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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와 서울대, 조선왕조실록 놓고 신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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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와 서울대, 조선왕조실록 놓고 신경전

'기증'이냐 '반환'이냐 … '월정사'냐 '규장각'이냐

일제 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가 도쿄대로 가져간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史庫)본이 오는 7월 초 국내로 돌아온다. 그런데 도쿄대 측으로부터 실록을 돌려받는 방식을 놓고 불교계와 서울대가 대립하고 있다.

도쿄대, '반환' 요구해 온 불교계 대신 서울대에 '기증'

실록이 다시 국내로 돌아오게 된 데에는 지난 3월 불교계를 중심으로 꾸려진 조선왕조실록 환수추진위원회(환수위)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환수위는 그동안 실록을 보관하고 있는 도쿄대와 수 차례 반환 협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환수위는 일제의 조선왕조실록 반출이 불법적이었다며 "오대산 사고본을 반환하지 않으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압력을 넣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도쿄대 측은 올해로 개교 60주년을 맞은 서울대에 학술교류의 형식을 빌어 실록을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서울대 측이 도쿄대의 실록 기증 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일제에 의해 반출됐던 실록은 93년만에 국내에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도쿄대의 결정은 실록을 계속 보유할 명분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한국 민간단체의 요구에 도쿄대가 굴복하는 듯한 모양새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태수 서울대 조선왕조실록 협상위원장은 31일 기자회견에서 "도쿄대 측이 '서울대 개교 6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현재 도쿄대 종합도서관에 남아 있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47책을 기증하겠다'고 지난달 15일 먼저 제안했다"고 밝혔다.

"빼앗아간 것 돌려주는 게 '기증'?"…"국제법 고려할 때 가장 실용적 선택"

그러나 '기증'이라는 표현이 문제가 됐다. 원래 우리 것이던 실록을 되돌려받는 것이므로 기증이 아닌 반환이라는 표현이 올바르다는 것이다. 즉 도쿄대 측은 '반환', 우리 측은 '환수'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3월부터 도쿄대와 실록 반환 협상을 진행한 환수위가 취해 온 입장이 이에 해당한다. 환수위는 소유권을 상대에게 넘긴다는 뜻인 기증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경우 지금까지 도쿄대가 실록의 정당한 소유권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측도 이같은 지적을 의식하고 있다. 이태수 위원장은 "오대산 사고본 47책 반환에 대해 도쿄대에서는 기증, 서울대에서는 환수의 형태를 취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환수위 측의 주장을 절반만 수용한 셈이다.

이 위원장은 "도쿄대 측에서 반환이 아니라 기증이라는 용어를 쓴 데 대해 아쉬움이 있지만 소유권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전에 거론됐던 영구임대나 맞교환보다는 진일보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외국에 강탈당한 문화재가 기증 형식으로나마 소유권을 되돌려 받은 사례는 흔치 않다. 1865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대에 약탈된 외규장각 의궤도서가 대표적이다. 명백히 불법약탈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측은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요구하는 한국에 대해 소유권 반환이 아닌 '영구임대' 혹은 다른 문화재와의 '맞교환'을 주장하고 있다.

국제법 분야의 원로 학자인 백충현 서울대 명예교수는 "식민지 시대 반출된 문화재 반환의 경우 현재 소유자, 반출 경위, 시점 등에 따라 복잡한 문제를 따져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실용적인 접근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식민지 시대 조선총독부가 도쿄대로 실록을 옮겨가는 과정에서 약탈과 같은 직접적인 불법행위가 있었는지를 입증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증이 아닌 반환이라는 형식을 관철하려면 결국 논의가 식민지배 자체가 국제법상으로 불법한 것인지의 여부로 소급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학문적으로나 외교적으로 까다로운 문제라는 것이다.

게다가 지난 1965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협정을 체결하면서 일본에 대해 더 이상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도 부담이 된다.

