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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돈 냄새' 맡고 싶어? 100년 전 인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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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돈 냄새' 맡고 싶어? 100년 전 인천으로!

[프레시안 books] 김탁환의 <뱅크>

어릴 땐 무조건 어른이 부러웠다. 걸핏하면 어른의 세계를 기웃거렸고, 한 발짝이라도 어른에 가까워지려 애썼다. 나뿐 아니라 내 주변 아이들이 다 그랬다. 어린 애 같은 짓은 조롱거리였다. 입으로는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고 했지만, 당시 어른들 역시 속으론 비슷한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어른스럽다'라는 말을 칭찬으로 쓴 걸 보면 말이다.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어른 노릇은 그저 누추한 일상일 뿐이다. 이 역시 내 주변 어른들이 다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도 있다. '다시 아이로 돌아가고 싶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사람들은 가로젓는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꼭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 괴로웠던 탓에 후자의 답을 고른 이들도 많다. 그런데 어른 되기의 고통에 대해선 대체로 무심하다. 불행한 아이들, 불행한 어른들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넘쳐나는 것과 비교하면 특히 그렇다. 어떤 방황과 혼란을 거쳤건, 어른이 된 뒤에 잘 살아가기만 하면 괜찮다는 식이다. 이 역시 "결과로만 이야기하는" 우리 사회의 한 특징인 걸까.

돈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그래도 된다. 대개의 경우, 돈은 어른이 버는 것이므로 어른이 된 뒤에 멀쩡하게 일하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삶 전체를 들여다보는 걸 과제로 삼는 문학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 문학마저 '어른 되기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젊은이에게 책을 권할 명분이 없다.

인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관련 직업을 가진 적도 없는 내가 하기엔 주제넘은 말인 줄 잘 안다. 그래도 이 대목에서 꼭 묻고 싶은 말이 있다. '왜 한국엔 괜찮은 성장소설이 많지 않을까.' '어른 되기의 고통에 작가들은 왜 이토록 무심할까.'

오래 전, 권여선의 소설 <푸르른 틈새>(문학동네 펴냄)를 읽으며 밑줄을 그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 풋내기 시절, 내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한시바삐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어른이란 모름지기 정치와 성에 대해 확고부동한 입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따라서 내 수련과정에 필요한 것은 '정치 용어 사전'과 '성 용어 사전'이었다." (<푸르른 틈새> 28쪽)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 나름의 대답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결국 정치와 섹스의 세계에서 시민권을 얻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 문장을 건진 걸로 만족했는데, 애 아빠가 된 지금은 추가하고 싶은 낱말이 생겼다. 바로 '돈'이다. 돈에 눈을 뜰 때, 아이는 어른이 된다. 돈을 제대로 부릴 줄 알면, 좋은 어른이다. 돈의 노예로 살아간다면, 나쁜 어른이다. 어른의 세상에서 대개의 욕망은 돈으로 표현된다. 누군가가 돈을 어떻게 벌고, 굴리고, 쓰는지를 보면 그의 욕망의 생김새가 비친다. 돈에 대한 생각을 들으면, 그의 사상이 흐릿하게 그려진다.

소설이 그저 당의정이 아니라면, 아이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면, 작가들이 성과 정치, 그리고 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어릴 때 읽은 '세계명작' 가운데 상당수가 그랬다. 내가 어른이 돼 가는 과정은, 어릴 때 읽었던 이런 책 가운데 상당수가 사실은 성과 정치, 그리고 돈 이야기라는 걸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특히 애니메이션으로 더 익숙한 <오즈의 마법사>는 노골적인 돈 이야기인데, 그걸 처음 알았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막대한 빚을 진 자영농 입장에선 남북전쟁 이후 미국이 수출을 위해 택한 금본위제가 크게 불리했다. 그래서 그들은 금은복본위제를 원했는데, 이런 주제를 담은 소설이 <오즈의 마법사>다.

하지만 철들고 나서 읽은 국내 소설 중에선 돈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낸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늘 돈 때문에 울고 웃는 게 어른의 삶인데, 왜 소설 속 주인공들은 돈에 관해선 초능력자 아니면 백치일까. 그게 늘 답답했다.

