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배우로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에서 동성애자로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한국에서 동성애자 영화배우로 살아간다는 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그 두 가지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바로 홍석천이다. 그런 홍석천이 돌아왔다. 6년만이다. 지난 14일 개봉한 영화 <두뇌유희 프로젝트, 퍼즐>에서 홍석천은 영화의 다섯 주인공 중 한 명인, '노'를 맡아 스크린으로 컴백했다. 지난 2000년 커밍아웃을 발표한 이후, '동성연애자 홍석천'이 아닌 '영화배우 홍석천'을 마주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지난 6년은 홍석천을 위한 시간이라기보다 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까지 우리 사회에게 필요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우리사회도 변했다. 물론 홍석천도 변했다.
|
|
홍석천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이번 영화에서 홍석천이 맡은 '노'는 한때 성매매 업소들을 관리하는 폭력조직의 오른팔 출신으로 5명의 주인공 중에서 가장 마초적인 인물. 동성애자의 꼬리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다. 그것 참 신기한 일이지만 그걸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 됐다.
- 오랜만에 뵙는다. 근데 피곤해 보인다. 영화 개봉 때문에 신나 있을 줄 알았다. "새벽까지 술을 먹다 와서 그렇다. 어제 친한 동생이 죽어서 문상을 갔다가 바로 오는 길이다. 그 동생이 한강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했다. 동생도 동성애자였다.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라 많이 힘들어 했다. 마음이 많이 아프다."
- 충격이 크겠다. 대신 영화가 개봉된 것만큼은 기쁜 일이겠다. "영화 생각하면 물론 기쁘다. 요즘 주위 친한 사람들한테 축하 인사 많이 듣는다. 어제는 이의정씨(뇌종양설이 있었던 탤런트 - 편집자)한테 영화도 보여줬고. 권상우씨한테는 자기가 직접 극장 가서 돈 내고 영화 보겠다는 문자도 왔다."
| |
|
홍석천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
- 커밍아웃 당시에 쓴 글을 보니까 영화 찍어서 잡지에도 나고 하는 게 꿈이라고 썼더라. 이번 영화로 그때 소원 푼 건가? "그렇다. 진짜 기분이 너무 좋다. 반전이 있는 영화여서 개봉 전 홍보행사 때 영화 얘기를 자세하게 할 수 없어 답답했다. 그래서 영화가 개봉되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 '홍석천이 동성애자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반가웠다는 사람들이 많다. 거기다 이번 역은 영화의 등장인물 중에서도 가장 마초적인 캐릭터다. "솔직히 이번 영화가 나한테는 오랫동안 기다린 데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출연 제의를 받고 수락하면서 이제 때가 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이 나를 더 이상 '동성애자 홍석천'이 아니라 '배우 홍석천'으로 봐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봐주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 점에서 이번 영화 제작팀에게 놀랐고 또 고마웠다."
- 맨 처음 얼굴을 알린 TV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의 여성스럽고 호들갑스러운 '쁘아종' 캐릭터에서부터 이번 영화의 마초적인 '노' 역할까지 대단한 연기 변신이다. "개인적으로는 커밍아웃 이후 TV드라마 <완전한 사랑>으로 복귀하면서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왔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사랑>에서도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 등장하긴 했지만 성격은 진중한 캐릭터였다. <슬픈연가>라는 드라마에서는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좀 소란스런 성격이었고. 뮤지컬 <토요일밤의 열기>나 <풋루즈>에서도 동성애자라는 껍데기를 벗었다. 그런 게 다 발판이 돼서 이번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마초적인 캐릭터를 맡았다고 하니까 기대된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뿐 아니라 이제 대중들도 나에게서 '동성애자'가 아닌 뭔가 다른 걸 요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 전작이 2001년도에 한 <헤라 퍼플>이던데... "아, 그 영화! 제목도 잊어버리고 있을 정도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영화다. 그 때가 제일 힘든 시기였는데 매니저가 이미 계약을 해놓은 거라 어쩔 수 없이 출연했다."
- 영화에 대해 만족하나? "학점으로 따지자면 B학점 정도? 더 주면 웃기는 놈 될까 봐 그렇다는 얘기다.(웃음) 내가 한 작품인데다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시간 보낸 기억 때문에 점수를 더 낮게는 못 주겠다. 다행스럽게 내가 생각했던 대로 나온 장면도 있고 그렇지 않아서 아쉬운 장면도 있고 그렇다. 비중 있는 역할로 영화에 나온 건 처음이라 전체적인 호흡을 계산하지 못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누구든 자기 연기에 100%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 |
|
홍석천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
- 이번 연기에서 롤 모델이 됐던 작품은? "김태경 감독이 참고하라고 여러 편 추천한 영화가 있긴 했다. <저수지의 개들>, <유주얼 서스펙트>, <스내치>같은 영화를 추천하면서 나한테 <저수지의 개들>의 스티브 부세미 같은 연기를 주문했다. 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역할은 내가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거니까."
- 주인공 중에서도 '류'(주진모)와 '정'(김태성)의 경우는 감정을 절제하는 캐릭터라면 당신이 연기한 '노'와 또 다른 인물인 '규'(문성근)는 감정을 폭발시키고 분출하는 캐릭터다. 연기를 하면서 다른 배우들과 조화를 이루느라 고민이 많았겠다. "그게 이번 영화를 하면서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이었다. 문성근 선배야 워낙에 경험이 많으신 분이고 주진모씨나 김태성씨도 다 주연급으로 활동하는 배우들 아닌가. 그래서 혼자 튀지 말고 저 사람들 연기를 방해하지 말자, 저 사람들 연기에 맞추자 생각하면서 연기했다. '노' 같은 캐릭터가 욕심만 부리면 한도 끝도 없이 튀어 보일 수 있는 역이다. 그러기 보다는 전체적인 조화를 생각하면서 역할의 성격을 많이 죽이려고 노력했다. 대신에 섬세하게 보여주려고 했다. 김태경 감독도 그걸 원했다."
- 영화는 계속 할 건가? "나야 영화, 드라마, 뮤지컬 다 좋은데 이번에 영화를 해보니까 확실히 다른 배우들이 한번 영화 하면 왜 계속 영화하고 싶어하는지 알겠더라. 매체마다 다 나름의 개성과 매력이 있는 거지만 배우에게 여유를 준다는 측면에서 영화라는 매체가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 이제 '대한민국 커밍아웃 연예인 1호 홍석천'에서 비로서 '배우 홍석천'이 됐다. 소감은? "이번 영화 이후로는 어떤 역할이 들어오든 다 마음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성애자 역이든, 수선스런 역이든, 마초든, 사극의 인물이든 전부 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상관없다. 내겐 기회가 중요하다. 이번 영화가 그만큼 내게 결정적인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