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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5년은 지옥? 그럼, 12월 19일 천국이 도래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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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MB 5년은 지옥? 그럼, 12월 19일 천국이 도래하나?!

[절망의 인문학] 인문학, 지옥에 가다

인문학의 시대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자본가부터 거리의 노숙인까지 '인문학'을 말합니다. 유명 대학에서는 대기업 임원 등을 타깃으로 한 '인문학 코스'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예전에 테일러를 추종하며 드러커를 읽던 재벌 회장은 이제는 공자, 노자를 읽고 헤겔, 마르크스를 인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의 인문학'이 아닌 '절망의 인문학'을 외치는 인문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이 절망의 시대에 인문학을 말할 수 있는가?" 이들은 섣부르게 '희망'을 말하기 전에, 지금 여기 절망의 세상에 시선을 돌리고자 합니다. 이런 절망을 제대로 직시할 때 비로소 거짓이 아닌 진짜 희망의 몸짓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은 지금 여기에서 인문학의 존재 조건을 묻는 이들과 '절망의 인문학' 연재를 시작합니다. 계속되는 불온한 질문에 인문학자의 치열한 답변이 이어집니다. 열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지옥은 무엇입니까?" 종교학자 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 답합니다.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세상이 바로 지옥 아닙니까?" <편집자>

① 첫 번째 질문 :
미스터 잡스, 이제 그만하면 됐거든요!
② 두 번째 질문 : 안철수는 과연 인문학적 정치인인가?
③ 세 번째 질문 : 대하소설은 여전히 가능한가?
④ 네 번째 질문 : 현대 동양 철학은 가능한가?
⑤ 다섯 번째 질문 : 문학 비평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⑥ 여섯 번째 질문 : 인문학 스타 사도 바울의 정체는?
⑦ 일곱 번째 질문 : 인문학을 파는 사기꾼을 고발한다!
⑧ 여덟 번째 질문 : 사회과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⑨ 아홉 번째 질문 : 심리학은 뇌 과학에 자리를 내어 주는가?

지옥에 가서 벌을 적게 받으려다가 가장 혹독한 벌을 받게 되었다거나, 여러 나라 사람들의 나쁜 점만 골라 조합한다면 그게 바로 지옥이라는 내용의 유머는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에 관한 것도 빠지지 않는다. 그 중 하나는 나라와 남녀 별로 줄을 서서 염라대왕 앞에서 판결을 받는데, 도무지 줄어들지 않은 줄이 하나 있어 봤더니, 바로 한국 여자의 줄이라는 이야기. 염라대왕 앞에 출두한 여자 얼굴이 태어났을 때와 하도 달라져서 염라대왕이 얼굴 확인에 애를 먹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 이래서 성형 수술의 나라, 한국은 지옥에도 이름을 널리 알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양한 지옥 코스 가운데 또 하나의 긴 줄. 그건 바로 한국 남자가 서있는 줄이다. 뜨거운 열탕에 들어가서 도무지 나오려고 하지 않는 한국 남자들 때문에 지옥의 절차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한국의 목욕 문화는 또 다시 유명해진다.

지옥의 두 가지 경계선

지옥은 천국과 짝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은 죽음 이후의 세상으로서 죽음 이전의 세상과 역시 짝을 이룬다.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은 서로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완전히 같거나 다르다면 짝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옥은 천국과 비슷한 점이 있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지옥은 죽음 이전의 세상, 즉 산 자들의 세상과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지옥의 경계선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삶과 죽음을 나누는 선(線)이고, 다른 하나는 천국과 구별하는 선이다.

앞에서 언급한 유머를 듣고,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지옥의 두 가지 경계선을 넘을 경우에 우리가 기대하던 이질성을 여지없이 허물어 버렸기 때문이다.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 저 세상에 갔다고 하면, 우리는 이 세상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한다. 하지만 한국의 여인네들은 지옥에 가서도 이승과의 끈질긴 연결을 드러내며, 염라대왕을 당황케 만들고 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은 끔찍한 형벌을 당하는 곳이다. 그러나 한국의 남정네들은 고통은커녕 열탕을 즐기고 있다. 즐기는 자 앞에서는 당할 자, 아무도 없다. 한국의 여(女), 남(男)은 지옥에 가서, 함께 힘을 합쳐 지옥을 교란시키고 있다. 이 기세라면 지옥이 뒤집혀서, 우리가 생각하는 상투적인 지옥이 아니라, 다른 곳이 될지도 모른다.

