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MB 독도 방문, 日 극우 아베 정권 탄생 도왔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MB 독도 방문, 日 극우 아베 정권 탄생 도왔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41> 조세영 전 외교부 동북아 국장

외교부의 고위공무원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면, 앞으로 10여 년 정도는 외교부의 꽃이라고 하는 대사직 등을 두루 거치게 될 터였다. 하지만 조세영 전 외교부 동북아시아국장은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지난 9월 2일부로 외교부를 퇴직했다.

"어떤 사람은 '오십이 넘어서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고 했고, '갑자기 맨땅에 헤딩해서 뭘 할 거냐? 준비가 그렇게 돼 있느냐? 틀림없이 실패한다'는 말도 들었다. (중략) 그랬을 때 '만일 내일 죽는다고 하면 오늘 뭘 하겠는가'라는 생각을 또 해 봤다. 역시 '젊었을 때부터 한 번은 살아 봤으면 하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지만 자유롭고 독립된 영혼으로 살아보고 싶은 선택이었다."

공직을 떠나 조세영 전 국장이 선택한 삶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천적 문필활동가'의 길이다. 공무원은 안정적이지만 그만큼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는 직업이기도 하다. 게다가 조세영 전 국장은 한국 외교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감자인 한일관계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가 공직 생활 중에 했던 말과 글보다 결국엔 하지 못하고 뒤로 삼킨 내용들이 아마도 비교할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이제 자유인으로 광야에 나온 조 전세영 국장과의 인터뷰는 그간 뒤로 삼킨 말들을 조심스럽고 떨리지만, 그만큼 짜릿하게 풀어놓는 첫 시간이었다. 특히 국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최전선의 외교 현장 속에서 일반 국민이나 정치인이 아닌, 외교관으로서의 세련되고 진지한 고뇌를 들을 수 있었다. 정치와 외교 사이, 그리고 여론과 국익 사이의 살얼음판을 걸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외교에서는 절반만이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 상대방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걸 100만큼 얻고 싶더라도 대등한 주권국가로서의 상대방이 있고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측면이 반드시 있다. 그래서 외교에서는 '절반만의 성공'이라는 숙명이 있는데 오늘날 국민들은 '절반만의 성공'을 받아들여 주고 이해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왜 100을 못 얻었어?"라고 이야기한다. (중략) 특히 일본과 관련된 문제는 그게 더 심하다. 위안부 문제, 역사 왜곡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 등에서 국민은 항상 100을 얻어 정의를 실현하자고 하니 일본과의 관계가 악순환 속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게 된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조세영 전 국장은 "아, 이제 내가 이런 얘기까지 편하게 할 수 있구나. 이게 자유구나!"라며 활짝 웃었다. 조금은 무모해 보였던 그의 전격적인 퇴직 이유가 바로 이 마지막 웃음에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그는 이제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 지난 9월 2일부로 외교부를 퇴직했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정신이 없었다. 지난 9월 2일에 최종 퇴직 신고하고 나왔고, 4일에는 부산 동서대학교에서 첫 번째 강의를 했다. 아침 일찍 부산에 내려가서 강의하고 올라오니 저녁이 되더라. 새로 이사도 하고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 조세영 전 외교부 동북아 국장 ⓒ조경일

- 그 전에도 강의를 하신 적이 있나.

한 학기 수업은 작년에 처음 해 봤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국제협상론을 맡아서 강의했다.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목 디스크가 와서 한 3, 4개월 고생했다(웃음). 밤늦게까지 컴퓨터로 강의안을 만들고 몰두하다 그렇게 됐다. 하지만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공직에 있으면서도 학생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특강을 많이 해봤지만 한 학기 강의는 또 다르더라. 한 학기 강의를 해보니 '강의에 비하면 특강은 먹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강을 하고 나면 청중들이 내 강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다음에 내 이야기를 또 듣고 싶은지 아닌지를 알기 어렵다. 반면 16주 동안의 수업은 나름의 프로그램을 짜야 하고 학생들을 계속 만나면서 반응을 살펴가면서 다음 수업을 준비하게 된다. 느껴지는 부담과 긴장감이 굉장히 크다.

