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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세상을 꿰뚫는 음모론, '덕후'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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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세상을 꿰뚫는 음모론, '덕후'여 단결하라!

[컬트의 제왕] 토머스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

번역본으로 <중력의 무지개>(토머스 핀천 지음, 이상국 옮김, 새물결 펴냄) 상권의 반 정도(그래도 벌써 350쪽이다)를 읽었을 때 떠오른 서평의 제목은 '토머스 핀천, 덕후들의 영웅'이었다. 숫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어느 정도 빈정거림을 담은 그 제목에는 과거에 열광했던 대상을 냉정하게 살펴봄으로써 나 자신의 성숙을 공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학부 저학년 전공 수업에서 핀천을 처음 접하고 한참을 팬으로 자처했던 나는 그의 모든 작품을 사 모았다. 당시 내 영어 실력과 교양으로는 한참 역부족이었음에도 사전을 벗 삼아 끙끙대며 어떻게든 그 작품들을 읽어내고자 애썼다. 그래서 완독한 작품이 장편소설 <브이(V)>>(1963), <제49호 품목의 경매(The Crying of Lot 49)>(1966), <바인랜드(Vineland)>(1990)와 습작 시절 단편들을 묶어 낸 <늦게 깨닫는 사람(Slow Learner)>(1984)이었다.

(적어도 당시까지는) 핀천의 최고작이라는 <중력의 무지개(Gravity's Rainbow)>(1973)는 결국 열렬한 '팬심'으로도 어찌 해 볼 수 없을 만큼 높은 벽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에 서평을 준비하면서 당장 필요치 않은 책들을 모아둔 상자에서 근 20년 전에 사둔 그 책을 꺼내 보니 극히 앞부분까지이긴 해도 손때가 묻어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한동안 <모비 딕>과 더불어 <중력의 무지개>를 새롭게 시도했다가 좌절하기를 연례행사로 반복했었던 듯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웅'

▲ <중력의 무지개>(토머스 핀천 지음, 이상국 옮김, 새물결 펴냄). ⓒ새물결

그렇듯 핀천에 몰두한 데에는 속물적인 과시욕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핀천은 한국의 학계와 지식계 전반을 강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로 소개되었고, 과연 그의 작품은 기존의 소설과는 너무나 다른 독특한 스타일을 과시하고 있었다. 각종의 고급·대중문학 장르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담론 형식이 차용·패러디되고, (핀천 소설로서는 이례적으로 짧은 <제49호 품목의 경매>(김성곤 옮김, 민음사 펴냄)를 제외한다면 대체로) 아주 느슨한 플롯에 따라 병렬적으로 배치된 다양한 질감의 에피소드들은 상호 교차·간섭하며 현기증을 자아낸다.

이런 만화경적인 효과는 백과사전적인 인용(유) 때문에 더욱 강화된다. 실로 핀천 소설의 정보량은 어마어마한데, 이를테면 소설 속 상황이 전문적인 과학 개념을 통해 묘사된다거나 네댓 번 오가는 인물들의 대화중에 클래식 음악의 두 대립적인 전통의 전개과정이 요약되는 식이다.

핀천의 스타일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 가사의 잦은 등장이다.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리겠지만 핀천 소설의 인물들은 수시로 즉흥적으로 노래를 지어 부르는데, 노래 가사는 생략되는 법이 없고 항시 들여쓰기로 강조된다. 핀천의 서명과도 같은 이런 장치는 '록큰롤러'라는 60년대 세대의 보편적인 욕망이 소설을 통해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핀천은 영화도 사랑해서 대번 슬랩스틱 영화가 연상되는 코믹한 액션 신의 묘사는 그의 장기 중 하나이다.

이런 미흡한 정리만으로도 왜 포스트-모더니즘 논자들이 (자신들이 규정한) 모더니즘의 특징, 예컨대 투명한 재현성과 미적 통일성 같은 전통적인 미학적 가치를 공격하는데 핀천을 동원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리고 <메타 픽션>의 저자 린다 허천이나 <오르페우스의 절단: 포스트모던 문학을 위하여(The Dismemberment of Orpheus: Toward a Postmodern Literature)>(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펴냄)의 저자 이합 핫산으로 대표되는 그런 논자들은 한때 학계의 패권을 차지했다.

