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의 최신작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박세연 옮김, 엘도라도 펴냄) 역시, 바로 같은 목적으로 쓰인 책이다. 크루그먼은 "지혜로운 대중을 기반으로 여론의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정치인들이 정책 방향을 바꾸도록 촉구하고, 그럼으로써 지금의 불황을 완전히 '끝내버리는' 것"(10쪽)을 자신이 낸 신간의 목적으로 삼았다.
요컨대 이 책은 한때의 유행어를 빌자면 '제곧내', 즉 '제목이 곧 내용'인 그런 종류의 책이다. 한국어에는 그 단어가 다소 다른 뉘앙스를 지니게 되었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책'(book)이라기보다는 '팸플릿'(pamphlet)에 가까운 그 무언가이다. 어떤 단행본으로서 오랜 세월동안 읽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게 아니라,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주제에 대해,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소화하기에는 긴 분량의 논의를 풀어내는 그런 종류의 출판물이라는 것이다.
▲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폴 크루그먼 지음, 박세연 옮김, 엘도라도 펴냄). ⓒ엘도라도 |
미국 독립 혁명에서 이념적 바탕을 제공한 <상식(Common Sense)>도 마찬가지다. 토마스 페인은 두 권의 팸플릿을 아주 짧은 시간에 열정적으로 써냈다. 당장 영국과 전쟁을 하게 된 마당에, 오랜 세월을 두고 '사유'하는 것은 그리 큰 의미가 없다. 글을 쓰는 것이 곧 실천이며, 실천하는 것이 곧 글을 쓰는 상황인 것이다. 물론 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폴 크루그먼의 이 책 역시 바로 그런 절박함과 긴박감의 산물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페이지를 넘겨보자. 앞서 말했듯 이 책의 주제는 제목에 쓰여 있다.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황"은 무엇인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기나긴 경기 침체를 의미한다. 그것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폴 크루그먼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양적 완화'보다 더욱 강력하게 시중에 자금을 유통시킴으로써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경제학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경제 불황을 끝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빈 병에 돈을 집어넣은 후 땅에 묻은 다음, 사람들이 알아서 꺼내가게 하는 것"이라는 케인스의 말을 누구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불황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지금의 불황은 경기 부양책을 추가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그런 것인데, 어리석게도 긴축재정을 펼침으로써 가래로 막을 것을 호미로 막고 있다는 것이 크루그먼의 주된 논지다.
결론을 아는 것과 그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을 따져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지만, 경제학에 있어서 이 책의 예상 독자인 "지혜로운 대중"에 속할 뿐인 필자로서는 그 내용을 일일이 검토하거나 반박할 능력이 없다. 어쩌면 폴 크루그먼의 말대로 미국 경제의 경우 양적 완화를 계속하고 경기 부양책을 가능한 한 최대한 동원하는 것이 현재의 불황을 끝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논적들이 하는 말처럼 그렇게 무턱대고 돈을 풀다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전체 경제가 도탄에 빠질 수도 있다. 그 내용을 차분히 짚어가며 '경제 두뇌'를 키우는 것은 독자들의 개별적인 몫으로 남겨두기로 하자.
그럼 대체 왜 필자는 경제학적인 조예도 없으면서 이 서평을 쓰겠다고 나섰던 것일까?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경제학도는 아니지만 예전부터 폴 크루그먼의 팬이었기 때문에 꼭 한 번 그의 책에 대해서건 삶에 대해서건 뭔가 써보고 싶었다. 둘째, 이 책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에 빛나는, 또한 본인이 오래도록 '팬심'을 가지고 있던 폴 크루그먼의 책이지만 현재 한국의 상황에 곧이곧대로 대입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아니 '팸플릿'은, 단지 경제학적인 논의를 넘어서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일단 두 번째 논점부터 이야기해보자.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이 책의 제목이자 주제는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이다. 그런데 대체 "이 불황"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필자는 앞서 그것을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기나긴 경기 침체"라고 막연하게 이야기했지만, 거기서 가장 중요한 고유명사 하나가 빠졌다. 폴 크루그먼이 지금 당장 끝내라고 외치는 그 불황은, 바로 '미국'의 불황인 것이다.
