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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추리에 '빈 집'은 없다"

[인터뷰] 대추리 역사관 기획한 판화가 이윤엽 씨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빨갛게 노을이 타고 있어요."

미군기지 확장 이전 부지인 경기도 평택 대추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동요 '노을'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들판에는 빈집 철거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떠돌았지만, 그곳의 노을은 동요 속의 노을과 다르지 않았다.


대추리 주민들의 삶의 자취가 한데 모인 곳

이런 노을을 닮은 것일까. 무더위가 한풀 꺾인 19일 저녁, 들판의 노을을 등지고 선 판화가 이윤엽 씨의 표정도 밝았다. 자신이 지난 보름 동안 준비해 온 대추리 역사관 〈대추리 사람들〉이 문을 여는 것을 지켜본 직후였기 때문일 게다.
▲ 19일 저녁 대추리 주민들의 삶의 자취가 담긴 대추리 역사관 〈대추리 사람들〉이 문을 열었다. ⓒ전유미


지난 6월 말 이주해나간 주민의 2층짜리 빈집을 개조한 〈대추리 사람들〉은 이곳 주민들이 살아 온 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이다. 철거가 예정된 빈 집들에 담긴 오랜 기억의 흔적들은 한데 모은 것이다.

1층에는 주민들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농기구가 전시돼 있다. 2층에는 주민들이 내놓은 사진 수백 점이 걸려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까만 교복을 걸친 까까머리 고등학생, 지금은 초로의 농부가 돼 있을 아기의 돌 잔치 장면 등이 낡은 흑백사진에 담겨 있다.

대추리의 과거만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한 쪽 벽에 걸린 시원한 크기의 천연색 사진에는 지난 2004년 이후 현재까지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투쟁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찍혀 있다.

그런가 하면 목판화가 이윤엽 씨, 사진가 노순택 씨를 비롯한 많은 미술가들의 작품도 곳곳에 전시돼 있다. 물론 모두 대추리를 소재로 한 것들이다.


〈대추리 사람들〉을 기획연출한 이윤엽 씨는 "(주민들이) 싸우는 진짜 이유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추리 주민들의 삶의 흔적들을 모아 놓음으로써 그들이 정말로 지키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주로 노동자들의 삶을 소재로 작품활동을 해 왔던 이 씨는 올해 초부터 대추리에 머물러 왔다. 허물어진 대추분교 근처에 있는 이 씨의 작업실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편집자〉


대상과 교감하는 작품 활동을 위해 대추리를 찾다

프레시안 : 원래 '노동 미술'을 해 왔다고 알고 있다. 농촌 마을인 대추리에 머물며 작품활동을 하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이윤엽 : 솔직히 말하면 나는 '미군기지 반대'를 위해 여기에 들어온 게 아니다. 그런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 일년쯤 머무르면서 농민들의 삶을 체득하면 내 작품 세계가 좀 더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경기도 수원 변두리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노동자였다. 그래서인지 노동자의 삶은 익숙했다. 노동자 생활도 해 봤다. 지금도 나를 보면 딱 노동자스럽지 않은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원래 노동자밖에 그리지 못 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내 작품이 다루는 영역이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지난해 말 대추리에 찾아 왔다. 그리고 이곳 주민들의 모습에 반했다. 미군기지 확대 이전에 맞서 똘똘 뭉쳐 싸우는 모습, 마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오랜 역사의 흔적….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매료시켰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주민들과 외부에서 온 활동가들이 밥을 같이 먹는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며 대추리에 머문 경험이 내 작품 세계를 확 넓히는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를 품게 됐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또 따로 있다. 전에 노동자를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판화작업을 할 때는 내가 그리는 대상이 내 작품에 관심이 없었다. 노동자들이 내가 그린 그림과 판화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내 작품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대체로 노동자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이 나를 답답하게 했다.

그런데 대추리에서는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대추리를 소재로 판화를 찍고 그림을 그리면 이곳 주민들이 보고 좋아한다. 내 작품의 대상이 내 작품에 관심을 갖고 사랑을 품는 것이다. 작가로서 이런 기쁨이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강제 대집행이 남긴 내면의 상처, 창작으로 치유하다
▲ 목판화가 이윤엽 씨 ⓒ전유미

프레시안 : 5월 4일, 5일 강제 대집행이 있던 날의 경험이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다.

이윤엽 : 사실이다. 그날의 경험은 내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이런 말은 사실 이제 와서야 하는 이야기일 따름이다.