창조적 음모론자, '덕후'들의 우상

핀천은 학계의 주목과 더불어 대중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 둘이 함께 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핀천의 경우에는 일종의 '컬트'적 인기를 누린다는 점에서, 돈 드릴로, 필립 로스, 조이스 캐롤 오츠 등 현 시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대형작가들과 구분된다. 구글에서 핀천으로 검색하면 위키피디아 말고는 죄다 팬들이 만든 트리뷰트 사이트(tribute site)가 뜬다.

핀천과 그의 작품이 이만한 헌신을 이끌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개의 팬 사이트는 핀천 소설에 담긴 인유(용)나 다방면의 지식을 정리하고 해설한다. 확실히 핀천의 소설은 탐욕스러운 지식욕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게다가 (위에서도 언급했듯) 핀천은 전통적인 교양과 동등한 비중으로 대중문화와 관련된 지식들을 활용하며, 자주 여러 분야의 표준적인 통설을 뒤집는 것을 즐긴다. 이런 면에 열광하며, 핀천 소설을 일종의 비기(秘記)로 받아들이는 독자들이 아마도 핀천의 하드-코어 팬 층을 이루고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이런 부류의 독자들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덕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폐적인 유형의 반사회적 인간형'이라는 사회병리학적 정의는 이들의 일견 무익해 보이는 추구에 담긴 지적·정서적 충동이 현재의 문명적 상황에서 배태된 것임을 간과한다. (유행하는 표현처럼 한 번 '마구 던져'보자면) 아마추어이면서도 특정 분야의 전문가적인 지식을 강박적으로 수집하고, 더 나아가 제도적인 권위에 도전하는 의견을 유포하는 행위는 좁은 영역에서라도 전체에 대한 시각을 확보함으로써 주체성(의 환상)을 유지하는 전략인 면이 있다.

자율성과 행위(agency)의 가능성이 위축되는 상황의 심화가 근대의 일반적인 경향이라면,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일수록 이런 유형의 대중이 일찍 출현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성립한다. 실제로 일본에서 건너와 한국적 현상에도 적용되는 덕후라는 용어가 쓰이기 한참 전 미국에서는 마니아 내지는 버프(buff)라는 말로 이들 비주류 대중을 지칭했다. (이즈음 한국에서 '(서)양덕(후)'으로 불리는) 이 덕후들의 선조 또한 자신들을 문제시하는 호명을 오히려 영예로 받아들여 비주류성에 대한 표식으로 삼았다.

상황이 대략 이러하다면 핀천 문학이 한국에서도 대중적으로 수용될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핀천의 음모론적 상상력도 이제는 아주 해괴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공산이 크다. '나꼼수' 덕분에 체제의 운영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을 의심하는 태도가 확산되고 있으며, 주류 역사가 억압한 사실을 발굴하는 동시에 역사의 전개를 꿰뚫는 이면의 핵심 동인을 중심으로 사실들을 재평가·재배치하려는 시도가 덜 경멸당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핀천은 가장 일찍 음모론적인 플롯을 문학에 도입한 작가군에 속한다. 물론 핀천이 음모론을 다루는 방식은 상당히 자의식적이어서, 사실들을 다 꿰어줄 최종적인 계시는 유보되거나(<제49호 품목의 경매>) 음모론에 몰두하는 동기를 스스로 분석하고 조롱하는 인물을 등장시킨다.(<브이>) 그렇지만 핀천이 음모론의 쾌락을 전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핀천은 60년대 세대의 정치적 감수성에 공명하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스스로 창조해낸다.

<브이>에서는 V자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정체가 모호한 인물을 추적하면서 유럽 제국주의의 전개과정에서 결정적인 순간들을 공식 역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재현하고, <제49호 품목의 경매>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엘리자베스 조의 한 극작품을 주된 단서로 삼아 유럽에서 건너온 미국의 지하 우편 시스템의 존재를 탐색하는 좀 더 본격적인 음모론적 플롯을 선보인다.