▲ <뱅크 1-부익부 빈익빈>(김탁환 지음, 살림 펴냄). ⓒ살림
그런데 마침, '프레시안 books' 편집 팀이 서평 청탁을 했다. 소설가 김탁환의 신작 <뱅크>(1~3권, 살림 펴냄)를 읽어보라는 거다. 한국 최초의 은행인 천일은행 탄생을 소재로 삼은 소설이라고 했다. '돈 이야기'니까, 한때 경제를 담당했던 기자에게 서평을 맡긴 거다. 책을 받아 안고 기대가 컸다. 김탁환은 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호랑이의 영혼으로" 소설쓰기에 매진하는 정통 작가다. 또 늘 비슷한 형식과 문체, 혹은 소재에 갇혀 있는 많은 작가들과 달리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 왔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그의 작품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다. '2049년 서울'을 배경으로 한 SF <눈 먼 시계공>(김탁환·정재승 지음, 김한민 그림, 민음사 펴냄), 역사 추리물 '백탑파 3부작(<방각본 살인사건>,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모두 민음사 펴냄))', 드라마로 제작돼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불멸의 이순신>(황금가지 펴냄)…. 한국뿐 아니라 외국의 경우까지 살펴도, 소재와 형식 양쪽에서 이처럼 다양한 시도를 한 작가는 흔치 않을 게다. 내 경우엔 '백탑파 3부작'을 특히 재미있게 읽었다. 우리 역사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탄탄한 인문학 지식을 바탕에 둔 추리소설이 드문 탓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모두 세 권인 <뱅크>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떠오른 생각은 '텔레비전 드라마 제작을 계획하고 쓴 소설 같다'는 것이었다. 검색해보니, 실제로 드라마로 만들 계획이 있다고 한다. '드라마 같다'라는 건 여러 가지 뜻을 지닐 수 있다. 우선 묘사가 생생하다. 실제 책의 표지 안쪽에는 소설의 무대인 인천 지역 지도가 그려져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드라마 세트장과 배우의 얼굴들이 아른거렸다. 또 하나는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대사다. 꼭 요즘 유행하는 '퓨전사극'을 보는 느낌이다. 소설의 배경인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인물들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이 자본주의를 먼저 이해한 선각자들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그렇다. 예컨대 이런 대목이 그렇다.

"인향은 겐이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잰걸음으로 은행을 먼저 나섰다. 철호와 진태가 날개처럼 좌우에 붙었다. 인향이 격식을 갖춘 웃음을 지우고 어둡게 속삭였다. '너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한없이 단정한 악마, 은행의 맨얼굴을.'" (1권 174쪽)

1890년대 10대 후반 나이 아가씨가 또래 장정들과 친구로 거느리면서 은행가들을 만나고 "너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한없이 단정한 악마, 은행의 맨얼굴을"과 같은 대사를 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나만 텔레비전 드라마를 떠올린 건 아닐 게다. 배경은 옛날이지만 등장인물들은 극도로 현대적인 요즘 사극 유행과 잘 맞아 떨어진다.

여성 주인공인 '인향'이라는 캐릭터는 작가의 전작들 속에 있는 여성 주인공의 연장선 위에 있는 느낌이다. <노서아 가비>(살림 펴냄), <열녀문의 비밀> 등 앞서 나온 김탁환의 소설들에는 늘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이 나온다. 전근대, 근대 초기를 살아가지만 삶의 자세나 생각은 21세기 커리어우먼과 다르지 않은 당당하고 자유로운 여성들이다. 이들 여성들은 세계를 떠돌며 크게 한탕 하거나(<노서아 가비>), 조선 후기에 이미 시장원리를 깨우쳐서 실천에 옮긴 혁신적 경제인(<열녀문의 비밀>)이기도 했다. <뱅크>에 등장하는 '인향'은 그보다 더 나간 느낌이다. 비누회사와 운수업체를 창업한 그녀는 조선 최초의 기업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경영에 대한 태도는 요즘 경영학 교재에 나올 법한 수준이다. 경영학자들이 지난 백년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다다른 지점에 근대 최초의 기업인이 이미 가 있다? 쉽게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사랑과 일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 장철호를 포함한 남성 주인공들 역시 무척 현대적이다. 가부장적인 마초들은 21세기 서울 한복판에도 넘쳐나는데, 그런 이미지가 전혀 없다. 드라마로 만든다면 분명 꽃미남 배우가 역을 맡아야 하리라.

