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편지를 쓰리라곤 생각한 적 없기에 '에드워드 사이드에게'라고 쓰면서도 어쩐지 어색하네요. 당신의 대표작인 <오리엔탈리즘>을 읽다가 난해한 복문과 방대한 분량에 치여 중도에 책장을 덮은 것이 두 번. 그 뒤로 당신은 내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고전의 저자로 남았습니다. 아마 올 가을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영원히 그런 채로, 내 자신의 삶과는 어떤 구체적인 접점도 갖지 못한 막연한 경의의 대상으로 당신을 신비화한 채 잊었을 겁니다.
네, 영화입니다. 나를 당신에게로 이끈 것은. 필독의 그늘에 가려 보지 못한 당신을 처음으로 대면한 건 당신이 잠깐 잠깐 모습을 드러낸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라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 당신이 이스라엘 출신 음악가 다니엘 바렌보임과 의기투합해 만든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여정을 담은 그 영화를 보며, 나는 고전의 저자가 아니라 현실의 지식인인 당신을 느낄 수 있었고 부끄러웠습니다. 그토록 열심이었던 당신에게 무심하고 무지했던 것도, 걸핏하면 현실을 핑계하며 글의 힘과 책임을 부인했던 것도 민망하기만 했지요. 당신의 생애 내내 패배를 거듭했던 조국 팔레스타인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무릎 꿇은 적도 없다는 걸 떠올리니 더욱 그렇더군요.
▲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교보문고 펴냄). ⓒ교보문고 |
무엇보다 나를 당신에게 이끈 것은,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엉뚱한 자리에 잘못 놓여 있다는 느낌"(<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 15쪽) 속에서 아랍계 성 사이드와 영국 왕자의 이름인 에드워드가 어색하게 조합된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이름을 불편해하며 살았다는 당신의 고백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뭇사람들이 선망하는 교육을 받고 세계적인 학자이자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명성을 떨친 당신이기에 강한 자기 확신과 뚜렷한 정체성을 가졌으려니 생각했던 나로선 좀 뜻밖이었지요.
하지만 자서전을 통해, 아랍인 '사이드'가 아니라 서양인 '에드워드'로 키우려는 부모 때문에 어릴 적부터 영국계 학교를 다니며 "넌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는 사정을 알고 나니 당신이 겪었을 혼란과 불안이 짐작되더군요. 고백하자면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저 역시 비슷한 불안에 시달린 기억이 있습니다. "네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서울에서 태어난 내 출신과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부모님의 출신 사이에서 머뭇거리곤 했던 기억. 지금도 그런 이들이 없지 않지만 제가 어린 시절엔 전라도 출신이라면 일단 흰 눈으로 보는 분위기였거든요. '서울 사람'인 제 앞에서 전라도 사람은 음흉하니 조심하라고 충고해준 친구들도 여럿 있었지요. 권력이 조장하고 사회가 승인한 차별의 부당함을 절감하면서도 저는 그때마다 침묵으로 차별에 순응했습니다. 그런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끼고 그런 사회에 억울해하면서도 그저 스스로에 대한 불만과 불안을 키웠을 뿐이지요.
당신의 자서전을 읽는데 그때 그 마음이 떠오르더군요. 겉보기엔 많은 걸 가진 듯싶지만 언제 어디서나 아웃사이더인 자신을 의식했다는 당신을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미국 국적을 가진 팔레스타인인으로, 영어와 아랍어를 함께 쓴 어머니로 인해 모국어를 잃은 아이로, 아랍 사회에선 소수파인 기독교도로,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카이로에서 영미계 학교를 다닌 아랍인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소외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겠지요. 더구나 당신이 열두 살 때인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망명자가 되었고 당신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이집트와 레바논, 미국 등지에서 추방자의 삶을 살아야 했으니 말입니다.