핀천은 이 작품들에서 덕후적인 지식 추구를 창조적인 음모론으로 가공하는 법을 시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극단적인 자폐적 유형을 제외한다면 덕후 짓은 박탈당한 주체성에 대한 인식적인 차원에서의 자기 보상적 노력이라고 가정해 보았다. 그렇다면 덕후는 음모론자로 진화할 계기를 품고 있는 게 된다. 평범하되 지적인 호기심 때문에 '시스템'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세계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로 부상하게 되는, 대중문화의 아주 흔한 음모론 서사가 그 과정을 극화한다. 위에 언급한 핀천의 초기작들은 이런 노골적인 판타지와는 거리를 두지만 역시 일체의 공식적인 것에 대한 강한 회의를 드러내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진실의 존재를 시사한다.

낭만적인 패배자의 초상

특정한 유형의 독자들에게 각별한 호소력을 발휘하는 핀천 문학의 새로운 면모에 대해서 설명해 보았는데, 60년대적인 감수성과 접속한 그런 '힙'한 기법들은 선점효과에 의해 과대평가된 면이 있지 않나 싶다. 또 핀천에 대한 대중적 열광은 상당한 정도로 일종의 구루(guru)로서의 지적 권위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는 것인데, 어느 글에선가 핀천은 자신도 엔트로피 이론의 전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밝히면서 자신의 과학적 지식에 경외감을 표하는 독자와 이론가들의 반응에 당혹감을 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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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9호 품목의 경매>(토머스 핀천 지음, 김성곤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핀천 문학의 뿌리라 할 습작기의 단편들을 보면 어쩌면 핀천은 몹시 감상적인 작가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내 경우에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그의 작품을 즐길 수 있었다. 소설은 결국 어떤 '인물'에 관한 이야기일 것인데, (역시 <제49호 품목의 경매>를 제외하면) 그의 모든 소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 유형이 있다. 그들은 평범하다 못해 별 볼일 없는 남자들로서, 제대군인인 경우가 많고 사회적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일종의 인물 스케치인 초기 단편에서는 이 인물들에게 막연하게나마 실존주의적 분위기라도 부여되었다면, 장편에서부터 이 인물들은 몇 가지 단순한 충동으로 규정되면서 더욱 수동적이고 평면적으로 변모한다.

핀천은 이 인물들을 데리고 어떤 상황을 연출하는가? 그들은 주로 술을 마시고 시끌벅적한 소동을 벌이면서 돌아다닌다. 그 와중에 별난 인물들이 그들 주변으로 모여들면서 별난 행동과 대화로 독자들을 관심을 붙들어 둔다. 그렇다고 이 루저 캐릭터들이 기능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핀천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 인물들을 통해 어떤 윤리적 태도를 암시하려는 듯하다. 크게 보면 핀천의 주인공들은 립 반 윙클(Rip Van Winkle)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명과 불화하는 미국문학의 전형적인 남성인물들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문학적 선조들처럼 문명을 벗어날 가능성이 없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모험의 기회는 도시의 주변부를 배회하며 소극(笑劇)을 벌이는 게 다이다. 이들이 의식적으로 사회적 성공에 저항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태생적인 무능력자로 제시되지만, 국외자의 무욕·무심과 그 투명성으로 말미암아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20대 초반의 나는 이 인물들이 발휘하는 이런 낭만적인 아우라에 몹시 끌렸던 것 같다. 그러나 곧 그런 인물과의 동일시가 삶에서 당연한 긴장과 갈등을 회피하면서도 스스로를 윤리적인 존재로 상상하는 판타지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핀천에 대한 관심은 차츰 시들었고, 언젠가부터는 과거의 미숙한 모습을 추억할 때나 언급하는 한 때의 것으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60년대의 가장 장엄한 장송곡

<중력의 무지개> 서평을 의뢰받았을 때의 생각을 떠올려 보면 지배적인 평판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인 외국 문학 수용을 주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이었다. 위에서 쓴 대로 이런 비판적인 태도는 소설의 초반부를 읽을 때까지는 유지되었다.

이 작품은 앞서 언급했던 초기작 두 편의 주된 모티브를 변주하고 있었다. 주인공 슬로스롭(Slothrop)은 <브이>에 등장하는 프로페인(Profane)처럼 이름값 하느라 어지간히 정신 사나운 인물이지만, 독자의 호감을 사는 루저 유형의 현역 군인이다. 이 인물 주위로 온갖 해괴한 인물들을 불러들이는 방식은 핀천이 <제49호 품목의 경매>를 쓰면서 시도한 긴밀하게 조직된 음모론이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이 작품의 음모론적 플롯을 작동시키는 기상천외한 설정을 자세히 밝히지는 않겠지만, 슬로스롭은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감시와 추적을 따돌리며 자신과 관련된 비밀을 찾아 나서게 된다.

