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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의 신> 김혜수는 왜 정규직을 거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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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의 신> 김혜수는 왜 정규직을 거부하는가?

[장석준 칼럼] 메이데이에 노동 시간 단축 운동을 생각한다

어제(1일)는 세계 노동자의 날, 메이데이였다. 서울을 비롯해 곳곳에서 노동자 대회가 열렸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기념 행진이 있었다.

매년 돌아오는 메이데이이지만, 요 몇 년 새는 그 의미가 더 각별하다. 재정 위기가 긴축과 실업으로 이어지며 사회적 긴장이 높아지는 유럽에서도 그렇고, 공장 앞과 거리 그리고 심지어는 철탑 위에서까지 장기 투쟁이 계속되는 이 나라에서도 그렇다.

메이데이 때마다 항상 빼놓지 않고 이야기되는 게 이 날의 유래다. 왜 하필 5월 첫째 날을 노동자의 날로 기념하게 되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130여 년 전 미국 노동자들 이야기가 나오게 마련이다. 1886년 5월 4일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을 지나던 노동자 시위 대열에서 의문의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경찰은 이것을 아나키스트들의 음모로 몰아붙여 8명이 검거되었고, 결국 그 중 4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후 이 때 희생된 노동자들을 추모하며 메이데이의 전통이 시작됐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이것은 사회주의·노동자 정당의 국제 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의 결정이었다. 1889년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파리에서 제2인터내셔널 1차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자 레이몽 라비뉴가 시카고 투쟁을 기리는 국제 시위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채택돼 1891년부터 전 세계 노동자들의 하루 공동 투쟁이 시작됐다. 그 공동 투쟁의 날이 지금의 메이데이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시카고 투쟁과 제2인터내셔널의 결정을 꿰뚫는 공동의 요구 사항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8시간 노동제 쟁취"였다. 헤이마켓 광장을 가로지르던 노동자들이 외치던 것은 "8시간 노동제 실현"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이 각 국 노동자의 일일 공동 파업으로 환기하고자 한 것은 단지 시카고의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그들이 부르짖은 "8시간 노동제" 구호였다. "하루 노동은 8시간만으로!" 이것은 곧 그 시대의 노동 시간 단축 요구였다.

100여 년 전 노동자들에게는 노동 시간 단축 요구가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물론 그 시대에도 지금처럼 노동 운동의 요구 목록 중 항상 첫 줄을 차지한 것은 임금 인상이었다. 아니, 지금보다 더 절박했다. 아직 대다수 노동자들이 절대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임금 인상만큼이나 절실한 또 다른 핵심 목표로 노동 시간 단축을 내세웠고, 다름 아닌 그 투쟁 과정에서 메이데이가 등장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오늘날 우리가 메이데이를 보내며 새삼 곱씹어봐야 할 게 바로 이것이다. 노동 시간 단축은 노동자들에게 무엇인가? 이것을 임금 인상과 어깨를 겨룰 핵심 과제로 내세운다는 것은 노동 운동에게 어떤 의미인가?

임금 인상 투쟁의 이면에는 고유한 논리가 작동한다. 그것은 어쩌면 역설적인 것이다. 현실에서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가 별 분란 없이 관철되는 법은 거의 없다. 이윤의 극대화냐, 임금 몫의 확대냐를 둘러싸고 자본과 노동 사이에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투쟁 과정에서 자본-노동 관계는 대립과 투쟁의 관계임을 몸으로 체험하기도 한다.

그런데 격렬한 투쟁의 결과로 임금 인상 목표를 어느 정도 실현하고 나면 예기치 못한 결과가 나타난다. 대립 관계 대신 또 다른 색깔의 관계가 부각된다. 그리고 이 관계는 어쩐 일인지 전보다 더 강해진 힘으로 노동자의 삶을 포위한다. 그것은 의존 관계다.