- 강의에서 학생들의 첫 반응은 어떻던가?

처음 학교에 간 날 동서대학교의 장제국 총장과 차를 나누면서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지방 젊은이들 중 머리 좋은 사람, 집에 돈이 있는 사람은 다 서울로 올라간다. 그리고 지방대학에 남은 학생들은 어깨가 처져 있다. 그래서 자기는 그런 지방 학생들에게 자신감도 불어넣어 주고 싶고 어깨를 펴게 해 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국제화에 집중적으로 힘을 쏟으면서 동서대 학생들로 하여금 외국대학 연수도 많이 보내고 취업과 관련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있었다. 학생들 해외연수를 보내는 것도 무조건 성적순으로만이 아니라, 인터뷰를 통해 학점이 좋지 않아도 인재가 되겠다 싶은 학생들도 선발해 보낸다고 했다. 그런 학생들이 연수를 갔다 오면 실제로 크게 변한다고 하더라. 지방 대학의 생생한 현실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동안 나는 서울에서만 살았고 외교부의 일도 주로 상대국가의 수도에 있는 대사관에서 일을 하니까 지방과 연결고리가 거의 없었다. 장제국 총장과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동서대에 온 것은 단순히 지식을 열심히 전달하는 역할만이 아니라, 그 이외의 것이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선배로서 학생들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 사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에도 앞으로의 수업시간을 할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의하는 것 자체가 익숙한 편이고, 나만의 노하우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첫 강의를 해보니 실제로 느껴지는 것이 더 달랐다. 학생들과 통성명을 하고 강의에 대한 설명도 하고 잠깐 대화를 하는데 서울과 비교해 무언가 모르는 미묘한 차이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것은 '지방이라 실망스럽다' 하는 느낌이 아니라 '이 미묘한 차이는 내가 정말 몰랐던 부분이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앞으로 매시간 더 깊게 생각해서 강의해야겠다는 걸 느꼈다. 세 번째 강의가 끝난 후에 한 학생이 내게 와서 '교수님, 강의 정말 재미있어요'라고 말하는데 가슴이 뿌듯했다.

- 1980년에 대학에 입학한 '80학번'으로 알고 있다. 대학 시절, 조세영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내면이 굉장히 우울한 학생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오는 것이었다. 대학생이니 얼마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겠는가. 당시는 요즘 대학생들과 다르게 공부에 그렇게 시달리지 않았고 친구들끼리 여행도 다니고 술도 마시러 다녔는데, 거의 그러지 못했다. 대학을 들어가긴 했으나 학비나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과외를 해야 했다. 그런데 신군부('박정희 유신체제 말기인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노태우·정호용·김복동 등 육사 출신 군 세력을 일컫는다. 이후 '신군부'는 전두환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를 만들어 통치권을 장악했다. 편집자주)가 정권을 잡고 나서 과외를 금지해버렸다. 당시 과외는 주로 돈 있는 집에서 했고 상대적으로 서민들이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대학생 입장에서는 과외가 있어서 용돈이나 학비를 조달할 수 있었는데 신정권이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고 해서 금지했던 것이다. 졸업할 때까지 과외금지조치가 풀리지 않아 굉장히 궁핍하게 대학생활을 했다. 그때는 지금 같은 아르바이트도 거의 없었다.

