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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우리들 자신도 운동의 대상입니다"

'한국사회포럼 2006' 이틀째, '사회운동 내부의 민주주의'

"나보고 운동 그만두라는 이야기지?"

한 시민단체 활동가에게 토론회에 참석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토론회이기에?

'한국사회포럼 2006' 개막 이틀째인 24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의 작은 강의실에서 '사회운동 내부의 민주주의를 말한다'라는 주제의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라고 하지만 따로 마련된 발제문은 없다. 시민. 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모여 자신이 속한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한 활동가는 '한풀이 수다'의 장이라고 표현했다. 진솔한 이야기는 민감한 주제를 건드리기 마련이다. 앞서 인용한 활동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시민운동, 덩치에 어울리는 성숙함을 갖췄는가?**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시민운동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지난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선, 낙천 운동과 뒤이어 터진 장원 녹색연합 사무총장의 성추행 사건은 한껏 물이 오른 한국 시민운동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사건이었다. 현실 정치를 뒤흔들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이면에서는 여전히 낡은 패러다임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장 사무총장 사건만이 아니다. 1997년 '김현철 비디오테이프 파동'으로 내홍을 겪은 뒤, 급격히 영향력을 잃어버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이나,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은 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규약을 고집하는 서울 YMCA의 경우는 한국의 시민단체들의 현 주소를 잘 보여준다. 개혁적인 주장과 엄격한 도덕성의 요구는 단지 대외용일 뿐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대중은 이 같은 이율배반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게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일상적 파시즘'을 경계하는 담론이 힘을 얻으면서, 사회운동 내부의 민주주의는 외면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 더구나 시민운동을 거친 인사들의 정관계 진출이 늘어나면서, 이는 더욱 절실한 과제가 됐다. 자칫하면 명망가들의 정계진출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사회운동 단체들은 대외적으로 확대된 영향력에 걸맞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내부에서 구현하는 게 절실해졌다.

이날 행사도 이 같은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마련된 것이다. 함께하는시민행동 하승창 상임운영위원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는 참여연대, 전교조, 문화연대, 부산민주공원 등 다양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20여 명이 참가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이날 나온 이야기 중에서 '사회운동 내부의 민주주의'라는 토론회 주제에 관심 있는 이들이 공감할 만한 내용을 간추렸다.

***"몸은 피곤한데, 머리는 비어간다"**

"상근자 공채를 통해 함께 들어온 활동가 6명 중 4명이 채 4년도 지나지 않아 그만뒀다. 3년을 채우지 못 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보통 절반을 넘는다."

시민운동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단체에 속한 활동가의 말이다. 이 말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비슷한 사례를 이야기했다.

"활동을 관 둘 때, 가장 흔하게 드는 이유가 경제적 어려움이다. 어차피 경제적 어려움은 활동을 시작할 때 각오했던 것 아닌가.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경우가 많다. 활동을 그만둔 사람들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만 봐도, 경제적 어려움 외의 다른 이유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게 4~5년 정도 활동해도 머릿속에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허탈해질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구상노동과 실행노동이 분리된 구조 때문이다. 정책을 분석하고, 사업을 기획하는 사람과 직접 몸으로 뛰는 사람이 다르다. 이런 구조가 남아 있는 한, 활동가가 전망을 갖고 성장하기는 어렵다."

'구상노동'이 전문가 집단이나 경험이 많은 선배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구조에 대한 비판이다.

***"그것은 우리 단체 방식이 아냐"**

그렇다면 '구상노동'을 함께하는 열린 구조를 택하면 달라질까? 여기에도 벽이 있다. 한 활동가의 말이다.

"우리 단체는 생긴 지 10년이 넘었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전문성과 노하우도 축적했다. 그런데 이 같은 역사가 종종 새로 들어온 활동가의 상상력을 제약한다. 회의에서 새로운 제안을 내놓으면, '그것은 우리 단체 방식이 아냐'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우리 단체다운 활동방식이라는 게 고정불변이어서는 안 된다. 선배들이 공유하고 있는 전통이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후배들의 발목을 잡을 때가 있다."

***"내가 다 해 봤는데 말이지…"**

이밖에도 선배와 후배의 민주적인 소통을 막는 요소는 많다. 대표적인 게 경험이 권위를 낳는 풍토다.

"새로운 제안을 하면 곧바로 '내가 다 해 봤는데 말이지…'라는 반응이 튀어나온다. 선배들이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어진다. 이런 경우가 쌓이면, 결국 경험 많은 선배들의 권위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4년차 활동가가 이 같은 이야기를 꺼내자,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선배 활동가들은 웃으며 한마디씩 했다. "나도 '내가 다 해 봤는데 말이지…'라는 말을 여러 번 썼는데, 반성해야겠다."

또 다른 후배 활동가는 '과잉상징화된 개인'의 출현을 우려했다. 선배들의 경험이 개인의 권위로 이어지는 상황이 반복되면, 단체의 활동보다 상징성 있는 스타 활동가가 더 부각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가 다시 상징성 있는 선배 활동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이어지는 순간, 조직의 민주주의는 허물어진다는 지적이다.

