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십억을 벌었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제목이었을 게다. 서점에 선 채로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주인이 책을 빼앗았다.
'애들이 보는 책이 아니다.'
대신 권한 책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이어진 훈계는 기억이 난다. '어린 애가 돈 밝히면 못쓴다.'
하나마나한 이야기.
다시 이어진 훈계. '그런 책 열심히 읽어봤자 부자 못 된다. 태권도 열심히 배운다고 싸움 잘하는 건 아니잖니. 부자 되는 사람은 따로 있어.'
이건 솔깃했다. 그래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어린 시절 어느 날, 위인전이나 동화가 갑자기 시시해졌다. 서점에 죽치고 서서 어른들을 위한 처세서적을 읽기 시작했는데, 묘한 재미가 있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진짜 지식을 배우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서점 주인은 그조차도 진짜 지식이 아니라고 했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차라리 간첩을 신고해라. 그러면 포상금이 3000만 원이야.' 그리고는 낄낄.
분명히 농담이란 건 알겠는데, 왜 농담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3000만 원이면 엄청나게 큰돈이잖아. 그런데 왜 농담처럼 말하지.'
군인이 다스리던 시절, 평범한 꼬마가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부자 되는 법'은 간첩 신고였다. 조숙한 어린이는 오히려 철이 덜 든 어른이 되는 모양이다. 부자 되는 법, 이병철 전기 등을 탐독하던 어린이는 자라서 돈벌이엔 영 무능한 어른이 됐다. 어른이 된 지금도 '쉽게 돈 버는 법'을 잘 알지 못한다. '로또 구입, 간첩 신고. 또 뭐가 있나.'
간첩이라는 살벌한 말에선 돈 냄새가 난다. 어른이 돼서 만난 친구들도 어린 시절 한 번씩은 간첩 신고해서 떼돈 버는 상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들 안다. 간첩 신고로 부자 되기란 로또 당첨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또 아는 게 있다. 간첩이라는 말에서 진한 피비린내를 맡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군사 정부 시절, 숱한 조작 간첩 사건이 있었다. 순진한 어부가 졸지에 간첩으로 몰렸고, 삶이 온통 망가져 버렸다. 청운의 꿈을 품었던 유학생은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차가운 감옥 바닥에 뉘여야 했다.
1.
▲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존 르 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
'포상금 3000만 원'의 기억과 함께 종종 드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는 못하겠다. 국가정보원이 서울시 공무원 유 모 씨를 간첩으로 조작했다는 의혹이 나온 게 얼마 전이다. 이 사건을 다룬 방송 프로그램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방송이 연기됐다.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지금이지만, 간첩이라는 말에선 여전히 피비린내가 난다.
물론, 요즘도 간첩이 있을 게다. 적대진영에 간첩을 심는 건 국가가 생겨날 때부터 있던 일이다. 고대의 병법서 <손자병법>에 이미 '용간편'이라는 항목이 있다. 간첩을 '향간(鄕間), 사간(死間), 내간(內間), 생간(生間), 반간(反間)' 등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활용방법을 설명했다. 이 가운데 백미는 적의 간첩을 아군의 간첩으로 만들어 활용하는 '반간'인데, 남자 아이들이라면 대개 한번쯤 열광하며 읽는 소설 <삼국지연의>에도 이런 사례가 잘 묘사돼 있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손권-유비 연합 세력은 조조 진영에게 반간계, 고육지계 등 다양한 간첩전술을 구사한다. 이처럼 간첩의 역사는 깊다. 그러니 지금도 간첩이 없으란 법은 없다.
