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이 주축이 된 민간 싱크탱크(두뇌집단)인 희망제작소가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희망제작소의 이사장을 맡은 김창국 전 국가인권위원장과 이사를 맡은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지은희 덕성여대 총장, 이옥경 내일신문 전 편집국장, 건축가 승효상 씨, 유지나 동국대 교수 등을 비롯해 300여 명의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참여했다.
***시민운동이 주도하는 싱크탱크**
해외 선진국들에서는 다양한 성향의 민간 싱크탱크들이 생산해낸 정책 아이디어나 논리가 정당의 입법활동이나 정부의 행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 워싱턴 인근에 있는 300여 개의 싱크탱크들은 '미국의 두뇌'로 불리기도 한다. 보수 성향의 민간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이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등이 부시 행정부의 정책을 막후에서 조종해 왔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민간 싱크탱크의 영향력이 크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민간 싱크탱크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다. 민간 싱크탱크라고 해봐야 고작해야 삼성경제연구소 정도를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하물며 시민사회단체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된 민간 싱크탱크라면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일을 주로 해 온 시민운동이 자체 싱크탱크를 마련한다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은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다. 참여연대를 오랫동안 이끌었던 경험을 지닌 그는 희망제작소의 상임이사를 맡았다.
***삶의 현장에서 건진 정책 아이디어**
희망제작소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이냐는 질문에 그는 희망제작소 홈페이지(makehope.org)의 사회창안센터(Social Invention Center) 게시판에 올라온 내용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임산부에게 핑크 리본을 달아서, 버스나 지하철에서 우선적으로 자리를 양보받게 한다."
"전기요금 고지서에 생태친화적 방식으로 생산된 전기의 비율을 명시한다."
"시내버스 노선 안내 콜센터를 만들자."
누군가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음직한 아이디어들이다. 생활 속에서 느낀 답답함에서 비롯된 이런 생각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잘 정리해서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정책으로 만들면 어떨까? 이런 구상에서 출발한 게 사회창안센터다.
박 상임이사는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컨텐츠의 부재'를 겪고 있는 현실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대안을 담은 구체적인 정책으로서의 컨텐츠를 통해 우리 사회의 '희망 찾기'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사회창안'이란 이같은 컨텐츠를 만들기 위해 시민과 현장 속으로 파고들겠다는 선언이다.
희망제작소는 교수나 전문가가 아닌 시민의 아이디어로부터 구체적인 정책안을 만들고 실현하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박 상임이사는 단지 시민의 아이디어를 모으는 것을 넘어 연구과제에 대한 시민의 제안, 시민의 네트워크를 통한 공동연구 등 다양한 활동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성장시키는 자양분"**
또 각 지역의 현안을 연구하는 '뿌리센터'의 활동도 주목할만하다. 지방 토호들의 잔치로 전락한 지방자치제가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원래의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뿌리센터의 목적이다.
뿌리센터에서는 세계 각국 도시들의 다양한 정책사례를 수집해 '세계 도시 라이브러리'를 구축할 계획이다. 각 지방자치단체의 구체적인 상황에 어울리는 정책을 개발하기 위해서다.
서울의 사무실에서만 정책을 짜내겠다는 것이 아니다. 지역에 상주하는 전문가들이 지역주민들과 함께 정책연구를 수행한다. 이를 위해 뿌리센터에는 교수, 박사급 연구원뿐 아니라 지역신문 기자, 지역 시민단체 간사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
박 상임이사는 5.31 지방선거 이후에 뿌리센터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소개하는 뿌리센터의 첫 사업은 이번에 새로 당선되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각자의 고민과 정책정보를 서로 나누는 행사다.
이 행사에 참가하는 데 정당이나 이념의 구분은 중요치 않다. 지역의 현안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한다는 게 희망제작소의 계획이다.
***단지 연구소에 머무르지 않는 '사회 디자이너'들의 공간**
희망제작소가 준비하고 있는 활동은 이뿐만이 아니다. 세계의 싱크탱크와 연대해 정보를 나누는 '지혜창고', 문화적 공공성이라는 키워드로 우리 삶의 공간을 돌아보고 재구성하는 '공공문화센터' 등 다양한 사업을 마련하고 있다.
박 상임이사는 희망제작소가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연구를 하지만 단지 연구소만은 아니며,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대거 참여하지만 기존의 시민단체와 다른,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는 희망제작소와 함께하는 이들을 '사회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18세기에 명분과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양반사회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실학의 정신을 되살려 '제2의 실학혁명'을 전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외국의 싱크탱크에서 배운다**
한편 이날 창립총회에서는 외국 싱크탱크의 사례를 소개하는 국제세미나가 '싱크탱크와 우리 시대 희망 찾기'라는 주제로 열렸다.
이날 미국의 진보적 싱크탱크인 '정책연구소(Institute for Policy Studies)'의 산호 트리(Sanho Tree) 연구원은 미국의 진보세력이 왜 실패했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미국의 진보세력이 개별적인 이슈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논쟁을 따라가기에 급급했을 뿐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간결한 언어로 자신들의 주장을 표현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했다.
반면 보수세력은 TV와 신문은 물론 라디오와 인터넷 블로그까지 아우르면서 각각의 매체의 성격에 걸맞는 선명한 메시지를 개발하여 전파했다는 것이다. 이 차이가 현재와 같은 보수 일변도의 미국을 낳았다며, 진보세력의 주장을 쉽고 간결한 언어로 집약해 제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또 영국 싱크탱크 데모스(Demos)의 몰리 웹(Molly Webb) 연구원은 보통 사람의 일상에 주목한 정책 개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정책의 개발 단계에서부터 대중과 함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민전문가 육성이 관건**
이들의 발제에 이어 진행된 토론에서 이옥경 희망제작소 이사는 정부가 이미 결정한 정책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마련하는 데 머물렀던 기존 국책연구소들의 연구관행을 비판했다. 이같은 관행은 정부가 연구과제를 선정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며, 희망제작소가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평범한 시민이 정책전문가로 성장하게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양한 사회경험을 갖고 있는 50대 이상의 퇴직자들을 활용하는 것, 다양한 학습 및 토론 동아리를 활성화하는 것을 그 방법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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