- 외무고시를 합격한 것이 대학교 4학년 때다. 언제부터 외교관의 꿈을 가지게 되었나.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79년에 10.26사태가 있었고, 곧이어 12.12사태가 발생했다. 그다음 해인 80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아, 나도 드디어 대학생이다'라는 청운의 꿈을 품고 들어간 캠퍼스에서 폼 잡고 다니려는데, 5.18광주민주화운동 직전인 5월 17일 대학 휴교령이 내려졌다. 학교가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1, 2학년 때는 거의 공부를 안 했다. 법학과에 들어가긴 했지만, 사실은 법학을 좋아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 나는 문학이나 철학, 사학을 하고 싶었는데 어려운 집안의 장남이다 보니 집에서 엄청나게 반대했다. '어머니도 고생하시고 동생들도 있는데 네 생각만 하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점수대로 법학과를 갔다. 사실 전공 공부에 재미를 못 붙였다. 우울한 상태에서 다른 책들을 많이 보거나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학점이 좋지 않아도 대학 간판이 있으면 취직은 다 했다. 대학교 3학년이 되면서 '난 졸업하면 뭐하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법학과 친구들이 다들 사법고시를 준비하길래 나도 한 달 정도 공부를 해 봤는데 재미가 없어서 못하겠더라.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외무고시 시험과목을 보니 국제정치, 헌법, 정치학, 경제학 등의 과목이 있었다. 흥미가 느껴지는 과목이기도 했고, 막상 해보니 재미있었다. 그렇게 3학년 때부터 1년 9개월 동안 외무고시 준비를 해서 합격했다. 졸업하고 곧 외교부(당시는 외무부)에 들어갔다.

- 외교부에서 주(住) 일본 2등 서기관을 시작으로, 1등 서기관, 공사 참사관을 역임했다. 일본과 인연이 깊어 책(<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 개정 문제>(아침 펴냄))도 썼다. 책 내용이 좋아 관련 분야의 스테디셀러라고 들었다. 원래 일본에 관심이 있었나.

원래 일본에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일본으로 외교부 해외연수를 간 것이 일본 문제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책을 정말 열심히 썼다. '이 책이 잘 팔리면 글 써서 먹고 살아야지' 했는데, 안이한 생각이었다. 현실은 냉엄했다(웃음).

- 일본 정치가 갈수록 극우로 치닫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조경일
'일본 우경화'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흐름이 있는 것 같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진보정당인 사회당이 중의원에서 140석 가까운 의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20여 년 사이에 달랑 5석 미만으로 줄었다(2012년 총선 결과 사민당 2석 획득). 여기엔 뭔가 흐름이 있다. 일본 우경화가 단순히 잃어버린 20년 동안 경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불안감으로 좌표축이 오른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일본 국민 사이에서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불안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중국과 센카쿠열도(중국 명(名) '댜오위다오')에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고, 또 중국이 일본 기세에 밀리는 모양새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도 있다. 일본 사회의 불안감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 개인이 아니라 국익을 놓고 일본과 최전선에서 만나는 외교관의 입장에서는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이 일반 국민보다는 훨씬 복합적일 것 같다.

'외교에서는 절반만이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 상대방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걸 100만큼 얻고 싶더라도 대등한 주권 국가로서의 상대방이 있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측면이 반드시 있다. 그래서 외교에서는 '절반만의 성공'이라는 숙명이 있는데 오늘날 국민들은 '절반만의 성공'을 받아들여 주고 이해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왜 100을 못 얻었어?"라고 이야기한다. 외교에서 국민의 힘, 여론의 힘이 커지면서 이런 경향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요즘은 '권력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여론이 세상을 바꾼다'고 하더라. 그만큼 여론의 힘이 강해졌다. 인터넷과 SNS를 통해 이 힘이 실시간으로 보이며, 그것이 정책에 반영되게 압력을 가한다. 그러니 '절반만의 성공이 가능하다'는 본질적인 한계를 갖는 외교 분야에서 겪는 어려움이 커진다.

특히 일본과 관련된 문제는 그게 더 심하다. 위안부 문제, 역사 왜곡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 등에서 국민은 항상 100을 얻어 정의를 실현하자고 하니 일본과의 관계가 악순환 속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게 된다. 한일관계는 사안별로 분리 대응하는 것이 좋다. 역사나 영토문제는 단호하게 대응하고, 경제나 안보 문제는 우리의 국익에 맞게 실리적으로 대응하는 게 필요하다. 역사문제는 결국 일본이 지는 게임이다. 역사문제가 정치 외교화 될 수록, 시간을 끌수록 일본이 손해다. 미국에서 군 위안부 기림비와 소녀상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현상을 우리가 보고 있지 않나? 군 위안부 문제는 단호히 대응하는 게 맞다. 헌법재판소 판결도 있으니 중재에 회부하는 게 좋다고 본다.

