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의 일상을 '월드컵의, 월드컵에 의한, 월드컵을 위한' 시기라 부른다면 과장일까? 더욱이 월드컵 16강을 향한 최대의 고비, 대한민국과 스위스의 대결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토요일 새벽, 다시 거리는 붉은 물결로 넘쳐날 것이고, 모든 TV는 축구를 앞 다퉈 중계할 것이다. 심지어 극장 스크린도 축구 열풍에 휩싸였다. 바야흐로 2006 독일 월드컵 최고의 시즌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표팀의 일거수일투족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오르락내리락하고, 16강 진출 국가가 절반 이상 정해지며 월드컵이 열기를 더해갈 동안에도 한 켠에서 영화는 계속 상영 중이다. 축구의 '축'자도 모를뿐더러 대한민국이, 혹은 전 세계가 축구에 열광하든 말든 별 관심 없는 분들을 위해 월드컵 기간에 즐길 수 있는 색다른 영화 5편을 소개한다. 서양 고전부터 최근 개봉한 국내영화까지, 애니메이션부터 디지털 장편영화까지, 숫자는 적어도 영화 각각의 매력은 빼어나다.
. ■ 추억은 방울방울 감독 다카하다 이사오 | 1991년 |
상영관 CGV상암
홈페이지 www.cgv.co.kr 상암 월드컵경기장에 가면 거리 응원에 동참할 수 있지만, CGV상암에 가면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추억은 방울방울>을 감상할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이끌어가는 '꿈의 공장' 스튜디오 지브리의 공동 설립자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다 이사오가 프로듀서와 감독으로 만나 빚어낸 '리얼리티' 드라마. 도쿄에서 살고 있는 오카지마 타에코는 여름 휴가를 맞아 형부의 고향인 시골 야마가타현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기농업을 하고 있는 귀농 청년 토시오를 만난다. 시골에서 보낸 열흘. 그 짧은 시간동안 타에코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방울 방울' 떠올리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꽃을 재배하는 장면들은 꽃재배의 교본이 될 수 있을 만큼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감독의 말처럼 <추억은 방울방울>은 현실감이 뚝뚝 묻어나는 그림체가 아름답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이야기의 배경인 야마가타현을 직접 방문해 그곳의 느낌을 화면 위에 적셔낸 <추억은 방울방울>은 나뭇잎 하나하나의 음영, 작은 돌부리 하나, 빗물 위의 그림자까지 생생하게 살아있어 '사실주의 애니메이션의 교본'으로 불릴 만하다. 다카하다 이사오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반딧불의 묘><이웃집 야마다군>도 CGV에서 상영 중이다.
. ■ 캣 피플 감독 자크 투르뇌르 | 1942년 |
상영관 서울아트시네마 |
홈페이지 www.cinematheque.seoul.kr <환생><오멘><착신아리 파이널>까지 공포영화들이 줄줄이 소개되고 있는 요즘, 공포영화의 '고전'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빛과 그림자를 유려하게 사용하며 스타일리쉬한 영상을 그려내는 자크 투르뇌르 감독의 미스터리 호러영화 <캣 피플>이 바로 그것. 저주받은 핏줄을 이어받아 키스를 하면 야수로 변신한다고 생각하는 여성 이리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캣 피플>은 성적 충동과 야수적 본능을 교묘하게 결합시키며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공포와 연결한다. <캣 피플>은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나열해 충격을 주는 대부분의 현대 공포영화와 달리, 주변에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은근한 암시와 분위기로 전달해 공포감을 조성하는 방법을 택했다. 자크 투르뇌르의 '공포 분위기' 조성에 가장 큰 몫을 하는 건 '그림자'. 불 꺼진 수영장에 있던 앨리스가 사나운 야수로 변신한 아리나의 존재를 감지하고 공포감을 느끼는 <캣 피플> 최고의 명장면에서 아리나는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수영장 물에 반사된 어두운 그림자와 야수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로만 존재한다. 빛과 그림자만으로도 공포의 맛을 제대로 살린 <캣 피플>을 포함한 자크 투르뇌르의 걸작 7편은 6월 29일까지 서울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된다.
