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시대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자본가부터 거리의 노숙인까지 '인문학'을 말합니다. 유명 대학에서는 대기업 임원 등을 타깃으로 한 '인문학 코스'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예전에 테일러를 추종하며 드러커를 읽던 재벌 회장은 이제는 공자, 노자를 읽고 헤겔, 마르크스를 인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의 인문학'이 아닌 '절망의 인문학'을 외치는 인문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이 절망의 시대에 인문학을 말할 수 있는가?" 이들은 섣부르게 '희망'을 말하기 전에, 지금 여기 절망의 세상에 시선을 돌리고자 합니다. 이런 절망을 제대로 직시할 때 비로소 거짓이 아닌 진짜 희망의 몸짓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은 지금 여기에서 인문학의 존재 조건을 묻는 이들과 '절망의 인문학' 연재를 시작합니다. 계속되는 불온한 질문에 인문학자의 치열한 답변이 이어집니다. 일곱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인문학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출판평론가 표정훈 한양대학교 교수가 답합니다. "질문이 틀렸습니다. 쓸모없음이야말로 인문학이 존재 이유입니다!" <편집자> ① 첫 번째 질문 : 미스터 잡스, 이제 그만하면 됐거든요! ② 두 번째 질문 : 안철수는 과연 인문학적 정치인인가? ③ 세 번째 질문 : 대하소설은 여전히 가능한가? ④ 네 번째 질문 : 현대 동양 철학은 가능합니까? ⑤ 다섯 번째 질문 : 문학 비평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⑥ 여섯 번째 질문 : 인문학 스타 사도 바울의 정체는? |
철학과 학생 때 가스통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이가림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을 읽었다. "철학자가 촛불 앞에서 세계에 대해 꿈꿀 때는 모든 것을, 폭력이나 평화까지도 꿈꿀 수 있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접하고 촛불을 켰다. 왜? 모든 것을 꿈꿀 수 있다지 않은가. 그러나 폭력이나 평화의 꿈은커녕 꾸벅꾸벅 졸다가 속칭 개꿈만 꿨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철학자가 아니었고 세계에 대해 꿈꿀만한 지적(知的) 그릇도 아니었다.
내가 다닌 대학에 '결혼 준비 특강'이라는 강의가 있었다. 담당 교수는 외국인 신부(神父)였다. 이른바 캠퍼스 커플 학생들만 수강할 수 있다는 뜬소문에 빈정 상한 내 생각은 이러했다. '결혼 경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강의를 제대로 할 수 있겠나.' 여우의 신포도였던 것. 그러나 그 강의는 학교 바깥에까지 소문이 퍼지며 큰 인기를 끌었고 수강생들의 만족도도 높았다.
촛불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내 모습은 <촛불의 미학>이라는 텍스트와 상관하다가 '촛불'이라는 대상으로 넘어가버린 희극 또는 비극의 한 장면이다. 세상 모든 게 텍스트, 그러니까 '촛불'도 텍스트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인문'학'의 활동 무대와 대상은 말과 글, 즉 언어 텍스트다. 인문학은 직접 대상과 상관하기보다는 텍스트와 상관하는 일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결혼 준비 특강'을 한 신부 교수는 다년간 부부들을 상담하며 결혼 생활에 관해 경청했다. 결혼에 관한 폭넓은 자료 텍스트를 섭렵했다. 결혼 생활은 결혼의 인문학을 하기 위한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지만, 결혼에 관한 텍스트는 필요조건이다. 텍스트 기반 없이 자신의 결혼 경험을 쓰고 말해본들 학(學)에 도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인문(人文)을 글자 그대로 '사람의 무늬'라고도 한다. 그러니 인문학을 인생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시도하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인생에 대한 물음과 해답이지만 어디까지나 인생에 관한 텍스트를 붙잡아야 한다. 문학 텍스트, 역사 텍스트, 철학 텍스트 그러니까 문사철(文史哲)이란 '문사철 텍스트'의 줄임말이다. 인문은 '사람과 텍스트' 또는 '인생과 텍스트'다.
