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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죽인 진보, 인터넷이 확인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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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죽인 진보, 인터넷이 확인 사살?

[장석준 칼럼] 협동조합 프레시안 생각

"나는 슈뢰더라 불리던 구두 수선공을 알게 되었다. (…) 나중에 그는 미국으로 갔는데 (…) 그는 나에게 읽어볼 만한 신문 몇 가지를 주었다. 따분했던 나는 그것을 약간 읽어보고 나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 신문에서는 노동자들의 참상에 대해 묘사해 놓았고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본가들과 지주들에게 종속되어 있는가를 너무나 생생하게 그리고 매우 자연스럽게 묘사했던 까닭에 나는 정말로 매료되었다. 나는 비로소 눈을 뜨게 된 것 같았다. 나의 모든 삶은 그날이 올 때를 기다리며 떨쳐 일어나게 되었다."

에릭 홉스봄의 <제국의 시대>(김동택 옮김, 한길사 펴냄, 1998년, 239쪽)에 인용된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어느 독일 노동자 이야기다. 신문이 평범한 한 노동자를 신념 있는 사회주의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신문 하나가 사람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 오늘의 경험으로 보면, 실감이 잘 안 난다.

21세기 한국에서 진보 정치 운동이 왜 이렇게 힘든지에 대해 여러 설명들이 있다. 이런 설명들은 대체로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급성장하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유럽과 현재 한국 상황을 서로 비교하여 그 차이점에 주목하곤 한다. 미디어 환경은 그러한 차이의 목록 중 중요한 한 항목이다. 100년 전 언론 생태계와 지금의 그것 사이의 차이가 한 세기 전 유럽 좌파의 약진과 오늘날 한국의 그 부진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위 인용문에 '신문'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신문'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신문들과는 많이 달랐다. 우리에게 신문이라면 대기업 규모의 전국 일간지다. 악명 높은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그러하고, <경향신문>, <한겨레>도 그 형태는 같다. 그러나 지난 세기 벽두 유럽에서 신문은 대개 작은 지방지들이었다. 기껏해야 수공업 작업장 규모의 인원이 만들었고, 작은 도시 안에서 주로 배포되었다. 위 인용문의 노동자가 본 것도 이런 형태의 신문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신문을 창간하고 운영하는 일은 오늘날보다는 훨씬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노동조합 운동가, 협동조합 운동가 등등 자본도 없고 탄압받기 일쑤인 사람들도 자신들의 활자 매체 하나쯤은 가질 수 있었다. 아니, 운동을 하려면 무엇보다 인쇄 매체를 창간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게 상식이었다. 20세기 초까지 서구에서 운동가란 곧 언론인과 동의어였다.

프랑스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 피에르 르루부터가 그러했다. <레미제라블>의 바리케이드전이 벌어지던 바로 그 무렵(1820~30년대) 르루는 <글로브(지구)>라는 신문을 창간하는 것으로 최초의 사회주의 선전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이것은 모든 좌파 투사들의 모델이 되었다. 우리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전국적 정치 신문"이라는 구호를 알게 되었지만, 이것은 기실 100년 가까이 이미 지속된 전통을 러시아에서 뒤늦게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전성기에 수도 베를린에서 발행된 <포어베르츠(전진)>를 비롯해 모두 50개 이상의 지역 신문들을 발간했다. 새로운 당 활동가들은 대개 노동조합이 아니면 이러한 당 언론을 통해 성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역시 그러한 지방지 중 하나(<라이프치히 인민 신문>)의 편집자로 경력을 시작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런 좌파 신문들 중 장 조레스가 1904년에 창간한 <뤼마니테(인류)>는 지금도 프랑스 공산당과 연계를 맺으며 발행되고 있다.

이런 언론 환경이 과거 좌파의 성장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면, 역으로 이런 환경의 변화는 좌파의 전진이 중단된 사정에 대해 또한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텔레비전이 점차 보급되었고, 이와 함께 시각 매체가 문자 매체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방송은 태생적으로 독점이 지배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더불어 소규모 자생적 신문, 잡지가 만개하던 인쇄 매체 생태계도 전국 일간지를 내는 거대 기업이 지배하는 체제로 급변했다. 다양성의 시대는 가고 바야흐로 독점의 시대가 열렸다.

좌파든 우파든 모든 대중 정치 세력은 이런 미디어 환경에 적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시각 매체가 요구하는 것은 연설문 투의 선동적 칼럼을 쓰는 데 능한 이념가가 아니라 매력적 외모의 스타 정치인이었다. 이 진화의 극단에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있다.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활동하다 체포된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매체 사상가 레지 드브레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사람들이 자기 방에 틀어박혀 텔레비전 브라운관에서 눈을 떼지 않게 된 때부터 좌파의 전성기는 끝났다고("Socialism : A Life-Cycle", New Left Review, no. 46, 2007).

ⓒappleinsider.com

한국의 진보 정치 운동은 이미 이러한 시각 매체 중심의 언론 환경이 뿌리 내린 '이후에' 등장했다. 어쩌면 유럽보다도 더 방송국과 거대 전국 일간지가 확고히 지배하는 상황에서 첫 싹이 돋아 조금이라도 성장해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드브레 식 진단에 따른다면, 안 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타 정치인의 변절과 폐쇄적 이념 서클 회귀라는 양극단의 혼란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물론 "변화! 오직 끊임없는 변화!"라는 자본주의의 미덕(?) 덕분에 또 다른 변화의 가능성이 나타나고는 있다. 이미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다. 인터넷과 휴대 전화의 등장 그리고 이 둘의 결합 말이다. 이 새 미디어 환경은 텔레비전의 독재가 절정을 구가하던 시기에 비하면 분명 매체 수용자의 보다 능동적인 참여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지도 벌써 10년이 훨씬 넘는다. 최근에는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가 이러한 기대를 일정하게 실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은 여전히 가능성의 차원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내용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단위의 문제가 남아 있다. 인터넷이 아무리 개별 수용자들의 참여를 보장한다 해도 기본적인 내용이 지속적으로 생산되려면 어쨌든 정보와 의견의 공급자들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100년 전 유럽의 소규모 지방지들과 같은 역할을 할 집단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언론 집단의 생존력은 아직 검증 대상이다. 아니, 불길한 조짐이 더 많다. 포털 사이트의 위력에 인터넷 매체의 생존이 좌우되는 최근 상황은 위험한 적신호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독점이 충분히 가능하며, 어쩌면 벌써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프레시안이 협동조합 방식의 온라인 매체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다. 가장 급박한 위기의 순간에 나온 모험의 한 수다. 그래서 임기응변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역사 속의 중요한 혁신들은 대개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 그 대응으로 등장하곤 했다. 우리의 관심이 조금이라도 더 모이기만 한다면, 프레시안의 선택도 그러한 혁신의 성공 사례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생산자와 수용자가 함께 참여하는 협동조합 형태의 매체는 한 세기 전 유럽 인민들의 각성의 무대였던 소규모 자생적 언론의 21세기 판이 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기술 잠재력을 활용해 근대 민주주의 초기의 열정을 되살리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는 언론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이들의 미래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진보 정치 운동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열어보려는 이들의 미래 역시 걸려 있다. 협동조합 프레시안 운동의 주창자들에게 지금 내가 더 없이 절실한 동지애를 느끼며 진보 정치의 재건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관심과 동참을 호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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