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유명한 인기배우가 저예산 예술영화에 출연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시나리오를 읽어본 배우는 탄탄한 구성과 높은 예술성에 반했다. 문제는 빠듯한 제작비와 너무나 적은 출연료. 평소 편당 수백만 달러, 아니 수천만 달러를 받는 개런티를 받아 온 배우 입장에서 이번에는 거의 공짜 출연이나 마찬가지였다. 배우는 독립영화 발전에 도움을 주고, 상업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자신의 또다른 면을 관객들에게 알리기 위해 적은 개런티를 감수하고 출연을 결심한다. 문제는 개봉 이후. 당초 본전만 건져도 다행이라고 여겼던 영화의 흥행이 잘돼도 너무 잘된 것이다. 배우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가 소규모 독립영화사가 제작하는 비상업적인 예술작품인 줄 알았으나, 막상 개봉과정을 보니 모기업인 대형스튜디오의 막강한 마케팅 지원과 배급전략이 총동원돼 상업영화 개봉방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 적은 개런티로 시간을 쪼개 영화에 출연한 배우는 배신감을 느끼게 될까. 만약 그랬다면, 배우는 제작사를 대상으로 깎아준 개런티를 도로 내놓으라고 요구해야 할까. 아니면, 속이야 조금 쓰리지만 당초 계약 조건을 그대로 감수해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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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프레시안무비 |
이런 미묘한 문제가 최근 미 영화계에서 실제로 터졌다.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목장 감독관으로 출연했던 랜디 퀘이드가 제작사인 포커스 피쳐스의 공동대표인 제임스 샤머스와 데이비드 린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 출연계약 당시 제작진과 이안 감독으로부터 저예산 예술영화란 말만 믿고 적은 출연료 조건을 받아들였으나 알고보니 모회사인 메이저 영화사(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지원을 받아 전통적인 방식으로 마케팅과 배급이 이뤄졌고, 이 덕분에 전세계에서 1억6000만 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렸다는 것이 퀘이드의 주장이다. 퀘이드의 변호사들은 <브로크백 마운틴>과 같은 '저예산 독립영화의 탈을 쓴 메이저영화' 제작방식을 '영화세탁(movie laundering)'이라고 부르면서, 제작사는 퀘이드에게 1000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제작비는 1400만 달러. 주인공 제이크 질렌할과 히스 레저, 랜디 퀘이드를 포함해 전 출연진에게 지급된 개런티는 총 52만1000달러였다. 랜디 퀘이드야 톱클래스급 배우에 들어가지 않는다 쳐도, 떠오르는 인기스타인 질렌할과 레저의 경우엔 평소 개런티와 비교하면 이 영화에 거의 노개런티로 출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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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쉬 ⓒ프레시안무비 |
올 아카데미영화상에서 작품상 등 주요부문을 석권한 <크래쉬>도 비슷한 법정 공방에 휘말려 있다. 650만 달러로 제작된 이 영화는 현재까지 전세계에서 9080만 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맷 딜러, 샌드라 블록 등 출연진은 물론이고 제작진들은 조합이 정한 최저임금 수준의 돈만 받고 이 영화에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막상 개봉 후 기대 이상의 히트를 기록하자, 제작자 중 한 사람이 투자 총책임자였던 밥 야리에게 정당한 대가를 내놓으라며 최근 소송을 제기했다. 뉴욕타임스는 영화계 종사자들의 말을 인용해, 최근 들어 메이저 영화사에 소속된 독립제작사들이 많아지면서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크래쉬> 경우에서 나타난 갈등이 점점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경우 모회사인 유니버설이 제작비의 약 3배에 달하는 3000만 달러를 홍보비로 쏟아부었다. <굿 나잇 앤 굿 럭> 도 제작비는 800만 달러에 불과했으나 제작사 워너 인디펜던트의 모회사 워너 브러더스가 홍보비 2500만 달러를 써서 전세계에서 5100만달러를 벌어들였고 결국 아카데미에 후보작으로 오르는 성과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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