단호하게 대응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봐야 하는 게 독도 문제다. 위안부 문제와 달리, 독도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가 우리 입장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확산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어느 나라든 다른 나라의 영토문제에는 중립적 자세를 취하는 게 기본이다. 이런 차이에 주의해야 한다. 중요한 건 '단호'와 '실리'라는 두 개의 바퀴를 함께 굴려야지, 하나의 바퀴로만 가려고 하면 실패한다. 따질 건 안 따지고 협력만 한다든지, 협력도 하지 않으면서 따지기만 하는 것은 결국 잘 되기 어렵다. 따질 건 엄하게 따지면서도 협력할 건 협력한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 바람직한 한일관계 성립을 위해 우리가 일본을 어떤 태도로 바라봐야 할까.

한일관계와 관련해서 우리 사회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한일관계가 냉랭해지고 일본에서 혐한(嫌恨) 분위기까지 고조되고 있는데, 이런 때일수록 일본 내 양심세력이나 우호세력과의 연대가 중요하다. 그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고 공감을 얻어야 하는데, 우리가 편협한 내셔널리즘(Nationalism, 국가주의)에 빠지면 그들의 공감을 얻을 수가 없다. 인권이나 자유 같은 보편적 가치 기준이 중요하고, 우리 자신의 언행이 그에 벗어나는 것은 없는지 끊임없이 돌아봐야 한다. 일본의 국가주의자나 극우세력을 비난하면서 우리 자신이 그들과 닮은 모습으로 비치는 일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최근 일본의 과거사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기고문을 실어 한국에서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미야자키 감독은 같은 기고문에서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양측이 절반으로 나누던지, 공동 관리를 제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미야자키 같은 양심적 인사의 공감과 지지를 얻기 위해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까, 특히 독도 문제에 대해 우리가 거칠고 일방적인 언행을 보일수록 그들은 멀어져 갈 거다.

- 협상은 외국을 상대로 하는 협상이 있고, 국내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협상이 있는 것 같다. 사실 후자는 정치인이 해 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닐까.

정치인들은 유권자의 표를 가지고 당선되므로, 현장의 민심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이 과도하면 포퓰리즘(Populism, 대중영합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중장기적인 국익보다는 당장 눈앞의 단기적 이익, 민심이 원하는 것에 방향을 맞추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이 외교 정책에 대해 중심을 잡아 주는 역할이나 국민을 설득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이 원하는 건 이건데 외교부는 왜 거기에 맞춰서 하지 않느냐?"고 질책하는 쪽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독도 문제는 '유소작위(有所作爲)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일본이 도발하면 유소작위, 따끔한 조치로 대응해서 더이상 그러지 못하도록 교훈을 줘야 한다. 우리가 영유하고 있으니 그냥 조용히 있으면 된다는 방식을 우리 국민들은 이미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중요한 것은 과유불급, 지나친 것은 아니함만 못하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국내정치적 목적에 이용되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정치인들이 깊은 생각 없이 독도에 가서 사진 찍고 퍼포먼스를 하는 식의 대응이 과연 우리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따져보고 싶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난해 8월 10일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것은 국내정치적 목적으로 외교적 이익을 훼손시킨 대표적 사례라고 생각한다. 우리 대통령이 우리 영토를 방문한 게 뭐가 잘못이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겠지만, '우리 국익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냉정하게 대차대조표를 한번 써보자'라고 제안하고 싶다. 일본은 '울고 싶은데 한국이 뺨 때려줬다'라는 심정으로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자고 들고 나왔다. 그 후에 우리는 이렇다 할 대응 없이 수세로 일관했고, 게다가 군 위안부 문제를 중재에 회부한다는 공세적 카드도 사장(死藏)시켜 버렸다. 우리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독도에 대해 관심이 희박하던 일본 국민의 애국심에 불을 지피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줬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자극해서 강경 보수의 아베 정권 탄생에 기여했다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다.

