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영화제가 중반을 넘어섰다. 17일 오후 6시 30분 해운대 야외무대에서 대단원을 향해 가고 있는 부산영화제의 마지막 오픈토크 행사가 열렸다. 이날 오픈토크에서는 한일 양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봉준호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나란히 무대에 올라 뜻 깊은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벌써 해가 진 어둑한 해운대 야외광장에는 일찍부터 자리를 지킨 열혈 관객부터 길을 지나던 관객들까지 몰려 두 감독에 관한 뜨거운 관심을 나타냈다. 봉준호는 지난 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장편영화에 데뷔하면서 <살인의 추억>, <괴물>과 같은 영화를 통해 말이 필요 없는 한국의 '국민 감독'의 반열에 올라선 인물.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1995년 <환상의 빛 幻の光>으로 데뷔한 이후 <원더풀 라이프 ワンダフルライフ>, <디스턴스 ディスタンス>, <아무도 모른다 誰も知らない> 등의 영화를 발표하며 세계적 명성을 쌓아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올해 신작 <하나 花よりもなほ>를 가지고 부산영화제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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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좌)와 봉준호 감독(우)이 무대에 서서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프레시안무비 |
다음은 서로의 영화 팬임을 자처하며 진지한 대화를 주고받은 두 감독 간의 일문일답.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만들 때마다 부산영화제에 오게 됐다. 이번 방문이 벌써 4번 째다. 이젠 영화를 만들면서 이 작품 가지고 또 부산에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욱이 이번에는 이렇게 봉준호 감독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 올해 영화제 방문 중 최고의 수확이다.
봉준호 고마운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1995년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인 <지리멸렬>을 가지고 벤쿠버영화제에 갔을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을 보고 매혹된 기억이 있다. 그 후 <디스턴스>를 제외한 모든 작품을 챙겨봤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렇게 자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개인적으로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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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오픈 토크 현장 ⓒ프레시안무비 |
- 서로의 영화는 봤나 봉준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팬으로서 이번 신작 <하나>는 굉장히 신선한 느낌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전 스타일을 생각했을 때 <하나>는 놀라움을 안겨주는 의외의 영화였다. 시대극이라는 점도 새로웠고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자아냈던 <아무도 모른다>와 달리 편안한 느낌에 예쁜 화면들까지 나와서 놀랐다. 흡사 데이비드 린치가 <스트레이트 스토리 The Straight Story>를 만들었을 때의 느낌이었다. 두 번, 세 번 보고 싶은 작품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하나>는 워낙에 나 스스로 즐겁게 만든 영화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일본 개봉 첫날 극장에 가서 챙겨봤다. 내가 <괴물>을 통해 느낀 놀라움은 방금 봉준호 감독이 말한 놀라움의 약 10배 정도 될 거다.(웃음) 무엇보다 봉준호 감독이 괴수영화를 만들었다는 데 놀랐다. 더욱이 <괴물>은 괴물이 주인공이 되는 영화가 아닌 괴물의 맞은 편에 선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영화였다. 특히 합동분향소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그 장면에서 극장에 있던 한국인 관객들이 배꼽을 잡고 웃더라.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등장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들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합동분향소 장면에서 터져 나온 웃음도 차가운 웃음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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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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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역시 예리하다.(웃음) <플란다스의 개>에서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뇌물을 건네는 윤주(이성재)한테도 그랬고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에게도 일정한 거리를 뒀었다. 한편으로는 동정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냉소적인 비판의 거리를 두기도 했다. <괴물>의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괴물>의 가족들에게는 전에 비해 훨씬 측은지심을 많이 느끼며 영화를 만들었다. 합동분향소 장면이 주는 차가운 웃음은 실제 한국사회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상황을 그린 것이다. 한편으로는 슬프면서 한편으로는 우스운 상황 말이다. 그런 복합적 감정은 엽기적이기도 하면서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준다. 개인적으로 살아가면서 그런 상황을 마주할 때 굉장히 낯선 느낌을 받곤 한다. 그 느낌을 그려보고 싶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말한 차가운 웃음과 비슷한 의미에서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 어머니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매정하면서도 그렇다고 무한정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아무도 모른다>의 제작 동기가 된 사건이 언론에 보도됐을 때 TV 뉴스들은 하나같이 아이들을 버린 어머니를 비난했다. 하지만 나는 영화 속에서 누가 봐도 나쁜 존재를 등장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럴 경우 관객들은 '저런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아이들에게 이렇게까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라고 생각할 것이고 이것 때문에 자신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판단할 것이다. 나는 관객들에게 그런 생각을 남겨놓고 싶지 않았고 '관객 여러분들은 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보십니까?'하는 질문을 남겨놓고 싶었다.
