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퍼드라면 20세기 미국의 비판적 사회사상가다. 주로 도시 연구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철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기술공학을 넘나들며 그야말로 '총체적' 사유를 전개한 인물이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이라면 그가 '거대 기계'를 비판하고 그 극복을 호소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문제의식을 담은 그의 저서 <기계의 신화 2: 권력의 펜타곤>(김종달 옮김, 경북대학교 출판부 펴냄)이 작년(2012년)에 우리말로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거대 기계'란 인간과 사회조차 그 부속품이 되어버린 기계 체계다. 일단 거대 기계가 등장하고 나면, 이제 인간이 기계를 부리는 게 아니라 기계 체계의 유지와 확장을 위해 인간이 지배와 동원의 대상이 된다. 문명 전체가 하나의 기계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거대 기계' 개념을 이미 알고 있다면,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채 멈추지 않고 고속으로 질주하며 인간의 수용 시설이자 또한 그 숭배 대상이 되기도 하는 <설국열차>의 기차에서 거대 기계를 환기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프랑스 만화 원작자들이나 봉준호 감독이 멈퍼드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영화 <설국열차>. ⓒsnowpiercer2013.interest.me |
멈퍼드도 비판하는 것처럼, 어쩌면 다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조차 이 거대 기계의 포로였다. 소련의 5개년 계획은 자본주의보다 더 강력한 거대 기계를 구축하고 이에 철저히 복속되려는 시도였다. 기차 맨 앞 엔진 칸을 점거하기 위해 목숨 걸고 내달리는 <설국열차>의 꼬리 칸 반란자들이야말로 이런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의 경험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은유다. 이들 헛된 반란자들처럼 지난 세기의 혁명 운동은 거대 기계 '안에서' 단지 그 작동 주체만 애초의 설계자(자본가?)에서 꼬리 칸 반란자(노동계급?)로 바꾸면 새 삶이 열리게 될 거라 몽상했었다. 반면 멈퍼드는, 영화 속 '남궁민수'처럼, 일찍부터 기차 자체를, 그러니까 거대 기계를 정지시키고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설국열차>를 보고 나만 이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이 영화를 멈퍼드 사상의 거대한 은유마냥 바라본 사람이 또 있었다. 최근에 멈퍼드의 대표작 중 하나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낸 문종만이 그 사람이다. 그가 이번에 선보인 멈퍼드의 저작은 <기술과 문명>(책세상 펴냄)이다. 한국에서는 처음 번역, 소개되는 책이다.
좁은 의미의 기술사가 아니라 문명사이자 문명 비판
▲ <기술과 문명>(루이스 멈퍼드 지음, 문종만 옮김, 책세상 펴냄). ⓒ책세상 |
나온 지는 꽤 됐다. 1934년도 저작이다. 그런데도 전혀 낡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거나 뛰어넘는 선견지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읽고 나서는 모처럼의 커다란 배움에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을 잊게 만들 정도의 재미까지 있었다. 장담컨대 <기술과 문명>은 이 시대의 고민하는 대중 누구나 흥미롭게 읽으면서 소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이 책을 놓고 무슨 '서평'을 시도할 수는 없겠다. 독자들이 이 책을 손에 들도록 열심히 '소개'하는 임무가 분에 맞다. 이런 본분에 따라 일단 이 책의 전반적인 구도를 살펴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멈퍼드는 기계 문명의 발전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눈다. 첫 번째는 유럽에서 대략 10세기에 시작돼 17세기에 원숙기에 접어든 원(原)기술 시기다. 두 번째는 흔히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18세기~19세기의 구(舊)기술 시기다. 마지막으로는 신(新)기술 시기가 뒤따른다.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을 집필하던 20세기 초가 바로 이 신기술로 전환하는 과도기라고 보았다.
<기술과 문명>은 이 세 시기를 순서대로 짚어나간다. 그러면서 기술 변화뿐만 아니라 이와 결합된 사회 변화 그리고 이데올로기 변화를 깊이 있게 조망한다. 그래서 예기지 않은 거대한 문명사를 축조해나가게 된다.