진짜 궁금한 건 이제부터다. 간첩이 있다면, 그들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간첩의 세계에도 위계서열이 있을 텐데, 그 중에서 거물간첩은 보수 우파, 주류 진영에 몸을 숨기지 않을까. 고급 정보를 수집하고 고급 인맥을 쌓는 게 간첩이 하는 일일 텐데, 아무래도 고급 정보와 인맥은 보수, 주류 진영에 있을 테니 말이다. 운동권이 전국 대학가를 주름잡고 지식 세계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1980년대라면 모를까, 요즘 같은 시절에 비주류 세력, 진보 좌파 쪽에 뭐 그리 대단한 정보와 인맥이 있겠는가. 아마도 목적에 충실한 간첩이라면, 보수 우파 주류 엘리트로 자신을 위장하려 하겠지.
▲ '거물간첩' 리하르트 조르게. ⓒko.wikipedia.org |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간첩으로 꼽히는 리하르트 조르게 역시 비슷한 경우다. 소련의 간첩으로 일본에서 활동했던 그는 일본 관동군이 소련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정보를 소련에 넘겼고, 그 결과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병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실제로는 마르크스주의자였으나, 대외적으로는 열렬한 나치스 지지자였다. 나치 이념과 마르크스주의는 상극이다.
한국에는 고영복 교수 사건이 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지내며 고정간첩으로 활동하다 1997년 적발됐고 지난 2011년 사망했다. 상대적으로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사회학과 안에서 그는 운동권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다. 오히려 그는 보수 우익 성향으로 알려져 있었다.
2.
이처럼 진짜 거물간첩은 보수 우파로 위장하는 게 보통이다. 국가정보원이 정말로 간첩을 잡을 생각이라면, '나는 주사파'라고 공공연히 티를 내는 사람들을 뒤질 일이 아니다. 오히려 고급정보가 밀집한 권력 내부를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정보는 권력을 따라 흐른다. 따라서 간첩의 필수 조건은 권력의 냄새를 맡는 후각이다. 실제 간첩 역시 권력 맛을 보는 연습을 한다고 한다.
"1980년대 초반부터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한 새세대 청년들이 공작원 집단의 주류를 이루게 됐다. 이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하면서 곧바로 공작원으로 소환된 대상들이었으므로 같은 또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해볼 기회가 적었고 따라서 대인관계에 서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포섭공작 및 지하당 구축을 능숙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대인관계도 형성해보고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사람을 상대하는 경험과 노하우를 습득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간부현실 체험이다.
공작원들은 간부현실 체험 과정에서 여러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며 그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그들과 대인관계를 형성하고 심화하고 이를 통해 앞으로 하게 될 대상포섭 요령도 습득하며, 군중들 앞에 나가서 강연도 하고 연설도 해봄으로써 군중담력을 키우고 있다."(<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 150~151쪽)
▲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김동식 지음, 기파랑 펴냄). ⓒ기파랑 |
또 간첩은 엘리트 의식도 강하다. 그래야만, 보수 주류 엘리트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그들 속으로 스며들어갈 수 있다. 저자인 김동식은 북한에서 간첩을 양성하는 대학인 금성정치군사대학(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출신인데 자부심이 대단하다.
"쉽게 이야기해서 금성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대상은 모두가 김일성종합대학에도 입학할 수 있는 능력과 수준, 자격이 된다. 그러나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대상은 금성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지적수준은 되지만 성분이나 체력 등을 다시 심사해 보아야 하며 그렇게 되면 (금성정치군사대학에는) 일부밖에 들어올 수 없다. 그래서 자존심이라면 북한에서 제일 강하다." (80~81쪽)
이런 엘리트 의식은 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능력이 뛰어난 엘리트가 꼭 가장 좋은 대접을 받는 건 아니다. 이건 남한이나 북한이나 마찬가지다.