이제 민간인이 된 입장에서 조금 용감하게 이야기하자면, 정치인들이 여론에 편승해 외교를 악화시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외교는 외교 관료에게만 맡겨주십시오'라고 얘기하는 건 아니다.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필요하다면 외교 관료를 견제하고 질책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국민 여론이 항상 합리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그에 편승해서 퍼포먼스 위주로 행동한 적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관료는 선출직이 아니라서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다. 일을 처리하면서 불편부당하고 공평무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객관성을 담보하는 가장 큰 집단이 있다면, 관료 집단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관료는 책상에서 일하는 데 파묻혀서 민심을 살피는 데는 소홀할 수 있다.

- 주요 국가들을 보면 큰 틀의 흐름을 파악해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그에 맞춰서 움직이는 게 보인다. 주변에 강대국들이 있어서 그렇지, 경제 규모나 다른 면에 있어서 우리나라도 매우 큰 나라다. 하지만 이에 맞지 않게 장기적인 국가 비전이 너무 없는 것 같다. 외교적, 통상적인 측면에서 특히 그렇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다 보니까 단기적이고 즉각적으로 사건들에 반응하는 것 같다.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장기적인 플랜이나 전략이 정말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매우 취약한 부분이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대통령 의전비서실에 근무한 적이 있다. 임기 후반 무렵에 어느 편한 자리에서 한 수석비서관이 "(임기가 시작되기 전인)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 참모들이 대미, 대중, 대일 정책 등 외교 핵심 이슈에 대해 집중적으로 학습시켜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이것만큼은 변해서는 안 된다'라는 골간을 대통령의 뇌리에 확실히 입력시켜서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했어야 한다"라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 정부 또는 정치권 차원에서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공론화를 통해 기본적인 원칙 같은 것이 확립돼 있어야 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든, 보수에서 진보로든 정권이 교체되는 것은 여러 가지 비용이 들긴 하지만 중요하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 '독일은 진솔한 반성과 사과를 하는데 일본은 왜 그렇지 못 한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런데 독일도 과거사 반성이 그냥 된 건 아니더라. 독일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다만 그 뒤엔 정권교체가 있었다. 기민당과 사민당 사이에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서 과거사에 대해 사죄하는 강도나 농도가 점점 달라진 것이다. 독일 기민당도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입장은 분명했지만, 사민당 정권으로 바뀌면서 특히 브란트 총리 때 과거사 청산 문제가 한 차원 높게 진전이 되었다. 이 흐름이 나중에 다시 기민당 정권에도 계승되면서 기민당의 바이체커 전 대통령이 유명한 '광야의 40년' 연설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일본은 '55년 체제'가 이뤄진 다음, 사실상 정권교체 없이 자민당의 장기 지배체제를 이어왔다. 2009년에 처음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지만, 그것도 3년 남짓으로 짧게 끝났다.

ⓒ조경일

결국 역사도, 사회도 보수와 진보가 서로 왔다 갔다 하는 속에서 조금씩 발전하는 것 같다. 전(前) 정권 최고 지도자가 한 일이기 때문에 이후에 다른 색깔의 정권이 등장해도 완전히 뒤집을 수가 없고 어느 정도 계승되는 것이다. 중장기적 일관성이 필요하되, 분명한 중심을 가지고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에 비해 정권 교체의 전통은 (오히려 진폭이 심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상당한 성과를 이뤄냈다. 이제는 핵심 부분에서의 일관성,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 작년에 큰 이슈 중에 하나였고, 직접 실무자로 참여하기도 한 '한일정보보호협정'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당시 이 협정을 밀실 처리한 것에 대한 비난이 일자 정부 책임자들이 실무자에게 모든 책임을 넘기고, 사태를 덮어버렸다. 외교부와 정치권에서도 이 같은 조치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었다.

