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특히 고대사 분야의 연구도 탐정 이야기나 추리물과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고대사는 근현대보다 절대적으로 부족하면서 독해하기 어려운 자료를 대상으로 삼아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실마리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연구자가 유능한 탐정이 되어야 한다.
▲ <갑골문·청동문·죽간으로 밝혀낸 유교 탄생의 비밀>(김경일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
그의 태도는 '유교'를 억울한 희생자로 만든 음모의 전모를 파헤치는 탐정의 그것과 같다고 할 만하다. 그는 '맺는 말'에서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끝부분에서 세 가지를 "학계 최초로 밝"혔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나는 그에게 '삼초(三初)' 선생이란 새로운 이름을 지어드리고자 한다.(342~343쪽) 이제부터 우리는 삼초 선생이 희생자 '유교'의 비밀을 풀어내는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자.
삼초는 유교의 실상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 기존의 연구 관행과 자신의 연구 방법을 대립적으로 제시한다. 그는 일단 어떤 자료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오해와 정해가 갈린다고 본다.
"이 책은 유교 문화의 기원 문제를 <논어> 등 경학 문헌을 주요 텍스트로 삼아 풀어내지 않았다. 대신에, 상대 갑골문과 서주, 춘추, 전국시대의 청동기 기록, 그리고 전국시대, 진대의 죽간 등 실록을 통합적·귀납적으로 다루며 살펴보았다." (15쪽)
중국의 사상 문화를 연구하려면 우리는 두 가지 유형의 자료를 읽어야 한다. 하나는 종이책 형태로 대대로 전해지는 전승 문헌이고 다른 하나는 땅속에 묻혀 있다가 우연한 계기로 발굴되어 모습을 드러내는 출토 자료이다. 삼초는 전승 문헌의 경우 사람과 상황에 의해서 변형, 왜곡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출토 문헌의 경우 한 번 땅에 묻히면 부식될 수는 있지만 변형될 수 없기 때문에 당시의 "문화를 첨삭 없이 반영하고"(6쪽) 있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삼초는 전승 문헌에 대해 불신을 보이면서 출토 문헌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것이다. 책 제목에 기존의 오경과 사서로 대표되는 전승 문헌을 말하지 않고 "갑골문·청동문·죽간으로 밝혀낸"이라며 출토 자료의 신뢰성을 내비치고 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스런 귀결이다. 이 덕분에 삼초는 스스로 무한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현재까지의 한국, 중국, 일본, 미국 등의 연구를 살펴볼 때 이제껏 시도되지 않았던 방법이다."(15쪽) 우리는 삼초 덕분에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단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최첨단 연구 방법을 만나는 엄청난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삼초가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은 "유교는 대체 어떻게 생겨났는가?"라는 탄생의 시말이다. 그는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주로 진시황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진 제국 이전, 즉 상왕조와 주왕조의 종교 문화, 상과 주의 왕조 교체 등에 주목한다.
삼초의 성과는 여러 가지이지만 자신이 가장 자랑하는 학계 최초의 세 가지 학설을 보기로 하자. 첫째, 그는 "검증된 일이 없는 역사 상식"으로서 "유교는 공자가 창시했다"(6~7쪽)라는 설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유교는 어느 한 인물, 지금까지 언급되어 왔던 공자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 유교는 마치 공기와도 같은 거대한 문화적 흐름 속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온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326쪽)
삼초는 학계 최초의 설을 입증하기 위해서 상왕조의 자연숭배, 조상숭배, 종법제도가 주왕조의 봉건제도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이러한 형성 과정에는 '공자'가 기여한 것이 없으므로 공자를 유교의 창시자로 보는 '역사 상식'은 허구가 되는 것이다.
둘째, 오늘날 인(仁)은 유교의 핵심 가치로 널리 인정받고 있지만 갑골문과 청동기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삼초는 이 비밀만으로도 독자가 커다란 충격을 받으리라고 보았다. 인은 철저하게 혈통과 제례에 바탕을 둔 종법 질서가 무너지면서 능력을 중시하는 신질서의 등장과 함께 전국 후기에서야 모습을 보이게 된다.