"저는 남조선에 침투했다가 복귀해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사람으로서 생각되는 것이 많습니다. 솔직히 공화국 영웅이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보다도 못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 가정생활을 할 때 최소한의 가구나 전자제품은 당조직에서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서 옷장이나 이불장을 만들어 놓고 가져다가 쓰라고 하는데도 그런 것은 당에서 다 해결해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냥 놔두었습니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아직까지 당 조직에서 해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의당 당조직에서 다 해줄 것이라고 믿은 제가 잘못입니까? (…) 표면상으로는 부부장(차관)급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 내용적으로 보면 솔직히 인민군대 하급 군관의 가정생활 수준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공작원들이 본인 하나만 잘 먹고 잘 살자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로 가족과 떨어져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조국통일과 남조선 혁명을 위해서이지만 가깝게는 자기 가족과 후대를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30년 동안 중앙당 지도원을 하면서 냉장고도 하나 마련해놓지 못하고 무엇을 했습니까? 우리나라 중앙당 지도원이 냉장고도 없이 지낸다고 하면 과연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럼 중앙당 지도원도 집에 냉장고가 없으니 저에게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까? 저는 결코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저를 남한에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임무도 수행하고 지도원들에게 냉장고도 한 대씩 사줄 자신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는데 돈이 들어야 얼마나 들겠습니까? 1만 달러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299~301쪽)
능력도 있고 고생도 했는데, 대우는 열악하다. 그런데 나보다 능력도 떨어지고 더 편하게 지낸 이들이 더 좋은 대우를 받는다. 이런 걸 보면 누구나 체제에 분노를 느낀다. 역시 남한이나 북한이나 마찬가지다.
"김일성종합대학이 금성정치군사대학을 비롯한 북한의 모든 대학에 앞서는 것은 고위급 간부의 자식들이 많다는 것 정도이다. 반면에 금성정치군사대학에는 고위급 간부들의 자식이 극히 적다.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는 공작원들이나 전투원들을 양성하는 대학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중하급 간부나 평범한 노동자·농민의 자식들이고 따라서 그만큼 순수하다고 할 수 있다." (81쪽)
높은 위험을 감수한 이들이 높은 보상을 받는 게 옳다. 하지만 이는 교과서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권력을 쥔 이들은 낮은 위험을 겪고 높은 보상을 누린다. 반면 힘없는 사람들은 높은 위험을 감수하고 낮은 보상을 얻는다. 위험의 양극화, 그리고 권력의 대물림. 남한과 북한이 이런 점에선 닮았다.
온갖 반간계, 고육지계가 난무하던 <삼국지연의>의 시대나 지금이나 간첩 노릇이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사회에서 가장 만만한 이들이 간첩으로 내몰린다. 남한도 마찬가지다.
3.
남한도 북한에 간첩을 보냈다. 국군정보사령부가 2002년 9월 18일 제203차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보고한 북파공작원의 숫자는 모두 1만3835명이었다. 이는 기무사령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등이 독자적으로 보낸 공작원은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그런데 지난 2000년 11월 국방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북한이 1950년부터 1999년까지 파견한 남파공작원의 숫자는 6446명이다. 남한이 북한에 보낸 간첩의 수가 북한이 남한에 보낸 간첩의 두 배 이상인 셈이다.
이게 북한이 남한보다 더 정의롭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철저히 폐쇄된 사회인 북한에선 공작원의 생존 확률이 매우 낮다. 따라서 공작원을 더 많이 보내야 했다.
김성호 전 민주당 의원이 낸 <우리가 지운 얼굴>(한겨레출판 펴냄)에는 남한이 북한으로 보낸 간첩들의 사연이 잘 소개돼 있다. 이른바 북파공작원 이야기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를 계기로, 그간 음지에 머물던 북파공작원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왜곡도 있었다. 흔히 북파공작원은 사형수 등 범죄자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 않다.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만 해도, 실미도 부대 구성원들의 신상 정보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실미도 부대원들은 범죄와 거리가 먼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 북파공작원을 다룬 영화 <실미도>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북파공작원은 모두 사형수 등 범죄자 출신이라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
1971년 실미도 사건 당시 법무관으로 수사를 맡았던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실미도 부대가) 대부분 충청도 출신 민간인을 요원으로 임의 차출했으며, 이들에게는 군번도 주지 않은 채 장교 계급을 달아주었다. 훈련병 중 범죄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충청북도 옥천에선 한 동네에서 일곱 명이 한꺼번에 훈련병으로 차출되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어느 날 갑자기 시골에서 서울로 갔다. 돈을 많이 벌어 오겠다며 정체불명의 남자를 따라갔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취직을 준비하던 청년들로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다"고 말했다.