결국 권력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여론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의 한 가지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시 국가가 어떤 중대한 사안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최소한의 공감대를 확보하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교훈이었다. 그만큼 국민 감정상 민감한 사안이었다. 당시 그런 결정은 우리의 국익 상 필요했다고 봤기에 추진했던 것이고, 그에 대해서는 지금도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만일 잘못된 판단이라고 생각하고서도 추진했으면,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 국익과 민심이 만날 때 결국엔 어떤 과정과 속도로 민심을 설득하면서 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맞다. 하지만 세상일은 속도를 못 맞출 때가 많다. 세상은 온도가 항상 일정한 실험실 같은 조건 속에 있는 게 아니다. 바람이 불기도 하고 비가 오기도 하고 갑자기 기상상황이 변하기도 한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충분히 속도를 내면 좋겠는데, 현실에선 시간이 없고 이 상태에서 일은 계속 벌어지고 무언가 반드시 결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을 갖고 충분한 설명을 한다는 것은 모범답안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 같다. 시간이 없는데 그 판단이 옳다고 믿는 정책 결정자 또는 최고 책임자의 소신이 있다면, 바로 '용기'를 가지고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 '이걸 얘기하면 굉장히 두드려 맞을 텐데, 벌집을 건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해야 한다. 그게 필수적이다.

옛날의 전통적인 외교는 구름 위에서 이뤄졌다. 지배층인 왕과 귀족들에 의해서만 이뤄졌고 민중은 없었다. 외국어를 하는 사람도 적었고 언론도 발달하지 못했다. 그때는 국민의 공감대 확보는 필요하지도 않았고 국가들끼리 서로 속고 속이는 비밀스러운 조약을 구름 위에서 맺고 파기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드시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데도 항상 국익과 국민여론이 충돌하고 앞으로 이런 충돌은 더 심해질 것이다. 여기서 지도자와 정책 결정자는 필요한 경우에는 용기를 갖고 정면에서 국민 여론을 마주해야 한다.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실패한다.

- 외교관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주 예멘대사관에 근무 중이던 1994년 5월 남북예멘 내전이 터져서 아내와 8살, 5살 난 두 딸을 프랑스 군용기 편으로 철수시키고 3개월간 대사관 남자 직원들끼리 현지에 잔류했던 일을 잊을 수 없다. 전쟁이라는 게 개인의 일상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임을 처음 깨달았다. 가족들과 다시 합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는 심정이 되더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현지에 부임해서 여러 가지 정보를 분석한 결과, 국지적 충돌은 몰라도 전면적인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부에 첫 번째 정세 보고를 했는데 그 직후에 내전이 발생해서 굉장히 자괴감을 느꼈다. 전쟁은 합리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는 교훈을 그때 얻었다. 논리적으로 따져서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일본어 통역을 맡는 등 대통령 외교에도 많이 관여를 했는데, 역대 대통령의 외교를 나름대로 평가한다면?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 본관 의전비서실에서 2년 가까이 근무했는데, 매우 따뜻한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주변 사람에게 잔소리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정치적 결단력이 있고 승부사적 기질이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강하고 완고한 이미지로 보이는 것 같은데, 과감하게 참모를 믿고 일을 맡기는 스타일이었다. 참모들도 소신껏 일하는 분위기였다. 예를 들어, 대통령 측근 참모에게 뭔가를 물었을 때 보통은 '기다리세요, (보스에게) 여쭈어보고 알려 드릴게요'라고 말하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 참모들은 그 자리에서 소신껏 '이렇게 하세요' 하고 시원시원하게 답해줬다. '스케일이 큰 리더십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외 정책에 관해서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사상가의 반열에 있는 분처럼 느껴졌다. 외교에 관해서 분명한 전략과 청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밑에서도 명확한 방향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다. 본인이 깊이 숙고 해서 생각을 잘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고 복잡한 문제도 굉장히 쉬운 말로 알기 쉽게 설명했다. 통역을 하다 보면, 자기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는 사람일수록 쉬운 말로 간결하게 설명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외교에 있어서 대단히 깊이 있고 세련된 지도자였다고 생각한다.

