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알고 보면 경제에 대해 백지랍니다"라고 양심 선언할 용기는 없었다. '무식이 들통 나기 전에 빨리 지식을 채워넣자' 싶었다. 결국 틈틈이 경제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얄팍한 계산은 여전했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공부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신, 일종의 요점 정리 핸드북을 찾아다녔다. '한권으로 읽는~', '쉽게 쓴~' 유의 제목을 단 책을 구해 읽기 시작했는데, 영 요령부득이었다.
처음엔 내가 무식해서, 이해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꼭 그래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책 자체가 부실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복잡한 경제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이를 위한 기초 지식을 잘 설명해주는 책은 드물다. 수요는 넘치는데, 공급은 모자라는 상황. 그러니 너도 나도 책을 낸다. '이 책 한 권만 읽으면 경제를 보는 눈이 훤히 뚫려!'
'이 약 한번만 잡숴봐, 만병통치약이야. 무슨 병이든 싹 나아버려'라고 외치는 떠돌이 약장수와 닮았다. 그러나 이런 만병통치약 잘못 먹으면, 없던 병도 생긴다. 마찬가지다. 어설프게 찍어낸 책으로 공부하면 명료했던 지식도 흐릿해진다. 특히나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이런 책이 대거 쏟아졌다. 조악한 음모론을 얼기설기 엮어서 '경제 문맹들의 눈을 뜨게 해준다'며 광고한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이런 음모론 서적 외에도 위험한 경제 입문서는 많다. 저자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그냥 '긁어다 붙이는(Copy & Paste)' 식으로 낸 책이 서점엔 흔하다. 사실 관계가 틀렸거나,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지식이 얕은 저자가 시장 경험에만 의존해서 무리한 논지를 펴는 경제 전망서도 넘쳐난다. 또 어려운 경제 이론을 쉽게 풀어쓴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이야기는 그냥 건너 뛴 것에 불과한 책도 많다. 어려운 걸 쉽게 풀어 설명하는 것과 쉬운 이야기만 하는 건 전혀 다르다.
스스로 경제 문외한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종류의 책은 안 읽는 게 좋다. 머릿속에 엉뚱한 개념이 들어서서 혼란만 생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자가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내린 결론은, 경제학과 신입생이 읽는 전공 교재였다. 조금 딱딱하지만, 기초 교재부터 차분히 읽어나가는 게 오히려 빠른 방법이다. 물론 주류 경제학 교재가 지닌 이데올로기적 편향도 있다. 그러나 이걸 경계하느라 기초 지식을 등한시 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고대의 수학자 유클리드는 "기하학을 배우는데 왕도(王道)는 없다"고 했다. 다른 모든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지름길은 없다. 어려운 내용은 어렵게 공부하는 게 옳다. 땀 흘리지 않고 돈을 벌려 하면 안 되듯, 어려운 걸 쉽게 배우려고 하면 안 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떠오르는 기억이 많았다. 예컨대 자연과학 분야에도 '어려운 걸 쉽게 알려준다'며 꼬드기는 책이 흔하다. 그런데 이런 책을 잘못 골라서 읽은 사람들 중에는 황당한 오해를 안고 지내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철학의 '상대주의'와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비슷한 개념이라고 착각하는 식이다. 저명한 학자의 글에서 이런 오해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나 역시 경제 분야에 대해 같은 방식의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겠구나'라는 반성을 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어려운 물리이론을 초보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쉽게 설명하는 능력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건 그가 진정한 천재, 진짜 고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이런 천재, 고수는 흔치 않다. 당신이 읽는 책의 저자가 리처드 파인만 수준의 천재일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는 말이다. 어려운 내용이라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 골똘히 생각하며 익혀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한 뒤로, 출판사에서 급히 기획해서 찍어낸 경제 교양서는 잘 읽지 않게 됐다. 물론 주변에 권하지도 않는다.
