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놓고 하기엔 민망한 말이지만, <프레시안>에는 주옥같은 필자가 많다. 이분들의 글을 독자보다 먼저 읽을 수 있다는 건,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의 직원 조합원으로서 누리는 작은 특권이다. 물론, 내가 모든 필자의 글을 다 읽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필자의 글은 내 담당이 아님에도 꼬박꼬박 챙겨 읽는다. 장석준 노동당(옛 진보신당) 부대표의 글도 그런 경우다. 늘 나보다 몇 걸음 앞선 생각의 지평을 열어준다.
장 부대표의 최근 칼럼(☞바로 가기 : "콘크리트 동굴의 노예들, 아파트의 저주를 풀자!" )을 읽고, 한동안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주거 공간의 문제가 사회 진보를 위해 애쓰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글이다. 실제로 진보이념의 선각자들은 한결같이 이 문제에 대해 나름의 모색과 실천을 했다.
▲ <착각하는 CEO>(유정식 지음, RHK 펴냄). ⓒRHK |
장 부대표의 글이 그저 여기까지였다면, 글을 읽고 난 내 생각의 실타래도 단정하게 남아 있었을 게다. 딱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니까. 실타래가 흐트러진 건 다음 대목에서였다.
"반면 사회 변혁을 이야기하는 쪽은 이런 현실에 둔감했다. 선구자들의 혜안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대지와 괴리된 허공의 대의였다. 노동 계급이 작업장에서 떠난 뒤 어떤 공간에서 생활하는지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독자적인 주거 공간 구상 같은 것은 없었다. 이런 가운데, 1980년대 말 거리와 공장에서 거세게 일던 그 공적 열정은 아파트 단지들로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두의 민주주의가 왜 매번 일상 속에서 소멸되어 버리는지는 사회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으로 남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최근에는 상황이 바뀌고 있다. 위에 소개한 박철수를 비롯해 박인석, 박해천 같은 저자들이 아파트가 한국인의 주된 주거 형태가 된 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깊이 캐묻고 있다. 이들은 사회과학자가 아니다. 건축 전공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책에서 나는, 사회과학 논문이나 운동권의 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한국 사회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아파트 일변도의 주거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한국 사회 변화의 중대한 과제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구의 절반이 '아파트 공화국'의 유폐자인 한, '시민사회'를 이야기하고 '노동 계급'을 말하는 게 얼마나 공허한 일인지 말이다."
인터넷 메신저로 대화할 때 흔히 쓰는 말, '허걱'이 실제 입으로 튀어나온다. '이런 이야기가 왜 이제야 나오는 건가요. 진보정당이 풍비박산 난 지금에서야.'
"노동 계급이 작업장에서 떠난 뒤 어떤 공간에서 생활하는지"에 대한 관심과 분석이, 10년만 일찍 나왔더라면 지금의 노동당을 포함한 진보 정치 진영의 위상은 크게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 개발 좌초된 용산, 서부이촌동 철도청 부지. ⓒ프레시안(최형락) |
1.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 그러나 진보적 공론장에서 제대로 된 토론이 이뤄지지 않은 문제는 '주거 공간' 외에도 많다. 나는 그 중 하나로 '조직'과 '경영'의 문제를 꼽고 싶다. '조직'이라고 하면 어쩐지 살벌한 느낌이다. 깡패 조직이 생각나는 것이다. 나만 그런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살벌한 느낌을 지우고 '조직'이라는 낱말을 곱씹어 봐도 즐거운 느낌은 아니다. 어딘가 꽉 짜여진 느낌. 아니면 공무원 조직처럼 틀에 박힌, 보수적인 느낌이 든다.
