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 히로시마 어느 곳의 풍경이다. 이 장면을 목격한 마루야 히로시 씨는 "하루 종일 시체와 폐허 속을 쏘다닌 날이었지만 이 장면 앞에서는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대학 1학년이던 그는 친구와 애인을 찾으러 시내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의 참상이 남긴 충격을 평생 잊지 못 했다.
일본 정부에 의해 징용돼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부모를 둔 심진태 씨도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있었다. 당시 세 살이었던 심 씨는 그날에 관한 기억은 없다. 그래서 해방 이후 한국에 돌아 온 심 씨에게 '히로시마'는 무심히 지나치는 수많은 낱말 중 하나에 불과했다. 적어도 넷째 딸이 태어날 때까지는 그랬다.
심 씨의 넷째 딸은 처음에는 건강했다. 그런데 돌을 지날 무렵부터 조금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아무런 이유없이 바짝 마르기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죽었다. '히로시마'라는 단어가 벼락처럼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다음 세대로 이어진 원폭 피해, 뒤늦게 관심 모아져
'고통의 기억과 연대 그리고 평화'라는 주제로 19일 서울 중구 예문 갤러리에서 한국과 일본의 원폭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심진태 씨와 마루야 히로시 씨도 이 자리에 참석한 피해자들이다.
원폭 피해자 및 원폭 2세 환우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와 원수폭 금지 일본 위원회가 마련한 이 자리에서는 피해자들의 참상을 담은 사진 및 피해자들이 직접 그림 전시회가 함께 열렸다.
이 자리에 모인 피해자들은 한국과 일본 정부가 원폭 피해자들의 실태조사에 나설 것과 피해자들의 후손들에 대한 지원 법률안을 제정할 것을 촉구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61년이 지났다. 그 사이 많은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났다. 살아 있는 이들의 수는 훨씬 적다. 원폭 피해자 문제는 그들과 함께 역사에 묻히게 될까. 피해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입을 모아 외친다. 원자폭탄의 파괴력에 노출된 후유증이 대물림되고 있기 때문이다.
1945년 원폭 피해자의 수는 70만 명에 달했다. 이중 한국인은 10만 명 가량이다. 그러나 이들이 겪은 참상은 오랫동안 외면당해 왔다. 한국의 경우는 주로 사회적 무관심 때문이고, 일본의 경우는 패망 이후 들어선 미군정의 보도 통제 때문이다.
이렇게 외면당했던 원폭 피해자 문제가 뒤늦게 여론의 관심을 끌게된 것도 피해자 2세, 3세 문제가 불거지면서였다. 원폭의 피해는 한 세대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 이상 원폭 피해자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한국의 원폭 피해자 2세 문제, 고 김형률 씨의 노력으로 뒤늦게 공론화 돼
한국에서는 지난해 5월 세상을 떠난 원폭 피해자 2세인 고 김형률 씨가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 씨는 2003년 3월 자신이 원폭 피해자 2세 환우라는 사실을 한국 최초로 언론에 밝힌 뒤, 우리나라와 일본 정부에 대해 원폭 2세 환우에 대한 대책 등을 요구하며 여러 활동을 벌였다.
그는 2003년 '원폭 2세 환우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한 뒤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김 씨의 진정을 접수한 인권위는 지난해 2월 국내 최초로 한국인 원폭 피해자 2세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어려서부터 '선천성 면역 글로블린 결핍증' 등을 앓아왔던 김 씨는 2005년 5월 일본 동경에서 열린 '과거청산을 위한 국제연대협의회' 주최 심포지엄에 참여한 뒤 건강이 악화돼 사망했다.
19일 행사에는 김 씨의 아버지 김봉대 씨가 참가하여 관심을 끌었다. 김 씨 역시 6살 때 피폭된 후 피부병과 등허리 종양을 앓아왔던 부인 이곡지 씨와 결혼할 무렵만 해도 피폭 후유증이 대물림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 했다. 하지만 쌍둥이로 태어난 두 아들 중 한 명이 생후 22개월만에 죽고, 나머지 아들인 김형렬 씨가 평생 난치병을 앓는 것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국회 상정된 원폭 피해자 특별법, "감감 무소식"
아들 김형률 씨가 2003년 자신이 원폭 피해자 2세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을 계기로 김 씨도 이 문제에 뛰어들었다. 김 씨를 비롯한 다른 원폭 피해자와 2세들의 노력으로 '한국인 원폭 피해자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안)'이 지난해 말 국회에 상정됐다. 하지만 아직 논의가 된 적은 없다.
김 씨는 이날 원폭 피해자 문제에 무관심한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서운함을 거듭 토로했다. 그는 "형률이는 떠났지만 형률이가 남긴 뜻은 살아있다"며 "특별법이 통과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 자리에서는 '핵무기와 수소폭탄에 반대하는 일본 에히메 현 위원회 평화대행진' 회원들이 "지구 상의 모든 핵무기의 포기"를 기원하며 접은 15만 마리의 종이학이 "더 이상의 원폭 피해자는 없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와 함께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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