불교계 "'기증' 아닌 '반환' 형태로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실록 반환 협상을 진행해 왔던 환수위 측은 도쿄대의 제안을 받아들인 서울대의 태도에 대해 수긍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환수위는 31일 오후 발표한 성명을 통해 "서울대가 도쿄대의 '기증' 제안을 아무런 역사의식 없이 받아들인 것은 조국과 국민 앞에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비판했다.

환수위는 실록을 '기증'이 아닌 '반환' 형태로 가져오는 게 국제법상 쉽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환수위는 성명을 통해 "우리는 실록의 강탈 상황과 도쿄대가 소장한 경위, 현재의 정확한 소장 목록 등을 모두 입증했고 31일 3차 협상을 마지막으로 소송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었다"며 "이에 당황한 도쿄대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어 '서울대 기증'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환수위 간사인 혜문 스님(봉선사)과 법상 스님(월정사)은 31일 도쿄대에서 열릴 예정이던 조선왕조실록 환수를 위한 3차 협상에 나서기 위해 지난 30일 오후 일본을 방문했다. 환수위원회 공동의장인 오대산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은 31일 "도쿄대가 이제까지 협상을 진행해 온 환수위를 무시하고 난데없이 서울대에 실록을 기증하기로 했고, 서울대 역시 환수위와 아무런 상의나 통보 없이 그것을 덥석 받았다"면서 서울대와 도쿄대 양쪽에 대해 유감을 나타냈다.

돌아온 실록의 보관 장소, "오대산 월정사냐? 서울대 규장각이냐?"

이처럼 불교계가 중심이 된 환수위와 서울대가 대립하고 있는 배경에는 실록의 보관 주체를 정하기 위한 갈등도 게재돼 있다. 불교계는 실록을 오대산 월정사에 보관하는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실록의 환수를 추진해 왔다.
▲ 오대산 사고 모습. 조선 시대 5대 사고 중 하나이다. 1913년 조선 총독부는 이곳에 보관돼 오던 조선왕조실록을 도쿄대로 옮겨갔다. 사진 속의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불탄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왕실의 족보 등을 보관했던 선원보각이다.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은 "오대산 사고본은 원래 월정사가 관리를 맡았다"며 "문화재는 제 자리에 있을 때 그 가치가 있는 만큼 실록은 서울대가 아닌 월정사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월정사는 오대산에 이미 사고를 복원해놓은 상태다.

그러나 이태수 서울대 조선왕조실록 협상위원장은 31일 기자회견에서 "이번 도쿄대와의 합의에 대해 환수위에 미리 알리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면서도 "대한제국 말 실록 현물은 오대산에 보관돼 있었지만 1908년 순종의 칙령에 의해 이에 대한 관리권이 모두 규장각에 귀속됐었다"라고 말했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도 이날 열린 서울대 개교 60주년 및 규장각 창립 230주년 기념 한국학 국제학술회의 축사에서 "규장각이 현재 국내 최고 수준의 보존시설을 갖춘 만큼 이번에 돌려받은 실록을 관리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록을 월정사가 아닌 규장각에 보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실록의 보관 주체를 둘러싼 갈등에 대해 문화재청 관계자는 "실록이 돌아오면 법적 절차를 거쳐 문화재로 지정될 것으로 본다"며 "실록의 관리 주체는 문화재위원회 등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이란?

조선 초기부터 서울 춘추관과 충주, 전주, 성주 등 네 곳에 보관돼 왔던 실록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전주 사고본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됐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은 전주 사고본을 바탕으로 네 벌을 더 제작해 정족산(강화),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무주) 사고에 보관했다. 이 가운데 오대산 사고에 있던 실록(오대산본)을 일제 시대에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시다케가 도쿄대 도서관으로 실어갔던 것이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도쿄대 도서관에 있던 760여 책이 불타버리고 외부로 대출됐던 74책만 살아 남았다. 이 중 27책은 1932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 규장각에 반환됐다. 이번에 돌려받는 것은 도쿄대 도서관에 남아 있던 나머지 47책이다. 이로써 현존하는 오대산본이 모두 국내에 들어오게 된 셈이다.

임진왜란 이후 가장 먼저 복원된 오대산본은 전주 사고본의 오자와 탈자가 표시돼 있어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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