북파공작원들이 주로 범죄자 출신이라는 오해가 생긴 데는 이유가 있다. 북파공작 초기엔 사형수들을 활용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책이 바뀌었다. 남한 사회에 미련이 없는, 범죄자나 극빈층은 북한에 침투해서 공작을 하다 잡히면 투항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남한 사회에 미련이 많은 보통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라도 공작을 성공시키려 한다. 그래야 남한 사회로 복귀할 수 있으니까. 평범한 직업과 가정을 가진 이들을 북파 공작원으로 보낸 사례가 많은 이유다.
"A씨의 경우는 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중앙정보부의 포섭에 의해 북파간첩 활동을 했던 사례이다. A씨는 중앙정보부에 포섭된 뒤 일본에 가서 정식으로 첩보교육을 받은 뒤 중국을 거쳐 북한 지역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 (…) 더 이상 위험한 간첩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이제 북한에 간첩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중앙정보부에 통보한 뒤 계약을 맺지 않았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려 했으나 실패했고, 또 다른 회사에 취직을 하려 했으나 역시 신원조회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중앙정보부가 그를 다시 간첩으로 활용하기 위해 그의 취업을 철저히 막았던 것이다. 취직을 못하면 결국 다시 북파간첩으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중앙정보부는 판단했다." (<우리가 지운 얼굴>, 251쪽)
이런 사례가 많다. 고려대 출신으로 육군중위로 제대했던 장 모 씨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학력이 뛰어나고 군 복무 시절 근무경력이 우수했던 그를, 중앙정보부가 북한에 보낼 고정간첩 후보로 찍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는 그의 민간기업 취업을 막았다. 북파 간첩 외에는 다른 진로를 택할 수 없게끔 한 것이다. 결국 그는 스무 살의 부인과 두 살 난 딸, 그리고 태어난 지 세달 밖에 되지 않은 아들, 환갑을 넘긴 노모를 남기고 휴전선을 넘었다. 그의 생사는 아무도 모른다.
이 책에는 다양한 계층에서 차출된 북파공작원이 등장한다. 그러나 고위층의 자제는 없다. 북한 최고 엘리트들이 모였다는 금성정치군사대학에 고위층의 자제가 극히 적다던, 간첩 김동식의 술회를 떠올리게 된다.
4.
▲ <빛의 제국>(김영하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따지고 보면,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간첩을 닮았다. 가정에서의 나와 직장에서의 내가 다르다. 보수적인 친구들과 어울릴 때의 내 정체성과 진보적인 친구들과 대화할 때의 내 정체성이 다르다. 어쩌면 우리는 가정에서 직장으로 출근할 때, 휴전선을 넘는 간첩과 비슷해지는지도 모르겠다. 가정에서 형성된 정체성을 숨기고 직장인의 정체성으로 위장한다. 그러나 이런 정체성의 간극이 너무 커지면 대개는 견디지 못한다. 진보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던 이가 삼성 같은 재벌 기업에서 오래 버티기 힘든 것처럼.
북한에서 남한으로 보낸 간첩이 위험하다면, 그렇게 "옮겨 심은 자"의 씨를 말리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도저히 옮겨심기가 불가능하도록, 북한과 다른 사회를 만들면 된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은 북한과 점점 닮아간다. 사생활을 감시하고, 언로를 막는다. 위험한 일일수록 약하고 만만한 이들에게 쏠린다. 또 개인의 노력으로 '출신성분'의 한계를 뛰어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남한이 북한과 닮아갈수록 북한의 간첩 옮겨심기는 더욱 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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