물론 자식을 미국인으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외국인 학교에 부정 입학까지 시키는 일부 한국인들에게는 추방당한 당신의 삶이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일지 모릅니다. 저도 한때는 전쟁과 독재로 얼룩진 이 땅을 떠나고 싶었으니까요. 그래서 아버지께 왜 이민을 가지 않느냐고 따지듯 물었더니 남의 나라에서 사는 건 비참한 일이다, 딱 그 한마디를 하시더군요. 일제 치하에서 태어나 식민지인으로 20여 년을 살았던 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고서야 나라를 잃고 지배당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았습니다. 당신이 말했듯, "나라와 도시와 거주지와 언어와 환경에서 수없이 추방당한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음을 알았지요.
그런데 당신은 고통스러운 그 추방을 원했다고 말합니다. "떠나온 곳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은밀하고 근원적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떠날 기회를 만들어 자발적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고요. 출생지로부터 반경 20킬로미터 이내에서 평생을 산 저 같은 붙박이 인생에겐 놀라운 일이지요. "여행의 시름"에 시달리면서도, "어떤 경우든 '떠남'은 곧 버림받음"인 줄을 알면서도, "제 자리에서 벗어나 유랑하는 것, 집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 484쪽)고 말하는 당신이 그래서 나는 놀랍기만 합니다.
더욱이 당신은 홀로 걸림 없는 자유를 누리려고 유랑의 삶을 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향에서 쫓겨나 모국어 없이 살았던 당신은 누구보다 유랑의 불안을 잘 알았습니다. "우산 밖에 서서" "망명자의 과거는 소멸"(<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231쪽)되는 현실을 지켜봐야 했던 당신에게 '떠남'은 자유이기 전에 뿌리 뽑힘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당신은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라는 개념,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정체성"을 버리고, 제자리에서 벗어나 중심도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한 줄기 흐름"(<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 486쪽)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다른 것들을 흐르게 하는 도구"로서 다른 사람을 품어 상대방이 되기도 하는 열린 존재이며, 그런 인간이 추구하는 역사는 하나의 중심, 원리, 정체성으로 수렴되지 않는 "많은 가능성들의 장소"(<펜과 칼>, 51, 89쪽)라고 말했지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다양한 타자를 '동양'으로 배제하고 '서양' 중심을 설파한 오리엔탈리즘에 분노하는 만큼, 당신이 민족 독립을 내세워 배타적 이데올로기를 주장하고 독재를 합리화하는 저항 운동 내부의 본질주의에 분노하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당신은 누구보다 강하게 제국주의를 비판했지만, 반제국주의가 곧 해방은 아니며 민족주의도 제국주의를 계승한 담론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팔레스타인의 절멸을 꿈꾸는 이스라엘의 시온주의를 비판하면서도, "팔레스타인의 테러 행위가 잘못된 해방 전략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한 최초의 저명한 아랍 지식인"(<펜과 칼>, 151쪽)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양쪽의 비난을 사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지만 당신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문화와 민족과 사회 집단 사이를 횡단하는, 더욱 거대하고 더욱 관용적인 인간 공동체"(<문화와 제국주의>, 423쪽)를 이루기 위해선 경계를 넘어 흐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었으니까요. 당신이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직접 보여준 '대위법적 독서' 또한 그런 노력의 하나였지요. "텍스트를 읽을 때 시야를 넓혀 텍스트로부터 강제로 배제된 것"(<문화와 제국주의>, 156쪽)까지 읽는 독서, "많은 목소리들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역사를 구성하는"(<펜과 칼>, 62쪽) 대위법적 독서를 통해, 당신은 하나의 진리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불완전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읽으려 했습니다.
책을 읽는 자로서 그간의 내 독서를 생각합니다. 텍스트에서 배제된 것은 고사하고 텍스트에 명시된 것조차 굴절된 시선 때문에 곡해하지는 않았는지, 책의 권위와 전문화의 유혹에 빠져 "긴급한 의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할수록 낯이 뜨거워집니다. 백혈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죽는 날까지 "지식인으로서 계속 밀어 붙였"던 당신을 떠올리니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이런 나도 봐줄 것 같습니다. 삶도 역사도 앞으로만 흐르는 건 아니라 했던 당신이니 좌충우돌 더듬거리는 나도 참고 기다려 주리라, 나는 그리 믿고 천천히 흐르렵니다. 언젠가 당신이 닿은 그곳에 나도 닿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부디 그날까지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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