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을 왜 샀나요? 사놓고 내버려 둔 이유는요? '프레시안 books'는 '사놓고 읽지 않은(못한) 책'이란 주제로 열두 명의 필자에게 글을 청했습니다. 책등만 닳도록 봐 온 책에 대한 필자들의 추억과 항변은 각각의 '자서전'이나 '독서론'이 되었습니다. 읽은 책에 대한 서평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 말하는 법'이 더 흥미로운 까닭입니다. |
나는 부자다, 라고 하면 의아해 할 사람이 많을 터이다. 책 읽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부자일 리 없으니 말이다. 맞는 말이다. 내가 부자라니, 턱도 없는 말이다. 딸내미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적에 아비 가슴에 못 받는 소리를 한마디 했다. 우리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어, 라고. 그럼에도 기죽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괜한 말이라 핀잔 듣겠지만, 나는 책 부자여서다. 있어도 너무 많다. 악몽을 꾸면, 서가에서 책이 무너지는 장면을 꿀 정도다. 그래서 행복하다. 책 좋아하는 놈이 책에 묻히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무에 있겠는가.
그런데 식구들은 행복하지 않다. 내가 정한 가훈은 비교하지 마라, 이다. 그런데 안사람이 정한 비공식 가훈은 가족 눈에 책 좀 보이게 하지 마라, 이다. 아파트를 버리고 단독주택으로 옮겼고, 수년 만에 전세 든 방을 빼 서가를 늘렸지만, 책은 차고 넘친다. 이제는 어떻게 주체하지 못할 정도다. 마음에 늘 부담 되는 일은, 잘 아는 출판사 창고에 책을 옮겨놓은 것이다. 다시 가져와야 하는데, 놓을 자리가 없다. 서둘러 정리해 주어야 하는데 대안이 없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하다.
사람들이 묻는다. 한 주, 또는 한 달에 몇 권이나 읽느냐고. 처음에는 일일이 답변해주었다. 그러다 말하면 안 되겠다 싶었다. 책 읽는 일을 업으로 삼으니, 일반인들보다는 훨씬 많이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상에 쫒기는 분들 앞에서 책 많이 읽노라 자랑스레 떠벌이는 게 송구스러웠다. 거기다, 가만히 곱씹어 보니 책벌레라 나부대는 것에 비해서는 그리 많이 읽지도 않는 듯싶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답변하지 않기로.
생각해보니, 나는 읽은 책보다 안 읽는 책이 더 많았다. 직업이다 보니 기증받는 책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책 욕심 많아 다른 자리에서도 기회 있으면 냉큼 받아온다. 서점에 나가면 한가득 새 책을 사온다. 욕심 부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절제를 못한다. 최근에는 그나마 나아진 편인데도 메고 다니는 배낭은 늘 무겁다. 아직 멀었다는 증거다. 읽지도 못하면서도 왜 나는 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까. 잘난 척하고 싶어서? 집으로 누군가를 초대하는 적이 거의 없는지라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더욱이 서가를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지라 누군가에게 보일만하지도 않다. 일전에 서가를 취재하겠다고 하는 것을 거절한 이유다. 나한테 서재는 책 보관 창고 일뿐이다.
그러니, 내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은 결국은 안 읽은 책들이다. 읽은 책들로 서가를 채우더라도 안 읽은 책은 무수히 늘어난다. 두꺼운 책, 어렵기로 소문난 책, 여러 권인 책, 읽다가 중도에 만 책 등이 당당히 꽂혀 있다. 그래도 나는 그 책들을 버리지 못한다. 그저 시간이 나면 꺼내어 쓰다듬어 볼 뿐이다.
▲ <자본>(카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길 펴냄). ⓒ길 |
안 읽은 책이 수두룩한 일을 무에 자랑이라 떠벌일까? 어릴 적 버스 타고 가면서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아직도 잊지 않는 말이 있다. 책 두 번 읽을 수 있다 생각하지 마라. 읽다가 어려우면 다시 읽겠다 하지만 다시 읽는 일이 거의 없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으면서 나중에 다시 읽어 잘 알아보겠다 마음먹지 말라 했다.
살아보니, 정말 그랬다. 두 번 읽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렵다는 점을 경험했으니. 나이 들어 읽은 글에 자기 서가에 꽂힌 책의 20퍼센트만 읽어도 다독가라는 말이 있었다. 옳거니! 맞는 말이다. 히말라야를 목표로 두고 가다 중도에 포기하더라도, 북한산 다 오른 것보다 훨씬 높은 이치다. 아마도 이 말을 나는 신봉하는 모양이다. 비록 못 읽고 있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읽으려 애쓰는 법이라고.
책 부지런히 읽기 위해 무던히 애써 왔다. 노안이 들어 다초점렌즈로 바꿨지만 집에서 책 읽을 때는 돋보기를 낀다. 서재에 한 권, 거실에 한 권, 침실에 한 권, 화장실에 한 권, 연구실에 한 권씩 두고 읽으면서 배낭에는 세 권 정도를 넣어 다닌다. 한동안 아예 술을 끊은 적도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 방식으로 읽어야 할 책을 책상에 쌓아놓고 스스로 압박한다. 책벌레로서 할 만큼은 한듯한데, 그래도 안 읽은 책은 자꾸 늘어간다. 가끔 미치겠네, 라고 혼잣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마침내 읽어 제치고 싶은 책이 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임석진 옮김, 한길사 펴냄)과 마르크스의 <자본>(강신준 옮김, 길 펴냄). 어찌 된 일인지 <정신현상학>만 읽으면 정신을 잃어버리는 기묘한 현상이 벌어진다. 인터넷 강의도 보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젊은 날 조악한 일본 책 번역본을 읽으며 알아가던 헤겔이었다. 이 나이쯤 되면 스스로 이해해야 하는 법이거늘, 아직도 헤매고 있다. 아직 멀었다는 증거다.
읽고 도전하면 도움 될 책도 틈틈이 준비했다. 벼르고 있다. 정신 잃는 현상 없이 마침내 그 책을 읽어보겠노라고. 삶은 그러지 못하면서도 의식만은 진보성을 잃지 않았다 하는데, 새로 나온 <자본> 번역본을 완독하지 못했다. 고전은 본디 제목만 알고 안 읽는 거라 하지만 그래도 <자본>만큼은 완독하고 싶다. 이론과실천 판본을 읽으면서 가치라는 용어가 다양하게 쓰여 곤혹스러워하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젊은 날의 패기를 되살리고 싶은 게다.
이제 책벌레를 만나면 몇 권이나 읽느냐고 묻지 말고, 있는 책 가운데 얼마나 못 읽느냐고 물어보기를. 절대 결례가 아니다. 책에 살고 책에 죽을 책벌레를 이해하는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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