그 시원은 중세 후기다. 베네딕트 수도회가 노동 규율의 유지를 위해 동방으로부터 들여온 여러 기술들을 종합해 혁신적 발명품을 개발하면서 새 시대가 열린다. 그것은 시계다. 시계는 그 구조나 작동 원리 등 모든 면에서 이후 모든 기계의 원형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이와 함께 기계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의식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시간을 분절된 단위의 누적으로 바라보고 공간 역시 그렇게 수량으로 환원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수량 중심의 세계관은 당시 막 확산되던 상업 자본주의와 긴밀히 결합된다. 이 대목에서 멈퍼드는 근대 자본주의의 출현에 대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는 '상업'과 '기계'의 결합이야말로 근대 자본주의를 낳고 그것을 지속시키는 힘이라고 밝힌다. <기계와 문명>은 그 중에서 특히 '기계' 쪽을 중심으로 근대사를 살펴보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역자 문종만은 책 뒤의 '해제'에서, 이와 대비되게 '상업' 쪽에 강조점을 찍으며 동일한 시간대를 다룬 저작이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홍기빈 옮김, 길 펴냄, 2009)이라고 지적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기계와 문명>과 <거대한 전환>을 짝지어 함께 읽는다면 자본주의 근대 문명의 전체상이 한 눈에 들어올 듯하다.
땅 밑에서 시작된 산업 자본주의
▲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길 펴냄). ⓒ길 |
원기술 시기의 동력원은 말과 인간이 아니면 풍력과 수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에너지원은 공급이 불규칙적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확보하게 되면서 기계 발전의 새 시대가 열린다. 다름 아니라 석탄을 통해 증기력을 활용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멈퍼드가 '구기술 시기'라 부르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멈퍼드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지금에 와서는 어느 정도 상식이 된 이런 사실만이 아니다. 그는 이 사실의 이면에 있는 문명사적 의미까지 캐들어 간다. 석탄을 확보하려면 땅 밑을 파내려가야 한다. 석탄을 사용하기 전인 원기술 시기에도 이미 철광석을 얻기 위해 인간은 지하 세계로 향해야 했다. 이를 위해 광부라는 직업이 생겼고 광산업이 등장했으며 광산촌이 형성됐다. 멈퍼드는 바로 이 광업 문화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원형들을 발견한다.
광업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대결과 수탈의 그것이다. 인간은 자연과 싸워 광석을 뽑아낸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적대감과 정복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립으로 확장된다.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막장 인생'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이것은 본래 광산촌의 인간 군상을 표현하는 말이다.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아니면 죽지 못해 땅 속 바위에 망치를 내리치는 삶, 그것이 광산촌의 삶이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희소성이다. 남들이 캐기 힘든 뭔가를 먼저 발견하는 것이 가장 값어치 있는 행위다. 남들에게는 없어야 하고 나에게는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가치가 나온다.
멈퍼드는 이후 구기술 시기에 전면화하게 될 산업 자본주의의 특성들이 광업 문화 안에 다 있다고 지적한다. 전통적 보호 조직인 길드(동업조합)조차 없는 뜨내기 노동자들이 산골로 흘러들어와 자본가 밑에서 중노동을 하는 모습은 이후 두 세기 동안 대중이 경험하게 될 가장 일반적인 삶의 양상 그것이다. 한편 자본가는 꼭 광산촌에 기거할 필요가 없다. 원격 투자만 하면 된다. 여기에서 누구나 쉽게 주주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가치의 원천을 희소성에서 찾는 시각은 고스란히 근대 경제학의 출발점이 된다. 사회의 다른 부분에는 없으면서 자신에게만 있는 뭔가를 만들거나 아니면 더 많은 경우 자신에게 있는 것을 사회의 다른 부분에는 없게 해서 이윤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자본가의 요술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자연을 기본적으로 대결과 수탈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 역시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됐다. 우리에게 친숙한 사례로는 4대강을 파헤치는 행위 따위를 들 수 있다.
다른 어느 책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통찰이다.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광업이 근대 문명에 끼친 깊은 영향에 대한 멈퍼드의 분석을 읽다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자본주의의 운명에 대한 거대한 우화인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J. R. R. 톨킨의 '반지 원정대'에도 영향을 준)에서 땅 속 황금을 캐내는 소인족 이야기를 꺼낸 것도 달리 보이게 된다.
소인족이 캐낸 황금(화폐? 석유? 혹은 인간의 욕망 그 자체?)으로 만든 반지는 주인에게 절대 권력을 안겨다주는 마법의 반지다.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 내내 신들과 인간들은 이 반지를 차지하려고 혈투를 벌이고 결국은 세계 전체의 몰락으로 모든 게 끝난다. 멈퍼드의 책을 거울삼아 바그너의 은유를 비춰보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처한 세상의 시간에 대해 소름끼치는 어떤 예감에 도달한다.
신기술 시대의 가능성은 과연 실현될 것인가?
하지만 <기술과 문명>에서 멈퍼드 자신의 논조는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낙관적이다. 야만과 폭력으로 얼룩진 산업 자본주의의 토대인 구기술의 전성기는 저물어가고 있다. 구기술의 핵심 특징이 자연의 유기적 세계로부터 유리된 기계 체계를 구축한 데 있다면, 신기술은 유기적 세계와의 재결합 가능성을 함축한다. 멈퍼드는 전기력이 증기력을 대체하고 있다는 것, 교통과 통신 기술이 극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 과학 그 중에서도 특히 생물학의 발전이 기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에서 이런 징후를 발견한다.