▲ <만화로 보는 경제학의 거의 모든 것>(마이클 굿윈 지음, 댄 E. 버 그림, 김남수 옮김, 다른 펴냄). ⓒ다른 |
거창한 제목과 달리, 불필요한 욕심이나 허세를 부리지 않는 게 이 책의 미덕이다. 가격이론이나 IS-LM 곡선처럼 경제학 입문서라면 반드시 담아야 할 내용이 이 책에는 없다. 이런 내용을 만화책 한 권으로 공부하긴 무리다. 대신 이 책은 대학의 경제학 교재를 파고들다보면 오히려 놓치기 쉬운, 그러나 꼭 알아야 할 내용에 집중한다. "자본주의 탄생에서 세계 금융 위기까지 경제는 어떻게 작동해 왔는가"라는 부제가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일종의 역사책이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약장수 경제학' 책과 달리, 논지가 일관돼 있고 내용도 알차다.
취재를 하면서 경제이론과 실물경제에 두루 정통한 전문가라고 소개받아 만났는데, 의외로 과거 역사에서 여러 차례 발생한 금융 공황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또 다른 공황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높을 때였다. 그런데 과거 공황의 역사에 대해 관심 없는 경제 전문가라니, 기자 입장에선 당황스러웠다. 수리모델에 치중하느라 경제의 역사, 경제사상의 역사에 대해선 소홀한 경제학 교육의 폐해다. 지금이 위기가 아니라면, 경제가 마치 정교한 기계처럼 움직이는 때라면, 경제사나 경제 사상에 대한 지식은 그저 장식품일 수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경제가 기계장치처럼 움직인 적은 없다. 늘 위기였거나, 아니면 위기를 잉태한 상황이었다. 경제학 커리큘럼이 기계공학 커리큘럼과 달라야 하는 이유다.
경제학 입문자에게 경제사, 경제 사상 공부를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사에 대한 입문서로서 이 책이 지닌 미덕은 '균형 감각'이다. 예컨대 저자는 (흔히 '경제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애덤 스미스에 대해 소개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국부론>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잊은 교훈이 이것이다. '자본가를 경계하라'. 이 내용은 애덤 스미스의 말 그대로 읽어보는 게 좋겠다. '자본가가 내놓은 새로운 법률이나 상업 규제안을 항상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심사숙고하고 실험한 후에 자본가의 법률이나 상업규제를 적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공공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본가들에게 농락당하고 지배될 것이다.'"
시장만능주의를 옹호하는 경제 전문가들이 애덤 스미스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그들은 도덕철학 교수였던 애덤 스미스가 "상인과 제조업자들의 비열한 약탈과 독점정신"에 대해 얼마나 분개했는지에 대해선 침묵한다. 그리고 이 책은 전문가들이 종종 저지르는 이런 왜곡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차분히 일깨워준다.
세상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독학으로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저자가 이 책의 결론에서 "핵심은 민주주의"라고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제는 결국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이며, 따라서 소수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두기엔 너무 중요한 문제라는 것. 저자는 "경제는 잘 작동되고 있을 때에도 심각한 결함이 나타났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시장에서 흔히 보는 환경 파괴, 무리한 노동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저자는 "이 결함들을 고치려면 경제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어떤 일자리를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라고 이야기 한다. 저자가 준비한 답변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이라는 것. 경제정책 당국자나 금융 실무자가 아닌 보통 시민이 자본주의 경제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경제학 비전공자인 저자가 경제사 입문서를 쓴 이유 역시 그래서다.
앞서 소개한 애덤 스미스의 경우처럼, 경제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 또는 편견 때문에 종종 왜곡해서 전하는 경제 상식은 지금처럼 불안정한 경제 상황에서 전염병 바이러스만큼이나 위험하다. 이에 대한 항체가 없는 경제학 입문자라면, 이 책은 효과 좋은 '백신' 주사가 될 수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