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수상권에서는 탈락했지만 제7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및 감독상 후보에 올랐던 <굿 나잇 앤 굿 럭>은 세계 영화팬들의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 최근 들어 부쩍 예술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배우 출신 감독 조지 클루니의 연출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전설적인 방송앵커 에드워드 머로가 매카시즘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를 그린 흑백 모노톤의 드라마다. 왜 조지 클루니와 할리우드가 지금 이 시기에 머로의 얘기를 다뤘는지, 그럼으로써 무엇을 얘기하려고 했는지는 영화를 통해서 확인할 일이지만 미루어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듯 싶다. 지금의 부시 시대가 1950년대 매카시가 만들어 낸 우파보수 반동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를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에드워드 머로의 실록을 뒤졌다. 그의 방송인생을 관찰해 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
유럽대륙이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 휩싸여 있던 시절, 대서양 건너 미국사람들이 유럽의 최신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라디오였다. 유럽에 가족이나 친척을 남겨둔 이민자들은 더욱 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과 위로는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CBS 런던특파원 에드워드 머로(1908~65)의 목소리뿐이었다. "여기는 런던입니다"로 시작해 "안녕히 계십시오, 행운을 빕니다(굿 나잇 앤 굿 럭)"으로 끝나는 그의 생생하고도 차분한 리포팅은 20세기 방송 저널리즘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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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나잇 앤 굿 럭 ⓒ프레시안무비 |
본래 '굿 나잇 앤 굿 럭'은 머로가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1940년 말, 매일 밤낮으로 런던에 독일군의 폭탄이 비처럼 쏟아지던 이른바 '런던 블리츠' 때 엘리자베스 공주(현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어느날 라디오 생중계 연설을 "굿 나잇, 여러분 모두에게 행운을"이란 말로 끝맺었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영국인들에게 '굿 나잇 앤 굿럭'은 그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었으며, 본능적인 방송감각을 가지고 있던 머로는 리포팅을 끝마칠 때마다 이 말을 마지막 멘트로 사용해 청취자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 방송저널리즘을 창시한 인물 방송저널리즘이란 말조차 아직 없었던 1940년대에 머로는 방송뉴스란 무엇이며, 방송저널리스트의 임무는 무엇인가란 정의를 혼자 만들어나가다시피 한 사람이었다. 뉴욕타임스 기자출신인 데이비드 핼버스텀은 <언론파워(The Powers That Be)>란 저서에서, 머로에 대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면 수줍하는 기질의 소유자였지만 일단 마이크를 잡으면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하며, 정보 전달자로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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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머로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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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스피치'를 전공했던 머로는 당초 훈련받은 저널리스트가 아니었다. 1935년 CBS에 입사해 출연자 섭외담당으로 일했던 그는 성실성과 능력을 인정받아 1937년 유럽총국장으로 런던에 파견됐다. 런던에서도 그는 주로 행정과 출연섭외를 지휘했지만, 시대는 그를 단순한 관리자로 남아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독일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폴란드 침략이란 대사건이 잇달아 터지자 그는 마이크를 잡기 시작했고, 대서양을 건너 시시각각 전해지는 머로의 유럽뉴스는 미국 국민들에겐 엄청난 충격 그 자체였다. 1941년 머로가 잠깐 귀국했을 때,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환영행사엔 쟁쟁한 정치인 등 1000명이 넘는 유명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을만큼 머로의 명성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 행사에서 연설을 했던 국회도서관장 아치발드 맥리쉬는 머로에게 "당신은 런던의 화염을 미국의 가정에 옮겨 붙였으며, 런던 거리의 시신을 우리 집 문 앞에 가져다 놓았고, 거리와 시간의 미신을 뛰어넘었다"고 극찬했다. 1945년 부헨발트 유대인 강제노동수용소가 해방된 직후 마이크를 들고 뛰어가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유대인 시신들이 산처럼 쌓여 있던 끔찍한 광경을 전세계에 폭로한 방송기자도 바로 머로였다. 