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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겸재의 작품무대 '양천읍치' 되살아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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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겸재의 작품무대 '양천읍치' 되살아나나?

강서구 가양1동 일대…선조의 생활상 엿볼수 있는 유적지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의 작품 무대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진경산수화 남긴 겸재의 작품 무대 보존하자"

'서울특별시 향교재단'은 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양천읍치 역사문화경관 보전방안'에 관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양천(陽川)는 서울시 강서구 가양1동 일대를 가리키는 조선시대의 지명이고, 읍치(邑治)란 수령이 사무를 보는 관아가 있는 곳을 뜻한다.

이 지역은 18세기 중엽 화가 겸재 정선이 작품활동을 하던 곳이다. 겸재는 1739년 양천현령으로 부임해 양천읍치 주변의 풍경을 담은 <경교명승첩>이라는, 불세출의 진경산수 작품들을 남겼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이 화첩은 관념 속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내려 한 겸재의 의도가 잘 반영된 그림들로 평가된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발표자로 참가한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화가 겸재 정선의 삶과 예술에 대해 설명했다. 겸재는 중국의 화풍을 충분히 소화한 바탕 위에서 조선의 풍경을 그리기에 적합한 새로운 화풍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진경산수화'라고 불리는 그의 화풍은 한국 미술사에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근대 이전 생활상 엿볼 수 있어

이어 발표자로 나선 전봉희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양천읍치 일대의 역사와 유적분포 현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 양천읍치 주변지역의 역사유적 분포 현황. ⓒ전봉희

이 지역은 고구려의 '제차파의현'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역사에 등장했다. 그 후 이 지역이 신라에 복속되면서 '공암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고려 충선왕 시절에 현재와 같은 '양천'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고구려의 지명인 제차파의(濟次巴衣)는 갯바위라는 뜻이다. 제차는 고대 한국어로 '갯'이라는 뜻이며, 파의는 바위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신라 시대의 지명인 공암과 제차파의는 모두 양천읍치 북쪽 한강변에 위치한 바위의 이름이다. 한강을 통해 배로 물자를 수송하던 사공들에게 중요한 표시가 되는 바위의 이름을 따서 지명을 붙였던 것이다.

또 고려 이후의 지명인 양천은 '볕이 잘 드는 내(川)'라는 뜻이다. 이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농사가 지어져 왔음을 알려주는 지명이다.

전 교수는 이같은 지명의 변천을 통해 양천읍치 일대의 인문지리적 특징을 유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지역은 철도가 놓이지 않고 도로가 발달하지 않아 강을 통해 물자를 나르던 시절에 교통과 물류의 중요한 거점이었고, 오랜 역사를 가진 농촌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 이전 시기의 생활상을 집약적으로 살피고자 하는 이들이 이 지역에 남아 있는 유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전 교수가 양천읍치의 역사문화경관을 보존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향교가 남아 있는 곳

전 교수는 특히 양천읍치의 사적 중 하나인 양천향교의 보존에 관심을 보였다. 향교를 빼놓고는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논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향교는 지역에서 학문과 교육의 중심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학교가 들어서면서 향교는 급격히 쇠락했다. 향교는 근대의 도래와 함께 자기 역할을 잃어버린 대표적인 문화유산 중의 하나다.
▲ 양천현지도(1872년). ⓒ전봉희

더구나 양천향교는 현재 서울시의 행정권역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향교다. 전 교수가 양천향교의 보존에 열정을 쏟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투금강의 전설 낳은 곳…'눈에 안 보이는 것' 지키려는 노력들

그 다음 발표자로 나선 건축가 김흥수 씨는 양천읍치의 역사문화경관을 복원하기 위한 세부 계획을 설명했다.

그는 겸재가 진경산수화를 들고나온 18세기 중엽의 풍경을 살필 수 있는 탐방로를 양천읍치에 조성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그린 그림과 양천 향토지, 19세기에 나온 양천현 지도 등을 참조해 조선시대 양천읍치의 풍경을 복원해낼 수 있다고 밝혔다.
▲ 왼쪽 위부터 차례로 1966년, 1974년, 1981년, 1990년 각각 촬영된 항공사진에 나타난 양천읍치 주변지역의 도시화과정. ⓒ김흥수

김흥수 씨는 이런 복원계획을 발표하면서 양천읍치 일대에서 전해오는 전설을 소개했다.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한 번씩 접했을 법한 이야기이다. 고려 말 이조년과 이억년 형제가 양천읍치에 있는 공암나루에서 배를 탔다. 그들은 각자 금덩어리를 하나씩 안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생이 금덩어리를 강에 던졌다. 형이 없었다면, 두 개의 금덩어리를 모두 가질 수 있었으리라는 사특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형도 동생의 말이 옳다며 금덩어리를 강에 던졌다. 이같은 전설 때문에 공암나루 앞의 강은 투금강(投金江) 혹은 투금탄(投金灘)이라고 불려 왔다.

투금강의 전설을 낳은 형제는 눈에 안 보이는 것을 지키기 위해 눈 앞의 금덩어리를 버렸다. 양천읍치 일대를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모습이 투금강 전설 속 형제와 닮았다. 옛것을 허물고 새로운 것을 짓기에 급급했던 근대 이후의 역사에 가리워져 아무에게도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을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제까지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지키려는 이들의 노력이 결실을 거둘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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