***"다른 단체의 일에는 끼어들면 안 돼"**

한편 문화연대의 김완 활동가는 다른 단체에서 벌어진 비민주적 행태에 대해 지적하고 비판하지 못하는 풍토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같은 풍토가 사회운동 내의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05년 7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황석영 전 회장이 <조선일보>에 '문학은 하나다!'라는 제목의 남북작가대회 참가 후기를 기고하면서 생긴 파문을 예로 들었다.

황 씨는 2000년 <조선일보>가 마련한 '동인문학상'의 심사를 거부하면서 "문학상을 통해 문단을 서열화하는 <조선일보>에 글을 싣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황 씨가 이 같은 약속을 스스로 깨뜨리면서, 민예총 내부에서는 상당한 반발이 일어났다.

김완 활동가는 당시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은 수수방관하고 있었다면서, "시민단체들의 다른 단체에 대한 불간섭주의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토론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국제민주연대에서 활동하는 최재훈 씨도 이 같은 의견에 동조했다. 그는 "사회운동의 생명은 자유로운 비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다른 단체들 사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술, 담배 못 하면서 어떻게 운동을 하겠다고…"**

술과 담배로 대표되는 뒷풀이 문화가 활동가 사이에서 소외를 낳는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활동가들이 자연스럽게 배제되곤 한다는 것이다.

문화연대 활동가 나영 씨는 "술자리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눈 뒤, 회의에서는 그 내용을 빠뜨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가 쌓이면, 술이나 담배를 싫어하는 사람은 의사결정과정에서 자연스레 소외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직 내의 비공식적인 의사소통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술과 담배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게 문제라며, 누구나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명문대 운동권 출신이 성골?"**

한편 이 자리에서는 명문대 학생운동권 출신이 사회운동에서 갖는 기득권에 대한 지적도 제기됐다. 한 활동가는 자신이 속한 단체의 활동가 중 서울대 출신이 절반을 이룬 적이 있다고 말했다.

"명문대생들이 더 진보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사회단체에 많이 포진하게 된 것은 그들의 기득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과외를 통해 손쉽게 생계를 해결할 수 있고, 활동을 그만두어도, 다른 진로를 찾기 쉽다."

그는 단체 안에서 명문대 출신이 너무 많은 비율을 차지할 경우, 소외된 이들과 공감하는 감수성이 무디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모든 사람이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다. 또 대학을 나온 이들이 모두 과외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운동이 약자에게 공감하는 감수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졸 이하 학력자들과 함께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돈 끌어오는 명망가 대표가 필수?"**

사회운동 단체 내부의 문제들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민감한 주제를 건드리기도 했다. 그 중 하나가 단체의 대표에 관한 것이다. 사회운동 단체 대표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 대학교수 혹은 변호사다. 상근활동가가 대표를 맡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게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에 대한 지적이 제기됐다. 실제로 활동을 하는 사람보다 명의만 빌려준 사람이 더 큰 영향력을 갖는 게 옳은 일이냐는 것이다.

한 활동가는 실무자들의 건의가 명망가들로 구성된 임원진이나 대표에 의해 무시된 경험을 이야기했다. 또 다른 활동가는 자생력을 갖지 못한 단체의 경우, 운영에 필요한 후원금을 끌어오고, 언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명망이 있는 대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또 다른 시각도 있었다. 실무를 맡은 이들이 의사결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발상도 잘못이라는 것이다. 한 활동가는 단체의 취지에 공감하고, 실무자들 이상의 열정과 전문성을 갖고 있지만, 개인적인 여건 때문에 상근자로 참여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자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히려 단체 밖에 있는 다양한 명망가들을 어떻게 잘 조직해서 활용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예 대표가 없는 단체의 경우도 소개됐다. 평화인권연대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 단체에서 활동하는 아침 씨는 "언론이나 다른 단체가 연락을 하면서, 대표가 누구냐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대표가 없는 단체라고 하면, 간혹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표의 필요성을 느낄 때가 없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대표를 따로 정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장점이 많다고 했다. 활동가들이 더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될 뿐 아니라, 서로 간에 보다 밀도 높은 소통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정보와 책임이 특정인에게 집중되지 않기 때문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모임인 전쟁없는세상도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이 단체 회원인 이용석 씨는 "정보와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회원들이 번갈아가면서 대표를 맡는다"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한 반박도 이어졌다. 이와 같은 조직 형태는 비슷한 가치와 문화를 공유하는 '동인' 집단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개혁 과제를 풀어가기 위해 다양한 인적 자원을 끌어들여야 하는 조직에는 걸맞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근성이냐? 감수성이냐?**

사회운동 단체에 대표가 반드시 필요한지에 대한 논란은 사회운동 단체가 지향해야 할 조직문화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아침 씨는 대안적인 감수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그는 기존 운동단체의 체계적으고 신속한 조직문화 대신, 조금 천천히 움직이더라도 평화나 인권 등의 새로운 가치에 공감하는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문화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활동가에게는 감수성도 중요하지만, 물러서지 않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근성도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근성을 키워주는 조직문화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활동가에게 필요한 자질이 대안적인 감수성이냐, 집요한 근성이냐를 놓고 잠시 이야기가 분분했지만, 서로 대립하는 논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경험과 인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는 중요한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토론자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운동을 통해 개혁해야 할 대상을 더 이상 외부에서만 찾으려 들면 안 된다. 때로는 우리들 자신이 운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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