지옥과 천국의 이분법

지옥과 천국은 짝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삶 이후에 전개된다고 하는 지옥과 천국은 상반된 가치와 이미지를 지닌다. 지상을 기준으로 지옥은 땅 아래, 천국은 땅 위의 하늘에 위치하며, 지옥은 어둡고, 천국은 밝다. 또한 지옥이 고통이 가득한 곳인 반면, 천국은 기쁨과 행복이 넘쳐흐르는 곳이다.

어떤 절차와 기준에 의해 지옥에 이런 부정적인 가치가 배당된 것일까? 그것은 저 세상에 관한 생각과 함께 망자(亡者)에 대한 심판의 개념이 만들어지면서 시작된 것이다. 사후 심판에 대해 가장 오래된 문헌은 지금부터 약 4000년 전에 기록된 이집트의 <사자(死者)의 서(書)>다. 이에 따르면, 망자는 태양신 라(Ra)의 배를 타고 오시리스(Osiris) 신이 다스리는 곳에 도착하여, 재칼의 머리 모습을 한 아누비스(Anubis) 앞으로 인도된다.

▲ 암미트. ⓒwikipedia.org
아누비스는 오시리스 신이 보는 앞에서 저울의 한쪽 접시에 망자의 심장을 올려놓고, 반대쪽 접시 위에는 진실의 여신 마아트(Maat)의 머리 장식 깃털 하나를 올려놓는다. 심장의 무게가 무거워 저울이 아래로 내려가면, 살아있을 때 죄를 지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곧바로 저울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암미트(Ammit)의 먹이가 된다. 암미트는 머리는 악어, 위쪽 몸통은 사자, 그리고 아래쪽 몸통은 하마 모습을 한 암컷 괴물이다. 암미트가 망자를 삼켜버리면 망자의 여행은 끝이 난다. 반면 심장의 무게가 깃털보다 가볍게 판명된 망자는 갈대밭이라는 의미의 천국 아아루(Aaru)에 가서, 불멸(不滅)을 얻기 위한 여행을 계속한다.

이집트의 심판 이야기에서 지옥은 바로 괴물 암미트의 뱃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지옥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다. 심판의 과정이 보다 자세해지고, 선악의 가치가 뚜렷하게 강조되는 것은 기원전 5세기경부터 문헌에 등장하는 조로아스터교 전통이다. 조로아스터교는 빛과 어둠, 선과 악의 철저한 이분법적 관점, 선신과 악신 사이의 종말론적 싸움, 그리고 불의 정화(淨化)를 숭배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기독교의 사탄 신앙과 종말론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살았을 때 행한 선행과 악행이 각각 저축한 것과 부채(負債)로서 계산되어 대차대조표처럼 계산된다. 흑자를 낸 망자는 천국으로 안내되고, 적자를 낸 이는 지옥에 떨어진다. 이들은 3000년 동안 계속된 선신(善神)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와 악신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 혹은 Ahriman) 사이의 싸움이 결판 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결국 아후라 마즈다가 승리하고, 그 신을 대리하여 세상을 완전하고, 불사의 곳으로 만들기 위해 구세주가 등장한다.

그 구세주는 예언자 조로아스터(Zoroaster 혹은 Zarathustra)의 씨를 받아 동정녀가 낳았으며, 사오쉬안트(Saoshyant) 혹은 소쉬안스(Soshyans)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선신을 대리하여 천국과 지옥에서 머물던 망자를 모두 일어나게 하여 최후의 심판을 내린다. 구원받은 이의 육신은 부활되고, 영혼은 정화되어 선한 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불사의 존재가 된다. 지옥은 불에 타서 완전히 사라지며,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는 서로 낮거나 높아져서 평평하게 되고, 하늘과 땅이 만나, 새 하늘 새 땅이 펼쳐진다.

조로아스터교가 아브라함의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 끼친 영향은 슬쩍 보기만 하여도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다. 기독교의 지옥 관념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마태복음>에는 임박한 종말론과 함께 사후 심판에 관한 언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거기에서 불구덩이 지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살아있을 때 악행을 일삼은 자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영원한 형벌이 구원을 받은 자가 누리는 영원한 생명과 대조되면서, 지옥의 불길 속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독사의 족속"이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일단 지옥에 떨어지면 아무리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이미 저주를 받아 사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사탄은 신에게 대항할 정도의 위력을 가지지 못했으나, <신약>에서는 신과 감히 맞설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등장한다. 적그리스도(Antichrist)가 나타나는 것도 사탄의 이런 위력에 힘입은 것이다.