'드라마 같다'라는 말의 또 다른 뜻은 글과 글 사이의 인과관계가 조금 느슨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이런 대목이다. 천일은행 본점 이사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주인공 장철호가 개성 상인들에게 자자손손 보배로 전해 내려오는 대왕삼을 이용하겠다는 허락을 받기 위해 송상 회의를 소집한 대목이다.

"철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좌중의 관심이 몰렸다.
'은행을 잃으면 전부를 잃습니다. 송상이 불철주야 삼을 키우고 장사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정당하게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은행은 바로 그 돈이 모여 있는 곳이지요. (…) 송상이 돈의 샛강이라면 은행은 돈의 바다입니다. 이 은행에서 손을 뗀다면, 송상 역시 은행과 손을 잡거나 아예 은행가로 변신한 세력에게 전부를 잃을 날이 올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감히 지금이 개성지점의 작은 위기가 아니라 송상 전체의 앞날을 좌우할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새벽녘에야 회의는 끝났다.
철호의 감동적인 연설로 상황은 반전되었고 대왕삼 사용 권리를 철호에게 일임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 (3권 78~80쪽)


장철호의 연설 내용은 바로 지금 한국에서 금산분리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제조업이나 유통업으로 축적된 자본이 금융부문으로 진출할 때 생기는 문제에 대해선 다양한 논란이 있어왔다. 이제 막 은행이 생기는 단계에서 주인공 장철호는 금융과 산업 사이의 경계가 무너질 때 생기는 문제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너무나 현대적인 주인공들의 모습은 이 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특징인데, 다만 여기서 '드라마 같다'라는 느낌이 든 이유는 내용의 인과관계 때문이다. <뱅크> 도입부에서 '대왕삼'은 조선 태조가 요구해도 내놓지 않았던, 그래서 개성상인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소중한 자산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젊은 장철호가 금융과 산업의 관계에 대한 한 페이지짜리 연설을 하자, 깐깐하던 개성상인들이 대왕삼을 내놓는데 선선히 동의한다.

읽으면서 납득이 안 됐는데, '텔레비전 드라마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니 이해가 됐다. 활자매체와 달리, 영상매체에서라면 이처럼 인과관계가 좀 허술한 부분도 쉽게 넘어갈 수 있겠다 싶었다. 장철호가 연설하는 대목에서 주인공의 카리스마와 이를 경청하는 다른 등장인물들의 표정을 잘 연기한다면, 매끄럽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소설이 드라마 같다'라는 게 꼭 나쁘다고는 보지 않는다. 특히나 저자가 김탁환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가 해온 다양한 시도를 보면, 그는 현대 사회에서 소설이, 이야기가 어떻게 존재해야하는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것 같다. 조선 정조 시기의 유명한 매설가(소설가)가 등장하는 <방각본 살인사건> 등 여러 작품을 보면, 이야기꾼이 어떻게 시대와 호흡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고민이 잘 드러난다.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소설 역시 이런 고민의 산물이리라. 확실히 여기엔 장점이 있다. 술술 잘 읽힌다는 것. 앞서 언급한 약점을 덮을 만한 장점이다. 소설이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지는 요즘, 소설가에겐 중요한 목표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장점을 빠뜨렸다. 바로 소재다. 황진이, 이순신, 문체반정, 커피, 호랑이 등 온갖 소재를 종횡무진하며 이야기를 지어냈던 그가 이번에는 돈 이야기를 했다. 돈을 벌고 날리고 빼앗기고 다시 버는 과정을 거치며, 세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이야기를 세 권의 책으로 잘 담아냈다. 누구는 돈을 벌며 철이 들고, 다른 누구는 돈을 날리고 난 뒤에 철이 들고, 어떤 누구는 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도무지 철이 들 기미가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중 누군가의 모습으로 한평생 살아간다. 그런데 이런 고민거리를 다룬 소설이 드물었다. 그게 늘 아쉬웠다. 김탁환의 이번 시도가 반가웠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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