정통 케인지언의 논리대로 유효수요를 창출해 불경기를 이겨내기 위해 돈을 많이 찍어내는 전략은, 어디까지나 생산량이 곧 소비량과 동일한 '단일 경제'를 전제로 했을 때 성립한다. 가령 한국처럼 자국의 통화가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으며 주요 천연 자원을 외국에 의존하는 나라의 경우라면, 무턱대고 돈을 찍어낸다고 해서 불경기가 끝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경제는 한국 바깥의 요소들, 즉 환율, 미국과 중국 및 일본의 경기, 주요 원자재의 가격 등에 의해 심각하게 요동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록 한국이 세계 10위권에 드는 경제 대국이 되었더라도 이 상황은 마찬가지다.
반면 미국은 다르다. 세계 2위에서 10위까지 나라의 국방비를 전부 합쳐도 미국의 국방비에 미치지 못한다. 미국은 전 세계 GDP의 30퍼센트 가량을 생산하고 있다. 가장 결정적으로, 미국의 돈인 달러는 현재 국제 결재 및 금융 거래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하는 기축통화다. 미국 경제는 대외 요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으며, 오히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게 매머드급 '대외 요소'로 작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폴 크루그먼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논의를 거의 그대로 차용하여 '당장 돈을 찍어내서 이 불황을 끝내라!'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세상이 단 하나의 국가로 이뤄져 있다면 부채의 전체 규모는 순 부채 가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의 부채가 곧 다른 사람의 자산이기 때문이다"(204쪽)라고 하는데, 이 말은 "순 외채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으며 핵심적인 문제도 아"(같은 곳)닌 미국의 경우에는 잘 들어맞는다. 반면 기업들이 무리하게 단기 자금을 대출받은 후 그것을 갚지 못해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이했던 한국의 경우, 이렇게 단순한 해법을 내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는 제목이 곧 내용인 단순한 책, 아니 팸플릿이다. 하지만 미국인이 아닌 우리는 이 책을 결코 그렇게 단순하게 읽을 수 없다. 미국에서 불황을 끝내기 위해 양적 완화 정책을 펴면, 거기에 맞춰서 한국은 한국의 경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또한 지금처럼 바로 그 양적 완화 정책을 서서히 철회하고자 하는 분위기를 보인다면, 또 거기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의 세상은 우리의 것보다 훨씬 경제학 교과서에 맞춰서 움직이는 곳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 번 '거리두기'를 하고 이 책을 다시 읽으면 이제 좀 더 새로운 면모가 보이기 시작한다. 폴 크루그먼이라는 한 사람의 '애국자'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유명한 국제경제학 교과서의 저자인 그가,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 단순한 케인지언 정책만으로 모든 나라의 모든 불황에 맞설 수 없다는 것을 결코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다음으로 나는 몇몇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들과 함께 미국의 경우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거니와, 솔직히 말해서 가장 '걱정'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반면 유럽 지역은 '단일 통화'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이로 인해 특별한 접근 방식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60쪽)
▲ 폴 크루그먼. ⓒwww.epipaideia.com |
이 책의 '결론'을 알고 싶은 사람은 굳이 책을 살 필요도 읽을 필요도 없다. 반면 그 논의 전개 과정을 통해 경제학적 지식을 쌓거나 갈고 다듬고 싶은 이에게, 필자가 따로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팸플릿'을 하나의 책으로, 주인공과 서사가 있고 그 모든 것이 전제로 삼고 있는 배경도 가지고 있는 언어적 구조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이 책은 한 애국자의 진심어린 호소로 인해,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한 모종의 감동을 선사한다(물론 그와 나의 처지가 다르므로 거기에 취해있을 수야 없겠으나, 일종의 1인칭 소설처럼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뜻이다). 보수주의자들에게 '빨갱이' 소리를 듣는, 미국의 정치 지형 내에서 가장 왼쪽에 속한다고 분류되는 그이지만, 이토록 강한 애국심과 열정으로 현실에 개입하고 지적인 논의를 형성하고자 애쓰는 모습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박근혜 정부의 외교, 경제, 정치적인 방향에 대한 지적인 논의를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가운데, '일베'가 어쩌고 윤창중의 "그랩"이 저쩌고 하는 소리만이 진보 언론의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단지 값싼 조롱과 회의주의만이 한국의 담론계를 꽉 채우고 있다.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를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일종의 1인칭 영웅전처럼 받아들여져야 할 필요가 있다. 폴 크루그먼의 결론에 모두가 동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국에는 각자의 지식과 전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이렇게 뜨겁게 논쟁하는 지식인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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