두 분 다 나보다 일본어를 훨씬 더 잘하기 때문에 그 앞에서 통역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돌아보면 '참 겁도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나는 통역대학원 같은 곳에서 전문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외무고시 준비를 위해서 대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때는 통역 요원을 별도로 특별 채용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장차 통역 업무가 주어질 경우를 대비해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전문 통역사 출신이 아닌 외무고시 출신으로 대통령 일본어 통역을 한 것은 내가 마지막이었다. 조그만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 사실 외교부에 계속 남아 있으면 고위공무원으로 10년 정도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사표를 제출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인생의 목적이 뭘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재외공관 대사가 되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일까?' 하고 생각했을 때 결론은 '아니다'였다. 우연한 일에 부딪혀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내 마음 속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봤다. '내가 뭘 하고 살면 행복할까? 내가 지금 뭘 하고 싶은 걸까?' 했을 때 드는 생각이 '자유롭게 살아보는 것'이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내가 생각한 대로 한 번 살아보고 죽어야 후회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도 곱씹어 봤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걸 글로 옮겨서 사회와 소통하고 그래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실천적 문필활동가나 실천적 평론가라고나 할까.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지금 나의 선택이 엉뚱할 수 있다. 실제로 정년도 8년 정도 남았는데 편하고 안락한 것들을 많이 포기한 셈이 됐다. 어떤 사람은 '오십이 넘어서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라고 했고, '갑자기 맨땅에 헤딩해서 뭘 할 거냐? 준비가 그렇게 돼 있느냐? 틀림없이 실패 한다'는 말도 들었다. '대사를 한 번 하고, 3년쯤 후에 대학에 가서 가르치는 일을 해도 되지 않나? 은퇴하고서도 할 수 있는 일인데 왜 꼭 지금 하려고 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랬을 때 '만일 내일 죽는다고 하면 오늘 뭘 하겠는가'라는 생각을 또 해 봤다. 역시 '젊었을 때부터 한 번은 살아 봤으면 하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지만 자유롭고 독립된 영혼으로 살아보고 싶은 선택이었다.

- 공식적으로 외교부 생활이 끝난 지난 9월 2일, 눈을 떴을 때 기분이 어땠나.

작년에 국장 보직을 내놓고 난 뒤 1년 2개월 정도 무보직 상태로 있으면서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등 예행연습이 됐다. 그래서였는지 30년 공직을 마무리하고 민간인이 된 첫 날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 30년이란 세월은 짧은 게 아닌데도 충격이 덜할 수 있었던 것은 옛날부터 내 마음 속에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다'는 씨앗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위나 직책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외교관이 되어 해외에 나가면 품위를 유지하라고 나라에서 집도 빌려 준다. 대사가 되면 멋진 대사관저도 주고 운전기사가 딸린 큰 차도 준다. 그런데 항상 '어차피 내 것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게 국장실을 따로 주었을 때도 '내일 갑자기 그만두면 내 방이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있었다. 약간 허망하고 염세적일지 모르지만, 이상하게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다. 높은 위치에 갔을 때 마치 자기가 그걸 영원히 가져갈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경우가 많다. 내겐 다행히 그런 생각이 없어 갑자기 자유로운 입장이 됐을 때 당황하거나 패닉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개인 이메일 주소를 1998년에 처음 만들었는데, 그때부터 명함에 외교부 공식 이메일 주소(mofa.go.kr)가 아니라 개인 이메일 주소를 적었다. '공식 메일 주소는 내가 퇴직하면 없어지지 않나. 내가 죽을 때까지 갖고 있을 주소를 써야지.' 늘 이런 식이었다(웃음).

- 공직에 있으면 항상 본인이 작성한 문서나 글에 '조세영'이라는 이름보다는 외교부 직함으로 나가기 마련이다. 이젠 '교수'라고 불릴 텐데, '조세영 교수'라고 나갈 첫 글로 준비된 게 있나.

완성된 것은 없고 글의 재료로 쓰일 씨앗들은 많이 모아서 다듬고 있다. 아무래도 30년간 한 일이 외교 업무이다 보니, 이와 관련해서 현장에서 느꼈던 것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담당했던 일본, 중국, 동북아 현안에 대해서도 다루고 싶다. 이 일이 앞으로 내 생활의 중심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계속 정리하는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다.

