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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사태가 남긴 과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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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병준 사태가 남긴 과제는 무엇인가

교수노조 "김병준 사태를 계기로 기존 학문정책 반성해야"

김병준 교육부총리가 2일 물러날 뜻을 밝혔다. 이와 동시에 김 부총리의 교수 시절 논문 관련 부정 의혹을 둘러싼 논란도 잦아들었다. 이제 9일 동안 떠들썩하게 진행돼 온 '김병준 사태'는 마무리된 듯하다. 그런데 지금 '김병준 사태'를 이대로 끝낼 수 없다고 외치는 이들이 나타났다. 주로 대학에서 직접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들이다. 왜일까? 그들에게 '김병준 사태'는 단순한 스캔들이라고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논문 중복 게재, 학계의 관행 아니다"
  
  전국교수노조는 3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최근 교육부총리 사태를 계기로 본 대학 및 학문 정책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가한 교수들은 최근의 '김병준 사태'를 대학 및 학문 정책의 맹점을 짚고 대안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우선 논문의 중복 게재는 관행일 뿐이라는 김 부총리의 주장을 보다 엄격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부총리의 사의 표명으로 유야무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날 토론회에 발제자로 참가한 한신대 경제학과 강남훈 교수는 "중복게재를 한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겠지만 연구 활동을 제대로 하는 대부분의 교수들은 중복게재를 하지 않는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강 교수의 이런 발언은 지난 1일 열린 국회 교육위에 출석한 김 부총리의 자신만만한 태도 때문에 '논문 중복 게재'가 어느 정도의 잘못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강 교수는 '논문 평가 제도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이라는 발제문을 통해 "2004년 광주고법에서 중복게재로 인한 징계가 정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중복게재로 인한) 재임용 탈락, 채용 탈락 등의 사례도 있을 것으로 본다"며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상당수의 중복게재가 드러났기 때문에 현황을 조사하고 이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중복게재도 자신이 이미 쓴 논문을 다시 실어 독자들에게 새로운 창작논문인 것으로 오해하게 할 소지가 있으므로 표절에 당연히 포함된다"고 지적했다. 논문의 중복 게재가 일종의 '자기표절'에 해당한다는 언론과 학계의 지적에 대해 김 부총리가 "악의적 표현"이라며 반발한 것을 겨냥한 말이다.
  
  이어 강 교수는 "교외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교내 학술지에 싣는 것도 중복게재에 해당되며 이를 허용하는 대학이 있다면 그 대학의 정책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표절 불감증'에 빠진 대학가, 대대적인 자정 노력 펼쳐야
  
  '김병준 사태'는 교수 및 연구자의 학문 윤리에 관한 것이지만 이번 기회에 표절에 대해 별 죄의식을 못 느끼는 학생들의 문제를 함께 점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인터넷 이용이 보편화되면서 '정교한 짜깁기'의 요령만 익힌 학생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연구자로 성장할 경우 제2, 제3의 '김병준 사태'가 줄을 잇게 되리라는 우려다.
  
  실제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보고서를 채점하는 교수들이 모인 자리인 까닭인지 이런 지적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이 자리에 참가한 한 교수는 "보고서의 표절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다른 교수는 "자신의 힘으로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완결된 보고서를 써 본 학생들이 흔치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남훈 교수는 대학가에 만연한 표절 불감증에 대한 해법으로 학생과 교수가 적극적인 자정운동을 벌이는 한편 표절 감시 및 판정기구를 신설할 것을 제안했다.
  
  '선택과 집중' 방식의 BK21 사업, "불투명한 성과, 선명한 부작용"
  
  '김병준 사태'를 계기로 1990년대 중반 이후 교육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학문정책인 BK(두뇌한국)21 사업을 근본적으로 되짚어 봐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BK21 사업을 관통하는 기조인 '선택과 집중' 논리가 경쟁에서 앞선 대학이 연구비를 독차지하는 '승자독식' 현상을 야기했으며 결국 과도한 논문 편수 늘리기 경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김병준 사태'를 낳은 논문 중복 게재와 표절에 대한 유혹은 이런 과도한 경쟁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박정원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선택과 집중' 방식으로 특정 대학에 연구비를 몰아주는 BK21 사업은 전체 대학의 효율적인 발전을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BK21의 '선택과 집중' 논리는 경쟁력 있는 대학에 연구비를 집중하면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어 연구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 부문에서도 '규모의 경제'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검증된 바가 없다"라고 설명했다.
  