그렇다면 텍스트를 가지고 뭘 할까? 텍스트를 가지고 인문학이 무엇인지,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되묻는 게 인문학의 가장 인문학다운 일이다. 텍스트 없는 물음은 맹목이고 물음 없는 텍스트는 공허하다. 배움과 생각 중 하나라도 소홀하면 아니 된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했다. 배움이란 텍스트를 배우는 것이다. 생각이란 텍스트에 질문을 던져 텍스트의 얼개를 맞춰보고 뜻을 풀이하는 가운데 피어오른다. 텍스트와 생각의 관계는 이웃하여 서로 따르며 함께 가는 사이, 서로 수반(隨伴)하며 변증하는 사이다. 인문학은 사람과 텍스트(人文) 사이에서 사람에 관해 묻고(人問) 사람의 말을 경청(人聞)한다.
철학을 예로 들자면, 철학의 역사는 철학 텍스트를 바탕으로 철학이 뭔지 묻고 답하며 논해온 역사, 자기가 하는 일을 되물어 온 역사다. 칸트는 짜임새가 탄탄하고 자리가 넓은 비판 철학 체계를 세우며 '철학의 혁명가'가 되었다. 그 혁명의 시작은 그 때까지 이루어진 철학적 성과를 뿌리부터 비판적으로 다시 검토하는 일이었다. 세계를 해석하는 철학에서 세계를 변혁시키는 철학으로 철학의 사명을 바꾸려 한 마르크스, 철학의 전체 역사를 언어의 미망(迷妄)이라 일갈하며 언어 분석의 죽비를 내린 비트겐슈타인도 예가 되겠다.
인문학을 되묻는 책들, 인문을 앞세우는 책들이 적지 않다. 먼저 인문을 앞세우는 책들 가운데 정진홍의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공병호의 <고전 강독>,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 고전 독서법'을 표방하는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 등속의 책들은 인문학이 아니다. 그런 책들에서 인문 텍스트들은 자기 계발 주체의 상품 가치를 제고시키기 위한 전략·전술의 수단이며 인문이라는 말도 상표로 나부낄 뿐이다. 그런 책들과 저자들이 각광받는 현실에 대한 성찰이 시의적절한 인문학적 성찰의 주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문의 상략적(商略的) 활용 현상에 대한 인문적 성찰' 정도 제목이면 좋을 듯하다.
대략 2010년을 기점으로 제목에 '인문학으로~', '인문학~' 등이 붙은 책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어떤 주제든 '인문' 또는 '인문학'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시류(時流)가 사뭇 강하다. 광고도 인문학으로 해야 하고(<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마흔 살에는 인문학을 만나야 하며(<마흔, 인문학을 만나라>), 2, 30대에는 인문학으로 스펙을 다져야 하고(<인문학으로 스펙하라>) 주식 투자에도 인문학이 필요하며(<인문학, 주식 시장을 이기다>), 작고한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자 반열에 올랐다(<CEO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자 스티브 잡스를 말하다>). '도서 제목 인문 트렌드의 현실과 배경 그리고 문제점' 정도의 언론 대학원 석사 논문 하나 쯤 나와도 되겠다.
거슬러 올라가보자. 단적으로 말해서 인문학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의 의미 있는 발제들 가운데 1번 타자로 나는 김용옥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통나무 펴냄, 1986년)를 꼽고 싶다. (민음사판이 먼저 나왔으나 판매 추이와 저자 인지도 확산 계기 측면에서 통나무판을 '사실상 초판'으로 봐도 좋다고 생각한다.) 모두 여섯 부분으로 이뤄진 이 책에서 '첫째 글, 우리는 동양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와 '둘째 글, 번역에 있어서의 시간과 공간'은 제도로서의 동양학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함께 동양학이라는 것의 의미, 동양학 방법론 등을 고전 번역이라는 주제 축을 중심으로 제시하고 있다.