물론 멈퍼드가 기술결정론으로 퇴행할 사람은 아니다. 신기술이 사회와 문화의 심원한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일 뿐 신기술의 등장이 곧 새 시대의 개화를 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신기술이 함축한 가능성을 실현하려는 사회적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구기술 시대의 관성이 신기술의 가능성을 압살하고 말 것이다. 멈퍼드는 이렇게 전망한다.
"신기술 산업이 석탄-철 복합체를 변형하는 데 실패하는 만큼, 공동체 전체에서 더 인간적인 기술을 위한 적절한 토대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는 만큼, 그리고 광산 소유자, 금융가, 군국주의자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휘말려 들어가는 만큼, 사회의 분열과 혼란의 가능성은 증폭될 것이다." (<기술과 문명> 311쪽)
<기술과 문명> 마지막 장은 신기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수반돼야 할 사회 변화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것은 기술 유토피아는 결코 아니다. 과학 기술의 무한한 발전에 따른 풍요의 비전은 아니다. 멈퍼드는 오히려 인류 문명이 '역동적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경, 산업, 인구 사이의 균형 상태에 도달하고 이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와 농촌 사이의 균형을 이상으로 제시한 윌리엄 모리스의 계승이자 생존, 정의 그리고 자율성의 다중 균형에 따른 과학 기술 발전의 조정을 주장한 이반 일리치로 이어지게 될 입장이다.
멈퍼드는 이런 역동적 균형에 다다르기 위해 생산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고 소비는 어떠해야 하는지 상세히 짚는다. 20세기 후반의 복지 국가 그리고 오늘날의 시민 기본소득 제안을 예감케 하는 '기초 공산주의'의 실현을 강조하기도 한다. 당대의 사회주의자들이 당시 막 소련에 등장하던 스탈린주의 체제(일당 독재 + 전면적 국유화 + 중앙 집권형 계획)를 도입하기만 하면 모든 게 다 저절로 해결될 것처럼 여길 때, 멈퍼드는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제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술과 문명>은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 사회를 고민하면서 꼭 참고해야 할 고전이기도 하다.
사실 <기술과 문명>의 마지막 장을 읽다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80년 전에 멈퍼드가 미래에 실현될 것으로 보았던 기술들은 지금 이미 그 극한까지 발전해 있다. 사회는 이제 전력 네트워크에 전적으로 의존해 움직인다. 전자이동통신은 기술 발전의 첨병 역할을 한다. 멈퍼드가 살아서 스마트폰 열풍을 본다면, 뭐라 할까? 생물학을 비롯한 기초 과학의 발전 역시 괄목할만하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과연 멈퍼드가 '구기술 시기'라고 부른 시절과 전혀 다른 새 시대를 열어주었는가? 우리는 그 답이 '아니오'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전력 생산은 여전히 화석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다. 극도로 발달한 통신 기술은 명령형 생산 체계나 과잉 소비 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노릇을 한다. 생물학 지식의 증가는 생체 모방에 따른 사회, 문화의 유기적 성격 강화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생명 공학에 의한 생태계 교란 위험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사는 정확히, 멈퍼드가 "사회의 분열과 혼란의 가능성"이라고 말한 바를 실현시켜왔다.
▲ <기계의 신화2 : 권력의 펜타곤>(루이스 멈퍼드 지음, 김종달 옮김, 경북대학교 출판부 펴냄). ⓒ경북대학교 출판부 |
말년의 멈퍼드가 도전 대상으로 지목한 '거대 기계'는 현 사회의 상당한 붕괴를 감수하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정지시켜야 할 무엇이다. 마치 <설국열차> 속 기차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기술과 문명>의 마지막 장은 좀 많이 빗나간 미래 전망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과도기가 예상보다 너무 길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신기술의 잠재력이 어떤 사회상과 결합될지 아직 '완전히' 결정되지는 않은 국면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기술과 문명>의 뒷부분이 꼭 '빗나간' 것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선택지에 대한 후세대의 답이 좀 '많이' 늦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마감 시간은 점점 더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지만 말이다.
그 마감 시간이 닥치기 전에 멈퍼드의 이 역작을 우리말로 접할 수 있게 돼 다행이다. 그럴 수 있게 해준 역자의 노고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멈퍼드의 까다로운 문장을 깔끔하게 번역해줘서 더 고맙다. 이제 우리에게는 <자본>과 <거대한 전환> 말고도, 이 길의 시작을 묻고 앞길을 함께 헤쳐 갈 길동무가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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