봉준호<아무도 모른다>의 어머니를 보면서 진짜 궁금했던 게 한가지 있다. 영화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굉장히 특이하다. 뭐랄까 철없으면서도 까칠까칠한 목소리였는데 굉장히 인상 깊었다. 그 목소리는 감독이 설정한 것인가, 아니면 배우 본인의 목소리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 목소리는 배우의 실제 목소리다. 봉준호 감독이 말한 것처럼 배우 목소리가 아이들 목소리 같아서 미성숙하게 보인다. 영화 안에서 성숙하지 못한 어른과 어른들의 상황을 이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대비시키고 싶었던 의도에 맞는 목소리였다고 생각한다. 나도 <괴물>에 관해 질문할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괴수영화를 좋아하는데 <괴물>은 초반부터 괴물의 모습을 완전히 공개하고 시작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영화를 보면서 같은 영화감독의 입장에서 '벌써 이렇게 보여줘도 되는 건가?'하는 걱정도 들더라.
봉준호 실제로 <괴물>에서는 영화 시작 14분만에 환한 직사광선 아래서 괴물의 실체가 드러난다. 개인적으로는 괴수영화의 전형적인 관습을 깨부수고 싶었고 괴물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통해 전달되는 충격이 실제 사람들이 재앙을 맞이했을 때 받는 느낌과 흡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괴물>은 괴물 존재 자체가 아니라 괴물의 출현 이후 파장되는 문제들에 관한 영화였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 상으로도 영화 초반에 괴물을 노출시켜야만 했다. 괴물을 너무 일찍 등장시키는 바람에 괴물이 등장하는 장면이 너무 많아서 CG 작업 예산이 없어 고생 좀 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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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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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보면 두 감독의 작품 경향이 대조적이다. 봉준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굉장히 독창적인 영화였는데 흥행에서는 참패하지 않았나. 그 후 <살인의 추억>, <괴물>까지 장르적인 영화로 돌아서면서 관객들에게 호소력을 갖춰 왔다. 이에 반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장르적인 영화와는 거리가 먼 영화들을 만들어 오다가 이번에는 시대극을 만들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러고 보면 난 장르영화에 대해 별로 도전하지 않은 편이다. 이번 신작 <하나>도 사무라이 시대극이지만 일반적으로 관객들이 사무라이 시대극에 기대할 수 있는 장면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배우들에게도 시대극의 관습 안에 갇힐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말투도 고어를 쓰지 않는다. 외래어만 배제했을 뿐 현대 일본어를 사용한다. 자꾸 비장르적인 영화를 만드는 건 아무래도 내 성격이 삐딱해서 그런 것 같다.(웃음) 아마 내가 호러영화를 만들면 하나도 무섭지 않을 것이다.
봉준호 시대극 같지 않은 시대극이지만 <하나>는 고레에다 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그 성격이 아주 다르다. 어떻게 변신을 결심하게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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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프레시안무비 |
고레에다 히로카즈 스스로 작품 경향의 변화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 동안 너무 진지한 영화를 했으니 이제는 관객들이 재미있게 볼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2년간 어머니가 병환으로 입원해 계셨는데 어머니가 워낙에 시대극을 좋아하셔서 어머니가 보고 즐거워할 영화를 만들자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영화 속에 비 내리는 장면이 참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비 내리는 장면을 좋아하나?
봉준호 비 내리는 장면을 보는 건 참 좋아한다. 근데 그 장면을 찍기가 참 고생이다.(웃음) 그야말로 찍을 때는 딱 죽고 싶은 심정이다. 촬영일정은 밀리기 일쑤지, 배우들 고생시키지, 스태프들도 아주 힘들어한다. 그런데도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 속의 비 내리는 장면을 보면 비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다. 단순히 화면에 비치는 빗줄기만 아니라 귀청을 때리는 빗소리, 화면 밖으로 물기가 베어져 나오는 느낌까지 비 내리는 장면이야 말로 공감각적인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촬영할 때야 생지옥인데 비 내리는 장면의 물이 압도하는 것 같은 느낌을 참 좋아한다. 하지만 이제는 고생을 좀 줄이려고 시나리오 쓸 때 비 내리는 장면을 좀 줄이려고 한다.(웃음)
- 시간이 벌써 다 됐다. 관객 질문을 딱 하나만 받겠다. 관객 영화감독이 꿈인 영화학도다. 영화감독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지 조언 부탁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체력이 아닐까.(웃음)
봉준호 다시 말해 정신력이다.(웃음) (
사진: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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