"전국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인(仁)은 이제껏 보이지 않던 새로운 가치관, 즉 인간의 마음이 공유하는 도덕적 가치를 행동으로 일치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당시 통치 계층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인간의 마음, 즉 내면에 주목하려는 시도는 일방적인 종법제도의 결속력이 깨어지고 새로운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인간관계의 중요성이 대두된 당시 현실의 결과물이다." (236~237쪽)
셋째, 중국 문화의 중심축인 유(儒)의 글꼴이 갑골문, 청동기, 죽간에도 보이지 않고 한대 문헌에서야 비로소 보인다. 신과 인간을 이어주고 비를 내리는 등 종교 문화의 실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없다는 점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삼초를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무(巫), 수(需), 역(亦)의 글꼴과 변화를 하나씩 검토하면서 유(儒)의 실상을 밝히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삼초는 역(亦)의 갑골문을 겨드랑이로 보는 설을 부정하고 비를 부르는 기우제를 지내다로 해석하면서 다시 수(需)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 내용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삼초의 조사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유교는 상주 왕조의 문화적 흐름에서 형성된 것이지 공자가 홀로 창시한 것이 아니게 된다. 이로써 유교사에서 공자의 지위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약화되게 된다. 그럼 누가 '유교=공자'라는 이상한 결론을 내려서 '유교'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게 되었을까? 삼초는 날조의 범인을 정확하게 지목하지 않고 '유교사관', '한대 유학자', '중화의식' 등으로 두루뭉술하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삼초는 상왕조와 주왕조 중에서 문화적으로 상이 우월하며 발달했고 주는 열등하고 미발달 단계에 있었다고 보았다. 상이 문자, 시간, 공간의 분할, 제례, 종법 등 고대 사회의 문화를 창안한 반면 주는 상의 발명품을 승계하여 잘 활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책에서 최고의 수혜자는 조갑의 상왕조이고 최대의 피해자는 공자가 된다. 공자는 유교의 창시자에서 거대한 문화적 흐름의 한 순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상왕조는 중국 문화의 기틀을 다진 종족이 되기 때문이다.(이는 삼초가 이 책에서 다루지 않지만 동이(東夷)에 관심이 많은 것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이제 삼초가 유교 탄생의 비밀을 캐는 과정에서 뭔가 놓치거나 잘못한 것은 없을지 살펴보자. 상과 주의 왕조 교체를 단절로 보는 쪽도 있고 계승으로 보는 쪽도 있다. 삼초는 계승론에 가깝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주족은 "정복자가 비정복자를 무차별 학살하는 일반적인 상황과 많이 다"르게 "상 왕실의 귀족들과 무당 등 당시 상왕실의 종교 문화적 영향력을 장악하고 있던 집단을 죽이지 않았다."(151쪽)
삼초는 '왕조 교체=학살'로 일반화시켰다가 상과 주의 교체를 예외적인 경우로 다룬다. 그는 예외적인 경우를 '복존(㚆尊)'(주 왕실이 상대의 종족에게 상을 준 서주시대의 청동기)과 '신진유(臣辰卣)'로 입증하고자 했다.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그는 다시 <좌전> 정공4년의 기사와 <설원(說苑)>에서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152~157쪽) 이는 분명 전승 문헌을 부정하고 출토 자료에서 근거를 찾겠다는 약속의 위반이다.
삼초가 늘 갑골문, 청동문, 죽간을 다 챙겨보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장반(史牆盤)'을 보았더라도 좋았을 텐데 놓치고 있다. '사장반'은 미씨(微氏) 가문의 사관 장(사장, 史牆)이 자신의 가문이 일찍이 상주 교체기에 주나라에 투항한 뒤에 봉지를 받고서 협력 관계를 유지하다가 통혼을 하는 등 을조(乙祖)에 이르러 복심(腹心)되었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삼초는 과도한 일반화, 불충실한 논증, 자료의 불철저한 검토를 했으니 사소한 단서를 놓치지 않는 탐정으로서 잘못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삼초는 상주의 종교 문화를 '유교' 형성(탄생)으로 읽어내면서 유교와 공자의 관계를 상대화시키고 있다. 필자도 후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공자가 평지돌출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자 이전의 종교 문화를 '유교'의 형성으로 읽어내는 것은 특정 대상에게 과도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고 '유교'의 의미를 과대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책을 읽고도 "유교가 어떻게 생겨났는가?"라는 물음에 일말의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유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혼란을 겪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삼초가 말한 "학계 최초라는 세 가지 주장" 중 첫 번째는 아직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학계 최초라는 세 가지 주장" 중 두 번째의 내용도 부분적으로 신정근의 <사람다움의 발견>(이학사 펴냄, 2005)에서 이미 밝혀진 사실들이다.
우리 학계에서 '나'를 주어로 해서 제 목소리를 내거나 실명을 내세우며 비판하는 경향이 약하다. 이런 측면에서 김경일 교수의 삼초 주장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오랜 연구 끝에 새로운 사실을 입증해서 학설을 내세운다면 권장해야 할 일이지 막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물 하나 지어놓고 '세계 몇 위'니 '동양 최대'라고 떠들면서 소국의 콤플렉스를 풀어내려고 한다.
깊고 깊은 학해(學海)에서 말끝마다 학계 최초이고 아직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따지고 하면 실제로 최초이지도 않지 않는가? 학자가 자긍심을 먹고 산다고 하지만 치기를 부릴 필요가 없을 듯하다. 이제 삼초가 <명탐정 코난>에서 아무리 어려운 사건도 척척 해결하는 '코난'일지 간혹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지만 좀 엉뚱한 미란의 아버지 '유명한'일지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나는 김경일 교수의 전작과 이 책에서 가독성이 높은 갑골문의 풀이를 보면서 많이 배우는 행운을 누렸다.
(110쪽의 제일 아래 형 '조갑'은 '조경'의 오타이고, 164쪽의 '예유오론(禮有五論)'은 '예유오경(禮有五經)'의 오타이고, 189쪽의 '거스리지'는 '고치지'의 잘못이고, '<논어>가 서주시대에'는 '<논어>가 춘추시대에'의 잘못이고, 222쪽의 '퇴기급인(推己及人)'은 '추기급인'의 오타이고, 264쪽의 '례기'는 '예기'의 오타이고, 265쪽과 301쪽의 '현학(懸學)'은 '현학(顯學)'의 오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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