이제 더 많은 임금을 받게 된 노동자는 그 임금을 보장하는 일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본-노동 관계에 전보다 더 깊이 의존하게 된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본의 명령권을 좀 더 흔쾌히 받아들이게 된다. 즉, 임금 인상 투쟁의 고유한 논리는 노동자들이 더욱더 자본-노동 관계 안에 깊숙이 '들어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데 노동 시간 단축의 경우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다른 논리가 있다. 물론 따지고 들어가면 임금 인상 투쟁과 노동 시간 단축 투쟁이 그렇게 명확하게 갈리는지는 의문이다. 임금 삭감 없이 노동 시간이 줄어들게 되면 그것은 사실 또 다른 형태의 임금 인상 투쟁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임금 인상이나 노동 시간 단축이나 모두 자본-노동 관계를 전제로 한 '개혁' 과제들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둘 다 자본-노동 관계 자체의 변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노동 시간 단축 투쟁이 선 자리는 임금 인상 투쟁과 같지 않다. 노동 시간을 줄인다는 것은 노동자의 삶에서 자본의 명령권이 행사되는 범위를 축소한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노동자의 삶에서 노동자 자신이 결정하는 범위는 확대된다. 즉, 노동자의 삶에서 자본-노동 관계로부터 철수하는 부분이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임금 인상 투쟁이 자본-노동 관계 안에 더 깊이 '들어가게' 만든다면, 반대로 노동 시간 단축 투쟁은 그 관계로부터 얼마간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다.

애초 시카고 노동자들의 요구 자체가 그랬다. 그들이 바란 것은 단순히 자본과의 양자 관계에서 노동 시간의 길이를 밀고 당기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8시간 노동, 8시간 교육, 8시간 휴식"으로 이뤄진 삶을 주창했다. 즉, 130여 년 전의 노동자들은 자본-노동 관계는 결코 삶의 3분의 1 선 너머로 확대될 수 없다는 원칙을 정하려 했으며, 나머지 3분의 2의 삶은 노동자의 절대 자유의 영역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다.

노동 운동이 처음 시작될 때 노동자들은 이렇게 싸웠다. 그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또한 그만큼의 열정으로 노동 시간 단축을 위해 싸웠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자본-노동 관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길' 감행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물러설' 권리를 요구했다. '들어가기'와 '물러서기'의 이 미묘한 균형 위에 노동자들의 불안하게 깜빡이면서도 찬란히 빛나던 자유가 서 있었다. 그리고 이 자유에서 그들의 당당한 투쟁력과 협상력이 나왔다.

▲ 드라마 <직장의 신>의 주인공 '미스 김(김혜수)'은 "회사의 노예 따위는 되기 싫다"며 정규직 제안을 거절하고 자발적으로 비정규직을 선택한다. ⓒkbs.co.kr
지금 한국 노동 운동에 없는 결정적 무기가 바로 이 미묘한 균형 아닐까? '임금 인상'이든 '고용 안정'이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든 요즘 우리 노동 운동이 힘주어 외치는 구호들(물론 아주 절박한 요구들이지만)은 결국 노동자들이 자본-노동 관계에 더 깊숙이 '들어가게' 만드는 것들이다. 더 많이, 더 깊이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구할수록 주도권을 쥐는 것은 자본 쪽이다. 확대되는 것은 자본-노동 관계다. 자유는 "봉기의 창끝"(김남주의 시 '자유를 위하여')이 아니라 가진 자들의 만년필에서 빛난다.

어쩌면 1987년 그때부터 단추를 잘못 꿴 것일지 모른다. 그때부터 우리 노동 운동에는 한 세기 전 선배들의 저 미묘한 균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노동 시간 단축'은 '노동 해방'만큼이나 종이 위의 낯선 목표들 중 하나였다.

이제 노동 운동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들 한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초심이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니며,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은 그 '원점'이 도대체 어디인지다. 모르긴 해도 그것은 단지 20여 년 전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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