'경영'이라는 말도 그렇다. 좀 느끼한 느낌이다. 경영학을 가리켜 부르주아 학문이라고 하던 일부 좌파 청년들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기억을 꾹 눌러둬도, 느끼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대학 캠퍼스에서 제일 멀끔한 건물은 대개 경영대학 건물이다. 또 온갖 혜택으로 치장된 대기업 사외이사로 흔히 초빙되는 직종도 경영대학 교수들이다. 학문의 내용을 봐도 그렇다. 실험실 약품냄새가 나는 이공계 공부와도 다르고, 이념 논쟁의 흔적을 지울 수 없는 사회과학과도 다르다. 마케팅이니 재무관리니 하는 과목에서 이념의 피비린내나 약품 냄새를 맡기란 불가능하다. 그냥 좀 느끼할 따름이다.
딱히 진보도, 지식인도 아닌 나조차 그런데, 진보 지식인들이 '조직'이나 '경영'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옳은 태도일까. 우리가 어떤 동네의 어떤 집에서 사는지 못지않게 중요한 게 조직과 경영의 문제다. 조직과 동떨어진 인간은 없다. 따지고 보면, 가족도 하나의 조직이다. 출산이나 입양을 통해 조직을 재생산하고, 수입과 지출을 일상적으로 관리하는 경제활동을 한다. 그뿐 아니다. 모든 조직의 일반적인 문제, 예컨대 책임과 규율의 문제로 늘 조금씩 갈등이 생긴다. 예컨대 요리는 부인이 설거지는 남편이 하기로 돼 있는 가정이 있다. 여기서 남편이 책임을 방기할 경우, 온갖 종류의 조직적 고민이 불거진다. 감정적 상처를 내는 방식 등으로 '처벌'할 것인가, 슬슬 달래면서 길들일 것인가. 유형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조직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늘 지각하는 직원, 일 마무리가 꼼꼼하지 못한 직원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결국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된다.
'경영' 역시 마찬가지다. 이 낱말이 너무 거북하다면, '살림살이'라고 해도 좋다. 모든 조직은 '경영' 문제를 갖고 있다. 수입과 지출을 맞춰야 한다. 이게 괴리된 상태로 오래 지나면, 조직은 결국 사멸한다. 또 끊임없이 새로운 조직원을 받아들여야 하며, 이들을 길들이고 적절한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는 그에 걸맞은 대책을 세워야 한다. 교회나 성당, 사찰 같은 종교조직도 예외가 아니다. 혁명이나 개혁을 꿈꾸는 조직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이 먹고 움직여야 죽지 않는 것처럼, 조직은 경영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데 진보 지식인들은 대개 조직과 경영에 별 관심이 없다. 이게 정상일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과거 역사에서 사회 변혁을 꿈꿨던 이들은 늘 새로운 조직 운영 원리를 함께 고민했다. 예컨대 동학 농민군, 반봉건성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그들조차 조직 운영 원리는 파격적이었다. 그들의 조직 집강소에선 양반과 상민이 서로 존댓말을 썼다. 그들의 지도자 해월 최시형은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었으며 틈만 나면 짚신을 삼는 노동을 했다. 성리학을 공부한 양반이 아니면 사람대접을 못 받던 세상에선 그것만으로도 이미 혁명이었다. 바꿔 말하면, 새로운 조직 문화와 경영 원리를 구현하지 못한 진보, 또는 변혁 운동은 그저 껍데기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2.
문제는 우리가 경험한 조직이 종류가 너무 뻔하다는 점이다. 한국엔 숱한 조직이 있지만, 유형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가정, 교회, 군대, 기업, 관공서. 대충 이 정도 아닐까. 진보 지식인들조차 조직과 경영에 관해서는 상상력이 제한되는 것도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성인이 돼서 경험한 조직은 군대와 기업(주식회사) 정도가 고작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들 조직의 경험은 너무나 강력해서 전혀 관계없는 분야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곤 한다.
예컨대 과거 학생운동은 군대 문화와 닮았다는 비판을 종종 받았다. 위계적인 선후배 관계, 남성 중심적인 투쟁 문화, 군가와 비슷한 일부 민중가요. 사실, 운동권만 이런 비판을 받은 건 억울한 일일 수 있다. 대학 문화 자체가 예비역 복학생들이 주도한 군대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성란 작가의 최근 <한겨레> 칼럼(☞바로 가기 : "진짜 사나이")이 이를 잘 묘사했다.