.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감독 이와이 슈운지 | 2001년 |
상영관 시네코아
홈페이지 www.cinecora.co.kr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포함해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와 <피크닉>, <언두>까지 이와이 슈운지의 영화 네 편을 모조리 만날 수 있다. 6월 30일 폐관을 앞둔 시네코아가 관객을 위해 준비한 마지막 선물, '시네코아 기획전'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작품들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패키지'라 할 만하다. 열네 살 소년 유이치의 일상은 참으로 팍팍하다. 한밤중에 동급생들에게 끌려 나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위를 하거나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성폭행 당하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어야만 한다.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유이치가 기댈 수 있는 건 현실의 중력에서 벗어나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꿈의 목소리, '릴리 슈슈'의 음악뿐 이다. 고통과 슬픔, 절망과 허무가 빽빽하게 채워진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감성은, 푸르고 너른 논밭의 아름다움과 풍부하고 세심하게 잡아낸 빛의 영상과 대조를 이루며 관객에게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이와이 슈운지 스스로 "유작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만큼 이와이 슈운지의 영상 미학이 집약된 작품으로 음악감독 고바야시 다케시가 만들어낸 '릴리 슈슈'의 몽환적인 음악 선율이 오래 가슴을 울린다.
. ■ 가족의 탄생 감독 김태용 | 2006년 |
상영관 스폰지하우스 압구정
홈페이지 www.spongehouse.com 지난 5월 18일 개봉해 전국 20만 관객을 모으고 '순식간에' 스크린에서 사라진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 하지만 <가족의 탄생>을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아직 열려 있다. 서울 신사동 스폰지하우스 압구정에서 장기 상영에 들어간 <가족의 탄생>은 '핏줄'로 맺어진 가족에 대한 우리의 기존 가치관을 멋지게 뒤엎는다. 엄마뻘 되는 여자를 아내라고 데리고 들어온 남동생과 누나의 이야기, 가정 있는 남자와 바람나 살고 있는 엄마와 그녀의 딸, 누나와 단둘이 사는 대학생의 연애담. 세 가지 에피소드로 진행되는 <가족의 탄생>은 영화 끝 무렵, 세 이야기가 하나로 모이며 가족의 전제 조건이 '피'가 아닌 '사랑'에 있음을 역설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아기자기한 판타지로 포장해낸 김태용 감독의 연출력도 제대로지만, 연기자들의 '진국' 연기를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고두심, 문소리의 연기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고, 브라운관을 통해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세운 엄태웅의 능청스런 연기와 거품 없이 담백한 공효진의 연기가 일품이다. 혈연집단으로서의 '가족'을 철저히 거부하지만 그 어떤 '가족영화'보다 '가족'에 대해 더 깊이 사유케 한다.
. ■ 마법사들 감독 송일곤 | 2005년 |
상영관 코엑스 아트홀
홈페이지 www.magicians.co.kr 송일곤 감독의 <마법사들>은 영화의 매력과 연극의 매력을 동시에 맛보게 하는 작품이다. 단 한 번의 커팅도 없이 한 번의 샷(shot)으로 잡아낸 '원테이크 원컷' 기법을 이용한 덕에 <마법사들>은 제한된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의 매력을 고스란히 영화에 새겨 넣었다. 배경은 강원도의 숲속 카페. 카페 주인이면서 밴드 '마법사들'의 드러머였던 재성은 베이시스트 명수와 3년 만에 만난다. 자신의 여자친구이자 기타리스트였던 지은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서다. 곧 보컬 하영이 동참하고, 예기치 않게 스님 한분이 카페를 찾는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이곳엔 '혼'이 된 지은도 함께 있다. '카페'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마법사들>의 가장 큰 매력은 '원테이크 원컷'이 만들어내는 공간 미학이다. 영화 내내 미끌어질 듯 흐르는 음악과 함께 공간을 가볍게 유영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색다른 영화 감상의 경험을 선사한다. 코엑스 아트홀에서는 <마법사들>과 더불어 송일곤 감독의 단편선을 함께 진행한다. <간과 감자><소풍><광대들의 꿈>
까지 송일곤의 단편 전편을 감상할 수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