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연기자로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는 배우 아사노 타다노부. 그가 '일본 인디필름 페스티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6년 전,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한 이후 오랜만에 한국 나들이다. 세르게이 보드로프 감독의 새 영화 <몽골> 촬영으로 빠듯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가 한국을 찾은 건 '일본 인디필름 페스티벌'에 자신의 영화 <녹차의 맛><란포지옥> 두 편이 상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배우 아사노 타다노부는 스크린 위에서 항상 '카리스마'가 빛난다. 주연으로 영화 전체를 끌어갈 때는 물론이고, 조연이나 단역으로 잠시 스쳐 지나도 자신만의 색과 향을 화면 위에 강하게 각인시킨다. 그러나 자연인 아사노 타다노부에게선 강함보다는 편안함이, 카리스마보다는 여유가 더 짙게 묻어났다. <몽골>의 징기스칸 '테무진'이 되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르고 나타난 아사노 타다노부,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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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노 타다노부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6년 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이후 처음이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짼데, 서울은 처음 와봤다. 여러 차례 방문 요청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이번에 오게 돼 기쁘다."
- '일본 인디필름 페스티벌'에 <녹차의 맛>과 <란포지옥>, 두 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먼저 <녹차의 맛> 얘기부터 해보자. "시골 마을에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시골에 잠시 내려와 있는 삼촌 '아야노' 역을 맡았다. <녹차의 맛>은 가족 각각에게 벌어지는 '빛나는 경험'을 그린 영화다."
- <녹차의 맛>에서 이시이 가츠히토 감독과 세 번째 호흡을 맞췄다. "이시이 가츠히토 감독과는 <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에서 처음 만났다. 감독님 데뷔작인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표현하지 못했다는 불만족이 둘 다에게 남았다. 그래서 <파티 7>에서 다시 작업했다. <상어가죽...>의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와 편한 느낌으로 즐겁게 작업했다. 그리고 다시 <녹차의 맛>을 함께 하고."
- <녹차의 맛>에서 '아야노'가 하는 일은 주로 시골 길을 하릴없이 걸어 다니는 거다. 그런데 이시이 가츠히토 감독은 당신이 연기에는 '엄청난 노력파'라고 말한다. 반복된 연습을 통해 자연스런 연기를 선보이는 거라고 하던데. "요즘에는 역할을 맡으면 캐릭터를 연구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연구를 하는 것보다는 평소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연습하는 편이었다. 언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일상생활 중에 준비를 해두는 거지. 그런 것들이 쌓여 현장에 나갔을 때 자연스러운 연기로 이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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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노 타다노부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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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란포지옥>을 위해선 캐릭터 연구에 꽤 공을 들였을 듯하다. 각기 다른 스타일의 단편 네 편에 각기 다른 스타일로 모두 등장한다. "<란포지옥>은 소설가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 가운데, 네 명의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한 편씩을 단편으로 연출해 묶은 옴니버스다. <거울지옥>과 <우충>은 일본에서 유명한 명탐정 아케치 코고로 역을, 나머지 두 편에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역할을 맡았다."
- <란포지옥>에서 다케우치 스구루 감독이 연출한 <화성의 운하>는 이미지만으로 구성돼 있다. 전라(全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화성의 운하> 촬영이 가장 어려웠다. 아이슬란드에서 촬영했는데 여름이었지만 너무 추워서 알몸으로 연기하기 정말 어려웠다. 그 부분을 가장 먼저 찍고, 다음으로 사토 히사야스 감독의 <우충>을 찍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코미디 영화 <도쿄 좀비>라는 장편을 찍었지. 이후 짓소지 아키오 감독의 <거울지옥>을 촬영했다. <화성의 운하>의 실내 신과 <란포지옥>의 마지막 단편인 가네코 아츠시 감독의 <벌레>는 해를 넘겨 다음 해에 촬영했다."
- 네 편 모두에 등장하려니 촬영 과정 자체가 힘들었겠다. "<거울지옥>과 <우충>은 탐정 아케치 코고로로 등장하지만 워낙 비중이 적어 힘든 건 별로 없었다. <거울지옥>에선 나리미야 히로키 군이 워낙 열연해줘서 도움도 많이 됐고 감동도 받았고. <벌레>는 평소 내 모습이랑 비슷해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화성의 운하>가 가장 힘들었다."
<란포지옥>에서만 네 가지 캐릭터를 소화한 아사노 타다노부는 90년 영화 데뷔한 후, 40여 편의 영화를 종횡무진하며 수많은 캐릭터를 소화해냈다. 주류영화와 비주류 인디영화를 구분하지 않고,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는다. 코미디와 스릴러, 드라마와 판타지, 시대극과 현대극, 이런 구분은 아사노 타다노부 앞에선 큰 의미가 되지 못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영화를 찍지만 아사노 타다노부가 관심을 두고 있는 건 그보다 더 넓다. 고등학생일 때부터 밴드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고, 틈틈이 작업한 그림들은 작품집으로도 묶여 나왔다. -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정말 많은 영화를 찍었다. 거기다 음악과 미술 활동도 하고 있다. 이미지만으론 별로 부지런할 것 같지 않은데.(웃음) "천성적으로 뭔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이것저것 관심도 많고, 뭔가 생각나면 바로 움직여 행동해야 한다. 영화를 많이 찍은 건 그런 성격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여러 가지 다른 작업들도 마찬가지다."