초기 기독교 당시는 세상의 종말이 곧 닥쳐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인의 종말과 최후 심판의 시기에 간격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최후 심판의 날이 점차 연기되면서, 개인의 사후 심판과 최후 심판 사이에 시간적 거리감이 생기게 되었다. 사후 심판으로 지옥의 형벌을 받은 자가 최후 심판에서 어떤 상태에 있게 되느냐의 문제도 이런 맥락 속에서 나타났다. 주류의 관점은 한번 지옥에 떨어지면 영구히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이었지만, 오리게네스(Origen, 185~254년)처럼 지옥의 형벌은 신과 최후의 화해가 이루어질 때까지 잠정적 일뿐이라는 소수파의 견해도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지옥을 영구적인 형벌의 장소라고 확인하고, 종부(終傅)성사 없이 죽으면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하지만 지고 지선한 신의 이미지와 영원한 저주라는 것이 서로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논란이 벌어졌다. 이 문제는 13세기 연옥(煉獄)의 개념이 두드러지게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지옥"(地獄)이라는 말은 산스크리어의 '나라카(Naraka, 奈落)' 개념이 인도에서 중국 문화로 들어가 불교 용어로 정착된 것으로, 해탈을 할 때까지 생명을 가진 뭇 존재가 계속 돌아야 하는 여섯 가지 영역 가운데 하나다. "육도(六道) 윤회"라는 말은 바로 중생이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여섯 영역을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지옥은 가장 고통스러운 곳이기는 해도,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다음의 윤회까지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이다.

그리고 중생의 순환은 살아있을 때,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자동적으로 결정되어 그 결과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여기에 심판은 등장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10세기 이후의 당(唐)나라에서 시왕 신앙이 성행하게 되면서 사후 심판의 개념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시왕(十王) 신앙은 사람이 죽은 후, 열 명의 왕에게 차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으로, 생전의 죄에 따라 각각 특정의 지옥에서 형벌이 행해진다. 사후 49일이 될 때까지 7일마다 일곱 번의 심판이 있고, 100일, 1년, 그리고 3년째 모두 열 번의 심판이 내려지고 죄의 대가를 치룬 다음에 다시 태어날 곳이 정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염라대왕은 열 명의 왕 가운데 하나로서, 열 개의 지옥 중 하나를 주재한다. 포르노그래피의 정의를 "지나친 자세함"으로 내릴 수 있다면, 열 가지 지옥을 묘사하는 지옥도는 그야말로 "포르노"에 다름이 아니다. 거기에서는 오장육부가 뽑히고, 끓는 기름에 튀겨지며, 맷돌로 짓이겨지고 톱으로 잘리는 이들의 고통이 생생하게 그려져 저절로 몸서리를 치게 만든다. 물론 그런 지옥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 없을 리 없다. 한쪽으로 몰아갈 때는 다른 쪽 출구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정한 날에 정해진 불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죄를 면하고 지옥의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된다는 신앙이나, 지옥에 빠진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자신의 성불(成佛)을 미루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을 따르는 신앙이 등장하였다. 우리 주변의 웬만한 절에는 명부전이 있고, 거기에서 지장보살과 시왕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지옥과 천국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경우

지옥과 천국의 존재 조건은 사후의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긍정과 부정적 가치의 양극에 배치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구원의 개념이 성립하는 데, 지옥에 빠지지 않고 천국으로 이끌어준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구원의 전문가가 등장하게 되고, 이들이 종교 조직을 관장하면서, 종교 엘리트와 평신도의 구분도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이 항상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사후 세상이 한 덩어리로 여겨지거나,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구분 자체도 분명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유대교의 '스올'이 그런 곳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즐거움도 없지만, 형벌도 없다. 일본의 '요미노쿠니(黃泉國)' 그리고 우리의 '저승'도 비슷하다. 여기는 천국의 밝음이나 지옥의 어두움이 아니라, 회색빛을 띠고 있으며, 망자라면 모두 가는 것으로 간주된다. 마치 추수가 끝난 다음에 황량해진 농경지와 같은 모습이다. 종종 저 세상의 구분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구분조차 뚜렷하지 않게 나타나기도 하다.

지옥과 천국의 사이를 두는 경우

천국에 가는 필수 조건으로서 세례와 종부성사 받는 것을 정착시킨 가톨릭 교회는 하나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구약 시대의 아담과 이브, 족장, 예언자 그리고 소크라테스 같은 현인들이 지옥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를 지을 틈도 없이 죽은 순진무구한 아기들도 지옥에 처하게 된다.