전쟁이 끝난 후 뉴욕 본사로 돌아온 머로는 프로듀서 프레드 프렌들리와 함께 <히어 잇 나우(Hear It Now)> 등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청취자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시대는 이미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히어 잇 나우>는 <시 잇 나우(See It Now)>로 바뀌었고, 이 프로그램은 오늘날까지 CBS 뉴스의 간판 심층보도프로그램인 <60분(60 Minutes)>를 탄생시키는 모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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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나잇 앤 굿 럭 ⓒ프레시안무비 |
1954년 3월 9일 머로는 <시 잇 나우>의 30분짜리 특집프로그램으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에 관한 리포트'를 방송했다. 사내에서도 페일리 회장을 비롯한 극소수 간부를 제외하곤 아는 사람이 없었던 극비프로젝트였다. 물론 매카시가 이끄는 공산당 색출 광풍에 대한 언론보도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등 신문이 다뤘던 매카시 기사와 CBS의 보도가 미친 충격은 비교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매카시의 심복이었던 로이 콘의 한 측근은 머로가 진행하는 이 프로를 보고난 후 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매카시도 , 자네도 이젠 끝이야. 머로가 움직이면 중도파가 매카시를 적대시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지." 실제로 매카시 특집프로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향은 엄청났다. 머로를 지지하는 편지들이 CBS에 쇄도했다. 평범한 노동자부터 지식인들에 이르기까지 비로소 매카시즘의 실체를 직면하게 됐으며 이 프로를 계기로 매카시에 대한 저항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 <시 잇 나우>의 종영, 아쉬운 퇴장 하지만 아쉽게도 머로의 저널리스트로서의 전성기는 이때를 기점을 하향세를 맞게 된다. 그것은 기자로서 그의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바로 TV 상업주의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시 잇 나우>의 명성은 매우 높았지만, CBS 경영진은 같은 시간대에 퀴즈프로나 오락 프로 또는 시트콤을 편성하면 더 많은 광고수익을 올릴 수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955년 페일리 회장은 머로를 불러 이렇게 통보했다. "30분짜리 보도프로는 끝내기로 했어. 정치, 사회 이야기는 딱딱해서 말이야. 더 중요하고 돈이 되는 방송을 해야겠어." 그렇게해서 주간 보도프로그램 <시 잇 나우>는 종방됐다. 이후 1년 뒤 다시 살아나기는 했지만, 편성시간은 일요일의 사각 시간대인 오후 5시. 스폰서 확보가 쉽지 않았던 만큼 그나마도 방송시간이 죽어버릴 때가 적지 않았다. 1958년 봄, 머로는 회장실로 쳐들어가 페일리에게 단독직입적으로 따졌다. "이런 식으로는 프로를 계속하기 힘들다. 프로를 죽일 생각인가." 프렌들리의 증언에 따르면, 페일리의 대답을 이랬다. "자네가 민감한 주제를 다룰때마다 내 위가 불편해지는 기분을 원치 않네." 1958년 7월 7일 마지막 방송을 끝으로 <시 잇 나우>는 결국 완전히 종영됐다. 그 해 가을 머로는 시카고에서 열린 라디오-TV 뉴스 디렉터 총회에서 TV 상업주의를 이렇게 비판했다. "만일 역사가라는 이름에 걸맞는 인물이 있어 지금으로부터 백년 뒤 미국 3대 네트워크 방송사의 일주일분 필름을 살펴본다고 가정해 보자. 그 필름은 퇴폐의 증거가 될 것이 틀림없다. 역사가는 우리가 현실세계로부터 얼마나 도피하고, 유리돼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진실보도보다는 돈을 앞세우는 TV 방송사 경영진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모든 저널리스트들에 대한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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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나잇 앤 굿 럭 ⓒ프레시안무비 |
<시 잇 나우> 종영 후 약 2년간 부정기 특집프로를 진행했던 머로는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제안으로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 등을 총괄하는 기구인 미국정보국 (USIA)의 국장직을 맡게 된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65년 머로는 사망했다. 잠잘 때 이외에는 담배를 손에서 놓은 적이 거의 없었던 그의 사망원인은 폐암이었다. CBS 간판 앵커로서 공정하고 정확한 보도를 생명으로 여겼던 머로의 정신은 월터 크롱카이트로 이어졌으며, 그의 은퇴 이후 또다시 후임인 댄 래더로 전해졌다. CBS 저녁 메인뉴스의 앵커자리를 24년간 지켰던 래더는 지난해 3월 부시 대통령의 병역과 관련된 오보 여파로 은퇴했다. NBC의 톰 브로코 역시 비슷한 시기에 40년 방송기자와 앵커생활을 마감했고, ABC의 피터 제닝스는 폐암으로 사망했다. 에드워드 머로 이래 여론의 향배에 막강한 영향을 미쳐 왔던 미국 방송저널리즘의 앵커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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