- 이것저것 한다지만 영화를 선택하는 나름의 기준은 있을 듯하다. "가장 먼저 기준이 되는 건 각본이다. 얼마나 재미있나, 이런 걸 따지지. 물론 이야기를 재미있어 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내가 봤을 때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장 큰 기준이 된다. 다음은 감독. 감독에 따라 같은 이야기도 전혀 다른 색으로 변주된다."
- 다양한 역을 소화하지만 그 안에서 '아사노 타다노부'만의 고유한 느낌을 받는다. "그건 아마도 배우를 하고 싶어서 연기를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배우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있으면 캐릭터와의 거리 두기가 어렵지만, 난 그런 생각이 별로 없다. 왜 연극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굉장히 과장된 연기를 하지 않나. 그런 걸 보면서 '평소에 사람들도 저렇게 행동할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 점에선 배우는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웃음) 그래서인지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평소에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신경을 쓰는 편이다. 그런 것들이 연기에 묻어나는 듯하다. 개인적으론 출연작 가운데 다큐멘터리의 느낌이 강한 이사카 사토시 감독의 <포커스>가 가장 마음에 든다."
- 열여섯에 TV 드라마로 데뷔한 이후 줄곧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배우를 하고 싶어 연기를 시작한 게 아니라고? "아버지가 내 일에 관여를 많이 했다. 처음에 아버지가 TV 드라마 오디션을 보라고 하셔서 'TV에 한번 나가보는 것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오디션을 본 것뿐이었다. 그리고선 계속 어찌하다보니 영화 오디션에 되고, 그렇게 여기까지 온 거다. 원래는 음악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음악 하는 것을 반대해서 싸우면서 또 계속 일하고,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 영화는 거의 보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도 같은 맥락에선가. "그건 성격이 워낙 산만한 탓이 크다. 영화라면 2시간은 계속되는데 그동안 꼼짝 않고 앉아서 영화를 보는 건 내겐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음... 그래도 영화는 안 볼 것 같다.(웃음)"
2시간 꼼짝없이 앉아 있는 게 힘들어 영화는 잘 보지 않는다는 아사노 타다노부는 대신, 영화를 찍는다. 2005년에만 6편의 영화에 출연한 그는 이제, 일본을 넘어 세계를 배경으로 영화를 작업 중이다. 펜엑 라타나루앙 감독과는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와 <보이지 않는 물결>을,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는 <카페 뤼미에르>를 작업했다. 그리고 지금은 러시아 감독 세르게이 보드로프와 작업 중이다. - 허우 샤오시엔, 펜엑 라타나루앙, 세르게이 보드로프 등 외국 감독들과 작업을 많이 한다. 그들이 당신과의 작업을 원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 언어가 통하지 않아 영화에서 내가 어떻게 나오든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촬영을 하며 현장에서 문제가 생겨도 말이 통하지 않는 탓에 나는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웃음)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그런 나의 자유분방한 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줬다. 자유분방함이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의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신 듯하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 작업한 것이 바탕이 돼 다른 나라 감독들과의 작업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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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노 타다노부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 <몽골> 현장 사진을 몇 컷 본 적이 있다. 배우 아사노 타다노부가 아니라 몽골인 아무개로 보였다. 완전히 그 인물에 동화된 느낌이랄까? 징기스칸 '테무진' 역을 하기 위해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감정 이입은 어떻게 했나. "<몽골> 촬영을 위해 가장 필수적인 게 승마다. 영화를 준비하며 승마와 헬스를 매일 했다. 거기다 피부를 검게 태우기 위해 선탠도 했다. 승마와 헬스, 그리고 선탠. 이걸 다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땐 완전 지친 상태였다. 그럴 때마다 '아, 징기스칸들도 이렇게 힘들었겠지' 이런 말이 자연히 새어나왔다. 그렇게 감정 이입했다.(웃음)"
- 한창 촬영 중이지만 몽골 평원에서의 로케 촬영이 만만치 않을 듯하다. 어려움은 없나. "육체적으로 힘든 것도 있고, 분장을 많이 하는데 주로 지저분한 분장이다. 분장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샤워할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호텔이 좋지 않아 온수가 잘 나오지 않는다. 온수가 나오는 밤 8시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 한다. 아, 괴롭다.(웃음)" 세계 영화계는 그를 종종 '범아시아 배우'로 분류한다.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은 있으나 아사노 타다노부는 그런 것들에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좋은 이야기가 있으면 좋은 감독과 만나 영화로 옮길 뿐이다. 아사노 타다노부의 국제적 프로젝트는 <몽골> 뒤에 또 이어진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코인 로커 베이비스>에서 발 킬머, 아시아 아르젠토, 리브 타일러와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과거, 광활한 대지에 동서양을 잇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처럼 아사노 타다노부는 지금, 동서양을 잇는 영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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