젊은 시절, 회사에 취직하기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쪽에 더 끌려 공직을 택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항상 다른 누군가를 위해 글을 썼다. 대사의 연설문을 쓰는 경우도 있었고 장관이나 차관, 또는 대통령 회담 자료를 만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것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앞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게 됐다. 막상 내 이름을 걸고 할 수 있게 되니, 한 자 한 자가 주는 중압감이 더 큰 것 같다. 부담되고 두렵다.

- 눈빛이 '불안'을 즐기는 것 같다(웃음).

아니다. 그래도 자유롭고 독립된 것이니 좋다(웃음).

- 자유를 찾아 광야로 나왔다. 그 의미가 남다를 것 같은데, 조세영에게 자유란?

ⓒ조경일
자유란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 즉 위험 부담을 감수하는 것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얻어지는 자유도 많은 것 같다. 거꾸로 편하고 안락한 길을 가다 보면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나 역시 자유롭고 독립된 입장으로 홀로서기 위해서 '리스크 테이킹'이 필요했다.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일정부분 포기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책을 낸다고 해서 과연 사람들이 공감해 주고 읽어 줄지, 칭찬이 많을지, 비판이 많을지 알 수가 없다. 한두 번 하다가 더 이상 원고 청탁도 안 들어올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리스크'다. 이 리스크들을 '테이킹' 하는 거다. 그래야 자유가 얻어지는 것 같다.

- 자녀 교육과 관련해서 나름의 철학이 있는지 궁금하다.

자식에 대해서는 자유방임주의다. '너 하고 싶은 것 해라'이다. 아이의 인생이지 않나. 어렸을 때, 대학교에서 전공을 선택할 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이나 역사, 또는 철학을 하고 싶었지만 '가정형편'이라는 압력 때문에 법학과에 가서 이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차남인 내 동생은 자신이 하고 싶은 고고미술사학과에 가서 지금은 교수를 하고 있다. 당시 동생이 고고미술사학과를 간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자식들에게 '정말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행복하고 그래야 성공한다'고 말한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

-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우선 굉장히 부럽다. 우리 땐 그렇게 풍족하질 못했다. 특히 홍대 앞, 북촌마을 등에 가보면 예쁘고 아기자기한 카페들, 맛있고 좋은 음식점들이 많다. 젊은이들이 그런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진 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가 참 풍요로워졌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청년이었을 때는 갈 데가 없었다. 술을 마신다고 하면, 의자 없이 쭉 서서 카운터에서 직접 가지고 온 맥주와 땅콩을 벽보고 먹다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하다가 집에 가곤 했다. 지금은 정말 많이 윤택해졌다.

반면에 사는 게 너무 힘들어진 것 같다. 우리는 별로 공부를 안 해도 금방 취직이 됐다. 그래서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학점이나 스펙에 매달리지 않았다. 스펙이라고는 졸업장뿐 이지 그 외 자격증, 해외 연수 경험 등이 전무했다. 그러고도 다들 졸업하고 취직했다. 또 취직하면 취직한 대로 경제가 성장하니 노후 걱정도 안 하고 살았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경쟁도 세고 갖춰야 할 것도 너무 많다. 취직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설사 취직이 된다 해도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노후가 막막한 것이 현실이다.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두 가지가 생각 속에서 나는 청년들에게 좀 더 용기를 가지고 '리스크 테이킹'을 해 보길 권하고 싶다. 남들이 다 해도 자기가 싫으면 좀 안 하고, 남들이 다 가는 길이지만 내가 내키지 않으면 안 가 보기도 하는 용기를 갖고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 두렵지만 여기에도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

또한 젊은이들의 현재와 미래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도록 만드는 게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기성세대 또한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경제성장은 둔화되기 시작하고,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사회 안전망 같은 것이 채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힘든 시기다. 젊은 사람들은 이것을 바꾸는 데에 한계가 있을 테니 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책임을 가지고 있는 기성세대가 이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서 물려줘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가 힘을 합쳐 좋은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런 글들을 많이 쓰겠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손정욱 국회 비서관이 진행했으며, 정리는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연구원과 정인선 인턴이 맡았습니다. 사진은 정치경영연구소 조경일 연구원이 담당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