핵심적인 플롯의 구조는 영화 '제이슨 본 시리즈'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분명 늘어난 부피만큼이나 무르익은 작가적 역량은 더 큰 예술적 야심을 추구하는 듯 느껴졌다. 이 소설은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역사의 진정한 결정인자가 새로운 기술의 도입을 통한 기업의 이윤 추구라는 역사관을 제시한다. 심지어 세계사적인 사건인 제2차 세계대전마저도 그 과정을 촉진시키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대담한 음모론이다.

어느 정도 성격을 부여받은 인물만 200명 넘게 등장하며, 그들 간의 관련성은 쉽게 예상키 어려운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매 페이지를 인상적인 내용으로 꽉꽉 채우겠다는 의지가 너무 두드러져, T. S. 엘리어트의 경우처럼 핀천 또한 절제의 미덕을 강제해줄 에즈라 파운드 같은 멘토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이 화자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앞서 쓴 대로 핀천의 주인공들은 평면적이기에 여타 소설들에 비해서 화자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 분명 이 점은 소설에서 발휘되어야 할 예술적 지성에 제약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화자가 인물을 압도하게 되면 인물 상호간의, 그리고 그들이 대변하는 입장과 가치간의 극화를 통해 탐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을 공산이 크다. 달리 말하면 이 소설은 충분히 '대화적'이지 못하다. 소설을 더 읽어 나가면서 이런 혐의가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이 소설에 압도되고 말았다.

결말에 다가갈수록 <중력의 무지개>가 제공하는 예술적 체험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슬로스롭이 자신이 비밀을 찾기 위해 도착한 '영역'(zone)은 구체적인 역사적 공간에서 초현실적인 상징적 공간으로 변화한다. 슬로스롭과 함께 그곳에서 '대항세력'(counterforce)을 이루는 다채로운 무정부주의자 무리들은 그곳이 다시 역사로 포섭되는 것을 막기 위해 투쟁한다. 이 소설 전체가 논증하는 역사의 향방은 인간적인 것의 소멸이고, 그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따라서 '대항세력'의 투쟁은 비극적인 것이 된다. 기업이라는 파괴적 원리의 관철로 요약될 그 비극적 역사의 줄거리는 우연히 인위적인 수명을 부여받지 않아 영원히 꺼지지 않게 된 전구 바이런의 이야기가 잘 요약해 준다.

언젠가 그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래도 여전히 전과 마찬가지로 무기력할 것이다. 세계의 모든 전구들을 조직하겠다던 젊은 날의 꿈은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 예언자들은 전통적으로 오래 가지 못한다. (…) 그러나 바이런에게 도래한 운명은 그보다도 더한 것이었다. 그는 진실을 알면서도 아무 것도 바꿀 힘을 갖지 못한 채 영원히 지속할 수밖에 없는 저주받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더 이상 그는 바퀴에서 벗어날 길을 찾지 않을 것이다. 그의 분노와 좌절은 한없이 자라날 것이고, 그는 자기 자신이 그걸, 불쌍한 변태 전구 같으니, 즐긴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1184쪽)

이 작품은 로켓이 중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추락하고 마는, 장엄한 종말적 광경으로 그 비극을 애도하면서 마지막 순간에 시간을 정지하면서 희망의 싹을 보존한다.

시간을 돌릴 수 있는 손이 있네./ 오늘은 시간이 네 모래시계를 타고 흘러내린다 해도,
탑들을 굴복시키는 빛이 올 때까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신이 버린 불쌍한 자를 찾으라 …
우리의 망가진 영역 전체에,/ 길가마다 기수들이 잠들 때까지
모든 산등성이마다 얼굴이,/ 그리도 모든 돌멩이마다 영혼이…


<중력의 무지개>는 <지옥의 묵시록>과 더불어 '60년대'의 실패에 대한 가장 장엄한 장송곡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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