강제 대집행이 있던 당일에는 정작 별 느낌이 없었다. 학교가 내 눈 앞에서 부서지고 예술가들이 애써 그린 벽화가 허물어지는데도 그냥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주민들이 오랫동안 살아 온 터전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무감각한 것일까. 이래도 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죄책감이 엄습했다. 그때부터 마음이 막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일종의 우울증 증세도 나타났다. 마을 풍경 하나하나, 주민들의 표정 하나하나에서 슬픔과 분노의 기운이 읽혔다. 지독하게 우울했고 움츠러들었다. 문밖에 나서는 것도, 작품을 하는 것도 두려웠다.

그 때 나의 내면을 치유한 것이 판화작업이었다. 5월 중순께부터 판화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 작품,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내면이 조금씩 치유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내면이 치유돼 가면서 처음에는 비장한 분노만이 담겼던 내 판화 작품들에 조금씩 위트와 여유가 섞이기 시작했다.

"대추리 주민들이 겪은 내면의 상처를 위로하고 싶다"

프레시안 : 무자비한 공권력이 남긴 내면의 상처는 당신만 경험한 게 아닐 것 같다.

이윤엽 : 그렇다. 지금 이곳 주민들은 누구나 내면의 병을 앓고 있다. 주민들의 말이나 표정을 살펴보면 감정의 기복이 극에서 극으로 순식간에 오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의 병 때문이다. 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치료다. 어디서든 간에 이곳 주민들을 위한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마련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라. 대대로 살아 온 집과 논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수십 년 동안 같이 살아 온 이웃의 관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상처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몇 달밖에 머무르지 않았던 나도 그렇게 큰 상처를 입었는데 이곳 주민들은 오죽 했겠는가.

프레시안 : 당신이 작품 활동을 통해 내면의 치유를 경험한 것처럼 이곳 주민들도 당신과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일종의 치유 효과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이윤엽 : 기자가 그런 질문을 하면 아마 어떤 작가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하겠지. 예술은 감상자의 내면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덧붙이면서. 나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면의 상처를 겪은 이들에게 예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위로'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예술의 몫이 아니다. 나는 내 작품들, 그리고 이번에 완성한 〈대추리 사람들〉이 이곳 주민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예술 창작의 과정에서 대추리가 나의 문제가 됐다"

프레시안 : 농민들의 삶과 그들에게 가해진 공권력의 폭력을 함께 경험하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넓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작품 활동이 갖는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예술가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예술가들은 이런 방식으로 대추리에 와 있는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대목이 예술가들과 다른 활동가들을 구별하는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 대추리에 있는 이윤엽 씨의 작업실 ⓒ프레시안

이윤엽 : 솔직히 다른 활동가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경우를 보자. 이제 대추리 주민들의 싸움은 내 문제가 됐다. 이 싸움 속에서 나는 상처를 입었고, 나의 작품 창작 활동을 통해 그것을 극복했고, 다시 그 과정에서 제 작품의 폭이 조금 더 넓어졌다. 이렇게 대추리는 내 삶과 작품의 일부가 됐다.

그런데 다른 많은 활동가들에게는 대추리의 문제가 그저 옳고 그름의 문제로만 다가올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는 대추리의 현 상황이 주는 우울함과 답답함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저 옳고 그름만 있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대추리에 예술가들이 좀 더 많이 와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여기에 오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안타깝다. 사실 예술가들이라는 게 원래 오갈 데 없고 배고픈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여기 오면 먹을 것도 있고, 잘 곳도 있는 데 왜 안 오는지 모르겠다.

"대추리 주민들은 '아름다운 기억'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프레시안 :〈대추리 사람들〉도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고 이주한 주민의 빈집을 이용한 것인데 조만간 국방부가 빈 집 철거를 시도할 경우 함께 허물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렇게 될 경우 주민들이 또 다시 큰 상처를 입지 않겠는가?

이윤엽 : 사실 대추리 주민들의 역사를 담은 〈대추리 사람들〉을 생각해 낸 계기 중 하나가 국방부가 '빈 집'을 철거하러 온다는 말을 접한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빈 집'으로 보이는 게 사실 '빈 집'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들이 '빈 집'이라고 말하는 공간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지를 말하려 했다.

대추리에 '빈 집'은 없다. 하물며 대추리 사람들의 평생을 담은 사진들이 모인 〈대추리 사람들〉이 '빈 집'일 리는 없다. 물론 그것을 '빈 집'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대추리 주민들이 왜 싸우는지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대추리 사람들〉에 전시된 사진들을 보라.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돌, 졸업, 결혼 등 인생의 중요한 대목에 얽힌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추리를 떠날 수 없다는 주민들은 이곳에 담겨 있는 자신들의 '아름다운 기억'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 <대추리 사람들>의 저녁 풍경(왼쪽), <대추리 사람들>의 내부(오른쪽). ⓒ전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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