조선 시대 가톨릭을 믿게 된 신자들의 최대 고민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조상들이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리라는 것이었다는 점도 비슷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림보(limbo)'인데, 이곳은 죄옥의 형벌을 받지 않은 채 최후 심판 때까지 대기하는 장소이다. 림보는 가톨릭의 공식 교리로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교회가 금지하지도 않았다.

초기 기독교에 팽배했던 임박한 종말의 기대가 차츰 수그러들면서, 개인의 죽음과 최후 심판 사이의 기간에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다.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까지 망자는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가라는 물음이었다. 망자가 속죄의 시련을 거치면 최후 심판에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막연하게 존재했지만, 지옥 및 천국과 구별되는 하나의 장소로서 구체화된 것은 12세기였다.

바로 연옥(煉獄)이라는 아이디어의 등장이었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이라는 결정적인 심급(審級)이 남아있으므로, 개인이 죽은 다음에 받은 첫 번째 심판으로 영원히 지옥에 빠뜨리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었다. 그리 커다란 죄가 아닐 경우에는 시련을 거쳐 죄를 씻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옥은 망자가 죄를 정화(淨化)하는 곳이며, 최후 심판 때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잠정적으로 머무는 곳이다.

연옥은 지옥의 절망이 아니라,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데, 가톨릭교회는 이 희망을 이용하여 신자들에게 커다란 권력을 휘두르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종교 개혁이라는 소용돌이를 자초하게 된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옥, 메타포로서의 지옥

근대에 접어들면서 서구 사회의 사상가들은 지옥의 부조리함에 대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은 유한한 죄에 무한한 형벌을 내리는 것, 최후 심판 이후의 형벌이 지닌 무의미함 그리고 신의 자애로움과 영원한 고통의 부여가 지닌 모순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복수에 혈안이 된 무시무시한 신의 모습에서 신민(臣民)들에게 겁을 주어 순종케 하려는 통치자를 보았다.

그래서 지옥은 억압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지옥은 통치자의 심사를 거슬렸을 때, 떠올려야 하는 공포의 고문실이 되었다. 그리고 근대 세계에서는 사후의 저 세상이라는 생각 자체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어 후미진 곳에 처박히게 되었다. 이래서 지옥은 특정한 공간을 점유한 장소가 아니라, 이 세상의 일을 가리키는 메타포로서 이제 땅 밑에서 벗어나 지상에 거하게 되었다.

먼 하늘 속에 있던 천국도 처지는 마찬가지여서, 어서 지상으로 추락해야 했다. 유리 가가린(1934~1968년)이 했다고 하는 말, "여기(우주 공간)에서 도무지 신을 찾아볼 수 없다"는 하나의 재미있는 삽화일 뿐이다.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사상 처음으로 지구 궤도를 벗어나 우주 공간에서 지구를 볼 수 있었던 우주 비행사, 가가린, 그가 정말 그 말을 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흐루시초프가 반(反)종교 캠페인을 위해 인용하여 유명해졌다는 것이 의미 있을 뿐이다.

이제 지옥은 저 세상의 지리적 영토를 상실하고, 이 세상의 상상계에 자리 잡아 살고 있다. 지하 속 형벌장이 아니라, 이 세상의 잔혹함을 빗대는 메타포의 직분으로 그리고 인간 정신 내부에 깊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지칭하는 신분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폭력과 인간 정신 내부의 상처는 필연적으로 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 연결점은 절망이고, 그것은 바로 지옥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단테는 지옥문 앞에 서서 그 문에 새겨진 구절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이 문에 들어서는 자, 모든 희망을 포기하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는 연옥인가, 끝없는 절망의 지옥인가? 이명박 정부 5년을 "지옥에서 보낸 한 철"로 생각하는 자는 전자라고 할 것이다. 그와는 다른 계절을 기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핵과학자들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모조리 절멸시킬 수 있는 핵폭탄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인류 최후의 날을 알리는 시계(Doomsday Clock)가 하루 중 마지막 5분만 남아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북한의 위협을 운운하는 우리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가?

지금 제시된 핵발전소의 폐기물 처리 방식이라는 것이 미래 세대는 안중에도 없이 현재 우리만 편하면 된다는 그야말로 뻔뻔함의 극치임에도 당장 자신의 불편함만을 생각하는 우리가 과연 희망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서울역과 명동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이들의 지옥은 편협한 집단 이기주의의 산물이지만, 우리의 지옥은 인간 멸종의 위험성에 대한 구제 불능의 둔감함에서 나타난다.

아마도 부실로 지어진 중국의 핵발전소 몇 개가 붕괴하여 한반도로 날아온 대량의 핵물질 덕분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정신을 차린 연후에야 비로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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