  '선택과 집중' 방식의 BK21사업은 대학의 서열화만 심화시킬 뿐 연구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어 박 교수는 "BK21 사업은 단기간 평가(매 1~2년마다 평가) 방식을 취함으로써 기초연구보다는 짧은 기간에 연구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단기 연구에 치중하게 만들었다. 이는 지식기반경제 발전의 기초가 되는 장기 연구 역량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또 연구의 경제성이 중요한 기준으로 대두되면서 기초과학과 인문학의 위기가 심화된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아무도 학문 안 하려 해"…"비정규직 교수의 현실 본 학생들 당연한 선택"
  
  '김병준 사태'가 남긴 다양한 쟁점을 중심으로 진행된 이날 토론은 결국 교육부가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로 마무리됐다.
  
  토론자로 참가한 신광영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는 "입시정책만 있었을 뿐 학문정책은 없었다"는 말로 이제까지의 교육부 행정을 평가했다. 대학이 어떤 학생을 뽑아야 하는가의 문제에만 집착했을 뿐 이렇게 선발한 학생들을 대학이 어떻게 키워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현재 거의 모든 분야의 대학원이 공동화 현상을 겪고 있다. 비실용 학문인 인문학뿐 아니라 실용학문인 이공계 학문조차 학생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라며 교육부가 국내 학문 육성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과거의 '황우석 사태'와 최근의 '김병준 사태' 이후 제기되고 있는 '연구 윤리의 확립'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는데 이는 학문정책에 대한 총체적인 밑그림을 마련하는 것과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정규환 비정규교수노조 부위원장은 학문 후속 세대의 전망 문제를 들어 설명했다. 대학 교육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의 현실을 생생하게 목격한 학생들이 연구자로서의 전망을 포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정 부위원장은 "전체 교수 사회에서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율이 계속 늘어가고 있다"며 이런 경향이 국내 학문의 위기를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방청자로 참석한 또 다른 비정규직 교수는 "비정규직 교수들은 드문드문 배치된 '땜질 강의'를 맡고 있을 뿐 세미나를 이끌거나 대학원생을 지도하는 역할을 맡을 수 없다"며 "당장 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교수 사회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도 적극적인 학문 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한 방청자는 "교수 사회에서의 비정규직의 증가가 정규직 교수가 되기 위한 경쟁을 과열시키고 있다. 이같은 경쟁 속에서 기존의 정교수들이 갖고 있는 권위는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학계의 권위주의와 논문 실적 경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김병준 사태'는 언제고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비정규직 교수의 증가가 '김병준 사태'와 같은 학문적 부정행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김병준 사태'가 남긴 숙제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편 이날 토론을 지켜본 강내희 중앙대 영문과 교수는 "답답하다"라는 말로 소감을 밝혔다. <지식생산, 학문전략, 대학개혁>, <교육개혁의 학문전략> 등의 책을 통해 공공성을 강화한 방식의 지식 생산 체계를 만들어 갈 것을 주장해 온 강 교수는 "이 토론회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대부분 몇 년 전부터 제기되어 온 것들"이라며 "그동안 한국 학문의 위기는 더욱 심화됐다. 이제 보다 구체적인 논의를 전개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토론회의 사회를 맡은 유초하 충북대 철학과 교수는 "김병준 사태를 통해 학계의 다양한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자리가 되다 보니 논의가 보다 구체적으로 이뤄지지 못한 것 같다"며 "이날 토론이 현재의 학문정책을 반성하고 보다 풍부한 논의를 끌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말로 토론회를 마무리했다.
  
  이날 토론회가 끝난 뒤 한 방청자는 "'김병준 사태'는 정부의 연구비 지원을 놓고 벌어지는 실적 경쟁 속에서 학문적 부정행위의 유혹에 노출돼 있는 현재 한국 학계의 문제점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며 "이번 사태를 한국의 학계가 거듭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병준 사태'가 남긴 숙제를 외면하지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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