경험한 조직이 군대와 기업뿐이라는 사정은 정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명박, 문국현, 안철수 등 기업 경영인 출신이 유력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현상도 그래서가 아닐까. 우리가 경험한 리더가 군대 소대장 아니면 사장님뿐이니 다른 종류의 리더십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수완 좋은 CEO냐, 아니면 착한(혹은 착해 보이는) CEO냐 정도의 선택만 있을 뿐이다. 그게 아니면 군인 리더십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정치인을 뽑는 선택지가 있다.
결국 우리 사회의 성인들이 보다 다양한 '조직'을 경험하게 하는 일은 동시에 정치 지도자의 선택지를 늘리는 일이기도 하다. 최근 들불처럼 번져가는 협동조합 열풍이 반가운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주식회사와는 전혀 다른, 협동조합 조직의 운영원리가 제대로 정착하고, 거기서 새로운 리더십을 경험한 이들이 늘어난다면, 정치 지도자 시장에서도 새로운 수요가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수요에 맞춰 새로운 정치인들이 등장할 게다.
또 기존 주식회사와는 다른 방식의 경영원리가 다양하게 실험된다면, 이는 진보정당과 사회운동 조직의 운영에도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실제로 '경영'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면, 기존 사회단체 역시 고리타분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아니면 귀동냥한 경험에 비춰보면 그렇다. 자금을 관리하는 일, 조직 구성원에게 역할과 책임을 부여하고 의욕을 북돋우며 적절한 규율을 유지하는 일 등에 대해선 조직 지도부가 아무런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기존 관공서나 기업의 방식을 답습하거나 하는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 사회단체에서 가끔씩 발생하는 자금 유용 문제 역시 개인의 부도덕성보다는 경영 시스템의 부재 또는 무지에서 더 크게 비롯된다고 들었다.
요컨대 정말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지금 할 일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과 돈을 모으고 이를 조직하고 운용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속에서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경영을 경험한 이들이 늘어난다면, 결국 새로운 세상의 문턱도 더 가까워질 게다.
3.
서론이 너무 길었다. 하지만 요점은 한 줄이다. 진보 지식인, 진보 정치인들이 조직과 경영의 문제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 그러자면 결국 책을 읽어야 한다. 알다시피 대개의 경영학 서적은 지나치게 친기업적이다. '경영'의 대상이 사실상 기업뿐인 상황에선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또 조직운용과 자금관리의 실무를 담은 책조차 일정한 이념성을 띤 경우도 많다. 주주의 권리, CEO의 권한을 절대화하는 이념이다. 그러나 어차피 이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텍스트는 없다. 그걸 고려하고 비판적으로 읽으면 된다.
▲ <비영리단체의 경영>(피터 드러커 지음, 현영하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 ⓒ한국경제신문 |
국내 필자 중에선 인퓨처컨설팅 유정식 대표의 책들을 추천하고 싶다. 유 대표의 책들 역시 기업 조직의 경영에 관한 것들이다. 그러나 조직 일반에 관한 내용이 많다. 최근에 나온 책 <착각하는 CEO>(유정식 지음, RHK 펴냄)가 그렇다. 제목은 이렇지만, 기업 CEO가 아닌 이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어떤 조직이건 늘 부딪히는 문제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저자가 주로 기반으로 삼는 건 심리학과 행동경제학 관련 논문들인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예컨대 모든 조직에서 흔히 부딪히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선적인 지도자'다. 진보 진영에도 대기업 회장만큼이나 독선적인 인물들이 꽤 있다. 논쟁에 강하고 도덕성에 대한 자신감이 깊다보니 자기 생각과 판단에 대한 확신이 지나친 경우다. 다른 구성원들은 '가족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독선을 방치하고 반발은 애매하게 무마한다. 이런 경향이 고착화되면, 일종의 '집단사고'가 생긴다. 작은 이견은 덮어두고,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게 좋은 일일까. 저자의 설명 가운데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여럿이 모여 합의로 결정했으니 개인이 혼자 내린 결정보다 우수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집단의 의사결정에는 항상 일사불란함을 강제하는, '집단사고(group thing)'라는 망령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집단의 만장일치는 집단사고의 출현을 가장 강력하게 알리는 신호다. 길이가 분명히 다른 두 선을 두고 다섯 명에서 일곱 명의 공모자들이 같은 길이라고 거짓말을 하면, 혼자만 실험 대상자인 줄 모르는 사람은 집단의 압력에 순응하여 거짓에 동참한다는 솔로몬 애쉬의 실험은 이제 매우 유명해져서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집단과 다른 결정을 내렸다가 '나만 피해를 보면 어쩌나'하는 우려가 집단의 대세를 따르려는 순응의 동기를 형성한다.
