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면 2010년부터 중학교 졸업예정자가 원하는 고교에 먼저 지원한 뒤 추첨으로 배정받는 방식으로 입학할 학교를 정하게 하는 방안을 서울시교육청이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선지원 후추첨' 방식으로 고교 배정을 할 경우 서울 강북에 사는 학생이 강남에 있는 고교에 입학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선지원 후추첨' 방식으로 고교 배정한다
서울시교육청은 20일 '서울시 후기 일반계 고교 학교 선택권 확대 방안'이라는 주제로 공청회를 열어 이같은 내용을 논의한다. 이날 공청회에서 박부권 동국대 교육학과 교수가 서울시교육청의 용역을 받아 만든 4가지의 고교 배정방식 개선방안을 소개할 예정이다.
1안은 단일학군-일반학군에서 각각 2개 학교를 선택해 지원한 뒤 추첨을 통해 배정하는 것이다. 즉 중학교 3학년 학생이 단일 학군(서울지역 전체 학교 대상)에서 1지망과 2지망 학교를 정해 지원하면 추첨을 통해 고교를 배정한다. 고교 정원의 10~20%를 단일학군 지원자 중에서 뽑는다. 그리고 단일학군에서 지원한 학교에 모두 탈락한 경우에는 일반학군(현재의 학군)에서 1지망과 2지망 학교를 정해 지원하면 추첨을 통해 고교를 배정한다. 단일학군과 일반학군에서 모두 탈락한 경우에는 지금처럼 인접한 고교에 추첨 배정한다.
2안은 중부학군-단일학군-일반학군에서 각각 2개 학교를 선택하여 지원한 뒤 추첨을 통해 배정하는 것이다. 1안의 절차에 앞서 중부 학군(도심 반경 5㎞ 이내 및 용산구 관내 37개 학교를 묶어 공동학군으로 정한 것) 가운데 2개 학교에 우선 지원기회를 준다. 중부 학군에 속한 고교는 정원의 상당 비율을 이 중에서 뽑는다. 중부 학군에 지원하지 않거나 지원한 학교에 배정받지 못한 학생들은 1안과 동일한 절차를 밟는다.
3안은 19개의 통합학군에서 3지망까지 지원받아 추첨 배정하는 것이다. 통합학군은 기존의 11개 학군에서 인접한 2개 학군을 묶어서 구성한다. 즉 A학군이 B, C 학군과 인접하고 있을 경우 A와 B, A와 C를 각각 묶어 통합학군을 구성한 뒤, 학생의 통학 거리를 고려하여 소속 통합학군을 정한다. 이때 3지망까지 모두 탈락할 경우 통학 거리 등을 고려해 통합 학군에서 일괄 추첨 배정한다.
4안은 일반학군-통합학군에서 각각 2개 학교를 선택해 지원한 뒤, 추첨 배정하는 것이다.
이중 서울시교육청이 가장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은 2안이다. 최근 심화되고 있는 도심 학교의 학생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강남 부동산 값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지원이 몰릴 학교 근처에 사는 학부모들의 반발이 예상되고, 학생들의 평균 통학거리가 멀어진다는 문제가 있다. 평균 통학거리의 증대는 학생 개개인에게 부담이 될 뿐 아니라 서울시의 교통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
강남 부동산 문제와 학부모들의 요구, 두 마리 토끼 잡으려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은 교육감 선거 과정에서 학생의 의사를 묻는 과정 없이 거주지와 가까운 고교에 추첨 배정하도록 돼 있는 현행 학군제를 '선지원 후추첨'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공약을 내건 바 있다. 학생의 학교 선택권을 확대하겠다는 취지였다.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현행 학군제를 조정하려는 움직임이 종종 제기돼 왔다. 강남에 있는 학교를 선호하는 학부모들의 요구를 충족하는 한편 부동산 가격 폭등 문제의 해결에도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에서다. 지난 3월 29일 정부는 부동산 대책과 양극화 대책을 논의하면서 현행 학군제의 조정 방안을 공식 거론했다. 학생들의 선호도가 높은 강남 학군을 아예 공동학군으로 만들어 누구나 지원할 수 있게 하거나 11개로 구성된 현행 학군을 4∼7개의 광역학군으로 재편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최근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서는 열린우리당 이계안 의원이 현행 학군제를 폐지하고 서울시 전체를 단일학군으로 묶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의원 입법으로 발의하기도 했다.
또 한나라당 이군현 의원은 인접 학군을 묶어 광역학군으로 재편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인기 고교와 기피 고교의 기정사실화…평준화의 근간 흔든다"
하지만 서울시 교육청의 시도가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런 시도는 인기있는 고교와 그렇지 않은 고교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행 고교 평준화 정책의 근본적인 전제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인기 고교와 기피 고교가 선명하게 갈라질 경우 입시 위주의 교육이 더욱 과열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학교의 교육 수준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없는 상태에서 각 학교들은 가시적인 성과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결국 입시 위주의 교육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전교조 서울지부 이금천 정책실장은 "서울시 교육청의 학군조정 연구용역안은 방향부터 잘못됐기 때문에 평가할 의미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시교육청이 이런 형태의 학군조정 방식으로 접근하게 된다면 선호학교는 소수화되고 비선호학교는 다수화되어, 고교 평준화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라며 "결국 모든 학교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만이 궁극적인 대책"이라고 주장했다.
'입시 명문고를 고를 권리' 아닌 '원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절실
안승문 서울시 교육위원은 "서울시 교육청의 학교 선택권 개념은 비교육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동일한 교육과정을 갖고 있으면서 단지 입시 성과만 다를 뿐인 학교들에 대한 선택권을 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안 교육위원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입시 명문고를 고를 권리'가 아닌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서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라고 말했다. 그는 "서울시 교육청과 정부가 학교 간의 서열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교육여건이 열악한 학교의 문제점을 덮어버리려 한다"고 말했다.
국회 교육위원회 열린우리당 간사인 정봉주 의원도 서울시 교육청의 입장에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와 서울시 교육청이 교육적 부작용에 대한 고려 없이 여론의 단기적인 호응만 겨냥해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서울시 교육청 관계자는 "2차례의 공청회와 모의실행(시뮬레이션)을 거쳐 내년 2월까지 안을 확정할 계획"이라며 "이번 위탁연구를 통해 만들어진 안이 시교육청의 공식 방안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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