와 증언들을 전부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원작 <아리랑>이 당시 얻었던 인기는 대단했다. 일주일 단위로 프로그램이 교체되던 때 <아리랑>은 4년에 걸쳐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상영을 거듭했으며 1927년 재상영 할 때도 "입장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오륙백에 달할 정도"로 흥행을 거듭했다고 한다.

저자는 "중요한 점은 윤봉춘의 회고처럼 관객들이 이 영화를 항일영화로 '느꼈다'는 것"이라며 "즉 <아리랑>은 애초부터 항일영화였던 것이 아니라 항일영화로 '상상'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립운동가 출신 감독의 '의도된 모호성'

저자는 이처럼 상반된 평가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영화가 가진 '의도된 모호성'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공연히 학교에 다니다가 미쳤다는 주인공에 대해 지금의 현실 속에 부대끼는 우리는 그가 왜 미쳤는가를 다시 중언부설도 하기 싫다. (…) 여하간 이 아리랑이란 영화는 과거의 조선 영화를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이 돈 없고는 살 수 없고 한숨 많은 이 땅 위에서 슬피 대공(大空)을 울려 그 무엇을 광호(狂呼)하는 한 개의 거상(巨像)이다."

1926년에 한 평론가의 기고에서도 알 수 있듯 주인공 영진이 미친 이유와 <아리랑>이 암시한 '그 무엇'은 이심전심으로 충분히 전달되지만 결코 공적으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기도 했다.

나운규가 <아리랑>을 만들기 전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김려실은 "이 같은 이력을 지닌 나운규가 자신이 처음 연출한 영화에 어떤 형태로든지 저항의 뜻을 담으려 했으리라는 점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며 그가 <아리랑>을 통해 정말 관객에게 호소하고 싶었던 것은 '동포여, 저항을 계속하라'가 아니었을까"라고 언급했다.

그는 "즉, 역설적이게도 <아리랑>은 저항의 뜻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밝힌다.

"항일영화 <아리랑>의 진짜 작가는 관객과 변사였다"

또 저자는 "기존의 <아리랑> 연구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은 이 영화가 중층적으로 해석 가능한 텍스트였다는 점"이라며 "오늘날의 수동적 영화 관람 형태와 달리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와 관객은 영화 텍스트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즉 <아리랑>의 '필름'은 하나였지만 '영화' <아리랑>은 하나가 아니었다. 단성사에서 <아리랑>을 해설한 적이 있는 변사 성동호는 임검이 있을 때와 없을 때를 고려해 두 가지 버전으로 <아리랑>을 해설했다. 경찰이 임석했을 때 전설(前說)은 "쫓아가는 사나이는 서울 모 전문학교에 재학중 철학을 연구하다가 미쳤다는 김영진이라는 청년이오"라고 했지만 지방 상영이라든지 가끔 극장에 경찰이 없을 경우에는 "서울 모 전문학교에서 철학 공부하다가 3.1운동의 고문으로 미치광이가 된 영진"이라고 해설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운규의 죽마고우이자 함께 영화를 만든 동료였던 윤봉춘 씨의 회고는 당시 민중들이 <아리랑>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리랑>은 '제2의 3.1운동'이라고 생각한다. (…) 미친사람으로 가장한 영진은 태극기 대신 낫을 흔들었다. 애국가 대신 아리랑을 불렀다. 변사도 울고 관중들도 운다. 이 울음소리는 대한민국 만세소리와 직결된다. (…) 스크린에서는 영진이가 포승에 끌려간다. 무대에는 변사가 포승에 묶여간다."

이처럼 영화소설, 레코드, 경찰이 임검한 상영 등 일제강점기의 공적 매체에서 주인공 영진은 단순한 광인이었지만 비공식적으로, 암묵적으로 영진은 '3.1독립만세운동 때 검거된 학생으로 경찰의 고문 탓에 광인이 되었다'고 해석됐다. 그 비공식적 해석이 세월을 거쳐 공식화됐고 어느덧 <아리랑>은 항일영화로 기억되게 됐다.

저자는 "이렇게 본다면 지금도 여전히 한국인의 집단적 기억에 항일민족영화로 각인돼 있는 영화 <아리랑>은 결코 나운규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다"며 "항일영화 <아리랑>의 진짜 작가는 영화를 통해 상상적인 차원에서나마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자유를 되찾기를 염원했던 조선의 민중"이라고 평가했다.

저자는 "즉 나운규가 그린 <아리랑>이라는 밑그림은 그들 모두의 공모에 의해 차츰 항일영화로 채색되어 갔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리랑>의 필름은 남아 있나?

현재 영화 <아리랑>의 필름은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일본인 아베 요시시게 씨가 <아리랑>을 포함해 해방 전 한국영화 40여 편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는 1992년 당시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이었던 호현찬 씨의 '<아리랑> 공개' 요청을 '자료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2005년 2월 아베 씨가 타계한 뒤 <마이니치 신문>은 상속인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타계한 아베 씨의 소장 필름을 일본문화청이 접수해 조사할 예정이라고 보도했으나 소문이 무성했던 아베 컬렉션과 <아리랑>의 실체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려실,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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