내용과 논지 그리고 문장의 결기 측면에서도 김용옥은 긍정적인 의미의 폭로자(muckraker, debunker)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 책이 큰 인기를 끌면서 김용옥은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제도권 학계와 멀어져 일종의 '브나로드 지식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분히 비아냥거리는 뉘앙스로 김용옥을 '지적(知的) 엔터테이너'라 지목하지만, 인문학 고전 텍스트 번역의 중요성과 의미, 방법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방향을 제시했다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나는 그를 내내 인문학자라 부를 것이다.
인문학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의 2번 타자는 김영민의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민음사 펴냄, 1996년)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인문학을 둘러 싼 제도와 관행의 문제점, 인문학자들의 정체성과 자의식, 글쓰기를 중심으로 한 구체적인 문제 상황과 실천 방향까지 두루 비판적으로 되새기며 '인문학 현장 비평'의 보기 드문 한 사례가 되었다. 그 현장성의 증좌 하나는 김영민이 먼 바다 건너 긴 세월 건너 사람들보다 바로 지금 여기 사람들의 글과 말을 따져 묻는다는 점이다.
김영민은 철학과 문학 그리고 일상을 버무린 일련의 에세이('수필 문학'으로서의 에세이가 아닌)를 다작하며 표현으로서의 철학(매체로서의 메시지와 유비시킬 수 있다)과 철학으로서의 표현을 추구해왔다고 할 수 있는데, 저서 대부분에 인문학 담론이 스며있지만 역시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가 본격적이고 분명한 인문학 담론이다. 특히 그의 '기지촌 지식인'과 '논문 중심주의'라는 말은 그 비판의 내용과 함께 인문학, 아카데미즘, 지식인에 관한 뜻 깊은 술어가 됐다.
김영민의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조동일의 <인문 학문의 사명>(인문학 연구 총서 1, 서울대학교출판부 펴냄, 1997년)은 국문학사 연구자로서 조동일이 역설해왔던 인문학의 세계사적 보편성 문제를 중심으로 학문의 위기 진단, 학문 연구의 실제 상황, 인문 학문의 위상 설정, 한국 학문과 세계 학문 등을 다룬다. 비(非)유럽 문명권에서 근대 이전에 발전시켜 온 인문학의 능력을 되살려 동과 서는 물론 인문학 내부의 다양한 분과를 회통시키고 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조동일의 지론이다. 이렇게 볼 때 다분히 거시적인 학문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김영민과 조동일의 저서에 뒤이어 1998년에 번역되어 나온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미리내 펴냄)는 몇 단락을 제대로 읽어나가기 어려울 정도의 오역(誤譯)과 비문(非文)으로 독자들의 질타를 받았다. 특히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번역된 책이었다는 점에서, 인문학에 대한 공적(公的) 지원의 현실과 의미를 반성케 하는 뜻밖의 공효(功效)를 발휘했다. 다행히 이 책은 같은 제목으로 다른 번역자가 제대로 번역하여 다른 출판사에서 2011년에 출간됐다(이은정 옮김, 동녘 펴냄).
▲ 소크라테스. ⓒwikipedia.org |
역시 2011년에 나온 <불온한 인문학>(최진석·문화·정정훈·이진경·손기태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과 루돌프 파이퍼의 <인문 정신의 역사>(정기문 옮김, 길 펴냄)는 인문학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의 극히 다른 두 가지 모습이다. <인문 정신의 역사>는 원제 "History of Classical Scholarship From 1300 To 1850"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 고전 문헌학의 역사다. 텍스트를 매개로 던지는 인간에 대한 질문, 텍스트를 바탕으로 인문학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 인문학이라면 번역서 제목은 결코 기만이 아니라 오히려 적확하다.
