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한 세계화의 부작용이 다시 박현채를 불러냈다"
7일 저녁 서울 명동의 가톨릭회관에서 '고 박현채의 추모집과 전집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가한 이들은 생전의 박현채를 회고하며,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그의 이론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자리에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사회주의가 몰락한 1990년대 이후 모두가 그의 이론을 틀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급격한 진행된 자본의 세계화가 숱한 부작용을 낳았다. 이런 상황이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다시 끄집어내게 했다. 민족경제론은 세계화에 대해 근본적으로 되짚어보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1970~80년대에 〈창작과 비평〉을 내면서 만났던 박현채의 면모를 회고했다. "박현채의 글은 편집자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 지독한 악필, 악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글은 힘이 있었다. 엉켜 있는 문장을 조금 다듬고 나면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 드러났다. 나는 그의 글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1970~80년대 〈창작과 비평〉에 실렸던 글을 꼽는다. 그의 글은 민중에 대한 애정에 바탕을 둔 것이었기에 현실이 엄혹할수록 더욱 빛났던 것 같다."
'장비'의 풍모를 지닌 선비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1964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만났던 박현채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시 박현채는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있었고, 김 전 수석은 6·3사태와 관련해 형무소 생활을 했다.
김 전 수석은 "당시 막 생겨난 중앙정보부는 6·3사태의 배후에 인혁당이 있다는 각본을 짜놓고 있었다. 그래서 인혁당 관계자들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30대 초반으로 나이는 젊었지만 인혁당의 2인자로 지목됐던 박현채는 매번 초죽음이 될 정도의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중앙정보부 건물은 옆방에서 고문당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도록 돼 있었다. 고문에 끝내 굴하지 않던 박현채의 강인한 면모가 옆방에 있는 내게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박현채를 수사했던 검사가 "당신들이 바라는 세상이 온다면 박현채는 수상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평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현채는 단지 곧고 강인하기만 한 선비는 아니었다. 오히려 '장비'라는 그의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호탕하고 대범한 성격을 가진 인물에 가까웠다. 김금수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은 1960년대 수감생활을 하며 겪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중앙정보부에서 취조를 받던 박현채가 갑자기 수사관들에게 "담배도 음식인데, 피의자들에게 음식을 굶겨서는 안 될 것이니 하루 한 갑씩은 꼭 제공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실랑이 끝에 이 요구가 받아들여져 결국 피의자들이 모두 담배를 피울 수 있게 됐다. 서슬 퍼런 취조 현장에서 당당하게 담배 피울 권리를 요구한 것은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었다고 김금수 위원장은 회고했다.
〈태백산맥〉속의 소년전사 조원제가 바로 박현채
박현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그의 빨치산 활동 경력이다. 광주서중 3학년이던 1950년 그는 빨치산 활동을 하기 위해 백아산에 들어간다. 열여섯 살 소년 빨치산으로서의 그의 활동은 소설 〈태백산맥〉에 잘 묘사돼 있다. 〈태백산맥〉후반부에 등장하는 소년전사 조원제의 모델이 된 실제 인물이 박현채다. 1952년 백아산에서 내려오다 경찰에 체포된 박현채는 이후 전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백아산에서 내려오다 박현채와 함께 체포됐던 이가 지난해 가명으로 〈코리아포커스〉와 인터뷰 했을 때 "현채는 당에서 하산시켰다. 하도 영리하니까 산에서 죽지 말고 살아남아 더 큰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박현채는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자신이 빨치산 출신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의 빨치산 경력이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게 된 것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면서부터다.
김금수 위원장은 1960대 말에 박현채와 함께 지리산을 종주하며 그로부터 들었던 그의 빨치산 활동 경험담을 소개했다. 빨치산 활동을 하던 시절 박현채는 아주 엄격한 원칙론자였다. 김 위원장이 박현채에게 들었다며 소개한 일화는 그의 이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빨치산 부대에서 문화부 중대장으로 활동하던 박현채가 어느 날 연대장과 논쟁을 벌였다. 빨치산은 밤에 능선을 타도 안 되고, 상대방의 시야 안에서 불을 피워도 안 된다. 그런데 연대장이 이런 규칙을 어겼다며 박현채가 따지고 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연대장은 이런 규칙도 결국은 대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맞받아쳤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박현채는 빨치산 시절에는 연대장의 말이 이해가 안 됐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당시의 자신과 연대장 중 누가 옳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더라"고 말했다.
빨치산 활동 통해 교조적 원칙론의 위험 깨달아…"현실 속의 민중이 중요"
김 위원장은 박현채가 빨치산 활동을 통해 교조적인 원칙론의 위험성을 깨닫게 된 것이 훗날 그의 연구작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김 위원장의 말은 1990년대 초에 박현채가 1980년대 변혁운동의 두 가지 이론적 경향이던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에 대해 "PD적 입장에 서지 않은 NL의 비계급성은 허구이며 PD 역시 민족해방의 과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NL과 PD의 대립은 현실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던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단지 연구실에만 갇혀 있는 학자이기를 거부했던 박현채에게 중요한 것은 이론 자체가 아니었다. NL이나 PD와 같은 이론적 노선은 보다 나은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봤던 것이다.
이론보다 현실을 우위에 두되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던 학자 박현채에게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은 큰 충격이었다. 타고난 건강체질인 박현채가 갑자기 기운을 잃어버린 것도 그 무렵부터다. 소설가 조정래는 자신이 본 박현채의 모습 중에서 가장 불행해 보였을 때는 소련이 붕괴했을 때였다고 이야기했다. 평생 꿈꿔 왔던 인간다운 세상이 사회주의를 통해 이뤄지리라 믿었는데, 그 믿음이 허물어지면서 박현채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1995년 박현채의 갑작스런 죽음은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조정래는 말년의 박현채가 "사회주의가 몰락하지 않으려면 다당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양당제는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평생 교조주의적 태도를 경계해 온 박현채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조정래는 박현채의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이 '생활하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라고 봐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철저한 원칙론자 박현채가 규칙을 깬 이유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박현채를 모델로 해서 그려진 인물 조원제는 당의 지침을 철저하게 지키는 원칙주의자다. 조정래가 소개한 다음의 일화는 박현채가 견지하려 했던 원칙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엿볼수 있게 한다.
"박현채의 능력을 아까워 한 노동당이 열여덟 나이의 그를 입당시키려 했다. 그런데 당원이 되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여겼던 박현채가 그것을 거부했다. 스무살이 돼야 입당할 수 있다는 당규를 스스로 깰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렇게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던 그가 당규를 깬 적이 있다. 자기보다 어린 빨치산을 먹이기 위해 당의 허락 없이 소를 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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