(…) 하지만 애쉬의 실험이 논란의 여지가 없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의사결정의 중대성이 낮기 때문에 사람들이 집단의 거짓말에 순응한 것은 아닐까? 길이가 다른 두 선을 보며 길이가 같다고 우기는 공모자들과 동의해도 무방한, 별로 중대하지 않은 결정이기 때문은 아닐까? 만일 집단 전체나 구성원 개개인에게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결정해야 할 사안이 중대하다면 순응이 약화될까, 아니면 강화될까?" (115~116쪽)
▲ <문제해결사>(유정식 지음, 지형 펴냄). ⓒ지형 |
난이도가 낮고 사안이 중대하지 않은 경우엔 집단사고가 동조한 비율이 33퍼센트다. 난이도가 낮고 중대한 경우엔 그 비율이 16퍼센트다. 난이도가 높고 중대성이 낮으면 35퍼센트, 난이도와 중대성이 모두 높은 경우엔 51퍼센트다.
조금 길지만 이어진 저자의 설명을 다시 인용한다.
"실험조건 중 질문의 난이도가 낮은 조건은 내외부적 환경 변화의 흐름을 파악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고 근거자료도 풍부한 상황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럴 때 의사결정의 중대성이 낮으면, 즉 의사결정 이후에 예상되는 결과가 조직의 성패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집단이 몰고 가는 방향에 구성원들이 순응하기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외부 환경을 잘 인지할 뿐만 아니라 사안도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집단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더라도 큰 위험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반대로 의사결정의 중대성이 커지면 이미 확보했거나 충분히 입수 가능한 근거를 바탕으로 집단의 의견에 저항하여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 매출과 이익,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 인력운용의 방향, 제휴나 인수합병 등 조직에서 제기되는 대부분의 전략적 질문들은 난이도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결정에 따른 중대성도 매우 크다. 또한 관련 근거를 찾기가 어렵고 상황탐색을 위한 시간도 충분히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신속히 결정해야만 하는데, 배런의 실험은 사람들이 이럴 때일수록 자기 목소리를 숨기고 무조건적으로 집단의 의견을 따르려는 동기가 크다는 것을 추측케 한다. 특히 목소리가 크고 영향력이 막강한 사람이 확신을 가지고 한쪽으로 몰고 갈 때는 더욱 그러하다. (이는 배런의 후속 실험에서 밝혀졌다). 이런 이유 때문에 누가 봐도 우려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전략이 강행됐다가 종종 엄청난 실패로 막을 내리곤 한다. 자동차 산업에 무리하게 진출했다가 법정관리에 처한 삼성자동차가 대표적이다.
(…) 만장일치는 사안이 어렵고 중대할수록 의사결정의 책임을 집단에게 떠넘김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목적에서 나오는 법이다. 즉, 만장일치가 의사결정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계속되는 만장일치의 관행은 조직이 활력을 잃어간다는 뚜렷한 신호 중 하나다. 사람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충분히 내며 갑론을박하는 상황을 건강한 의사결정과정이라 여겨야 하며, 구성원들이 집단의 결정에 순응하도록 유도하는 교묘한 장치나 문화를 걷어내는 일이 의사결정의 건강함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117~118쪽)
난이도와 중대성이 동시에 높은 결정을 해야 하는 경우는 대기업보다 비영리조직에 더 많다. 경영정보를 조사하고 분석하는 방대한 조직을 갖고 있는 대기업은 상당히 많은 문제에 대해 난이도를 낮출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조사와 분석이 쉽지 않은 비영리조직에선 대개의 문제가 다 난이도와 중대성이 동시에 높은 경우다. 따라서 비영리조직일 수록 지도자의 독선과 구성원의 집단사고를 경계할 필요가 더 커진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꽤 많은 단체에선 '만장일치'가 위험하다는 점 자체를 무시하곤 한다. 이런 조직 문화에서 기존의 CEO 리더십을 대체할 새로운 리더십이 잉태될 수 있을까. 쉽지 않다고 본다.
4.
포스텍(옛 포항공대)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저자의 다른 책들도 함께 읽으면 얻는 게 많다. <문제해결사>(지형 펴냄), <경영, 과학에게 길을 묻다>(위즈덤하우스 펴냄), <시나리오 플래닝>(지형 펴냄) 등은 논리적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을 익히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런 훈련이 꼭 기업조직에서만 필요한 건 아닐 게다. 비영리조직에서 흔히 벌어지는 '논쟁을 위한 논쟁'을 막는데도 요긴하다고 본다.
▲ ,컨설팅 절대 받지 마라>(유정식 지음, 거름 펴냄). ⓒ거름 |
LG전자가 스마트폰 시장에 대한 대응에서 실기한 데는 맥킨지 컨설턴트 출신 임원들의 책임이 크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또 웅진그룹이 극동건설과 새한을 무리하게 인수하며 몸집을 불리다 사실상 공중분해 된 배경에도 MBA와 컨설팅 업체를 거친 엘리트 임원들이 있다는 게 흔한 해석이다. 이런 사건들을 거치며 재계에선 컨설팅 무용론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 상당수 중견기업에선 미국 유명대학에서 MBA를 받고 경영컨설턴트로 일한 경영엘리트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다.
예컨대 A라는 사람이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3년쯤 일하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MBA를 받고 맥킨지 컨설팅에서 4년쯤 일했다고 하자.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최상위 기업군이 아닌, 중견 기업들에선 이들의 경력을 대폭 확대해서 계산해주는 경우가 많다. 앞서의 A라면 대기업 경력 3년, 더하기 MBA 과정 2년에 곱하기 2, 더하기 컨설팅 경력 4년에 곱하기 2, 그리고 더하기 알파. 이렇게 되면, 순수한 실무 경력은 3년, 직장 경험은 7년에 불과한 A가 15년 이상의 경력을 지난 간부 대우를 받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도, 실무 경험이 이렇게 부족한 상황에서 중요한 사업을 이끌 수 있을까. 기업 현장에서 나오는 대답은 회의적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이런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오너 경영자의 허영심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경영컨설턴트 출신 임원들에게 중요한 결정을 맡겼던 웅진그룹의 경우도 그렇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수성가한 윤석금 회장이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지닌 엘리트들을 거느리고 싶은 욕심에 이들 임원들을 스카우트 했다는 게다.
그런데 저자가 쓴 <컨설팅 절대 받지 마라>를 읽어보면, 유명 컨설팅 업체 소속 컨설턴트의 실력에 대한 환상이 확 깨진다. 인맥관리에 치중하는 컨설턴트가 승진에 유리한 컨설팅 업체의 내부 문화, 공부하지 않는 컨설턴트들, 뻔한 방법론을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한 컨설팅 보고서, 객관적인 분석보다 오너 경영자의 비위를 맞추는데 익숙한 컨설턴트 문화 등.
웅진그룹 회장이 진작 이 책을 읽었더라면, 기업의 운명도 바뀌지 않았을까. 아울러 이런 수준의 컨설턴트들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을 주도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답답함이 치민다. 그래서 이 책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노선의 전위투사들의 부실한 속내를 폭로한 책이기도 하다. 진보 지식인들에게 저자의 책을 권하는 또 한 가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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