20세기 최고의 서양 고전 문헌학자로 일컬어지는 루돌프 파이퍼의 역작이라는 사실은 '읽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확' 다가온다. 명불허전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책에 실린 고전학자 안재원의 해제, '서양 인문학의 전통과 그 수용 과정'이다. 동아시아가 서양 고전을 수용하는 과정, 동아시아 고전을 서양이 수용하는 과정에 대한 개괄과 함께 향후 연구 과제까지 제시하고 있다.
한편, 지식 담론 소비 시장과 출판계에서 제법 유력한 브랜드인 '수유+너머'가 '따로 또 같이' 성찰한 결과라 할 수 있는 <불온한 인문학>은 거칠게 말하면 '인문학의 정치사회적 올바름, 정치사회적 올바름의 인문학'을 논한다.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이라는 부제목이 사뭇 중의적이다. 인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지만 사실은 허울로서의 미명(美名)뿐인 '이른바 인문학'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고, 현실과 인문학의 거리를 가늠하며 인문학의 정체성을 되물은 기록이기도 하다.
"이제 행복과 희망의 인문학, 화해와 위로의 인문학을 넘어서 불편하고 낯선 반(反)인문학을 말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반인문학, 또는 인문학에 저항하는 인문학.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불편함과 낯섦을 창출하는 힘이며, 그 힘을 우리는 불온하다고 부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생산해야 할 인문학의 존재 양태, 어떤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응답은 바로 순응하지 않는 인문학, 즉 불온한 인문학에서 찾아져야 한다." ('2장, 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
양피지로 필사본으로 초기 인쇄본으로 유구하게 전해 내려오는 고전 텍스트에 대한 고도로 전문적인 연구의 역사. 바로 여기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인문학화하고 인문학을 현실화하기 위한 현실 밀착형 성찰의 기록. 여기에 한 권만 더하자. '인문학 파르티잔' 강유원이 기울여 온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다 할 '미국 대학 교양 교육 핵심 과정과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 안내' <인문학 스터디>(마크 C. 헨리 지음, 강유원 외 편역, 라티오 펴냄, 2009년).
사뭇 긴 부제목이 내용 성격을 정확하게 말해주는 이 책은 전문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의 '인문학 텍스트 자율 학습' 의욕과 노력을 돕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달달한 인공 첨가물이 잔뜩 버무려진 채 훌쩍 삼켜도 목 넘김이 좋은 소프트 인문학 세트 메뉴에 대한 요구가 다수인 가운데, 단단한 껍질을 깨고 알맹이를 수습해 깨물어 잘 씹어야 하는 인문학 천연 견과류에 자발적으로 도전하는 사람들도 소수지만 분명 있다는 사실. 의미가 심장한 이 사실에 부응하는 책이다.
정리해 보자. 인문학 제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자 인문학 방법론으로 각각 고전 번역, 글쓰기, 학문 보편성을 핵심 주제로 하는 김용옥, 김영민, 조동일의 저서들이 있다. 각각 인문학자의 정체성, 지금 여기의 인문학 현실과 방향, 고전학으로서의 인문학과 인문 정신, 그리고 인문학 자율 학습을 다룬 카우프만, 수유+너머, 파이퍼, 강유원의 책들이 있다. 그밖에 '인문학에 관한 인문학' 냄새가 나는 책들이 적지 않지만, 대부분은 연구 프로젝트 지원에 따라 대학에서 생산된 '프로젝트 최종 결과물 보고용'이다. 물적 토대를 지원해주는 갑(甲)과 지원받는 을(乙) 사이에서 철저하고 절실한 되물음이 이뤄지는 일은 매우 드물다.
나는 지금까지 거론한 몇몇 책들이 '인문학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이라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인문학 3대 의무론에 반대한다. 인문학은 반드시 알기 쉽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인문학의 소통 의무. 인문학은 반드시 공적(公的)으로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인문학에 대한 보호 의무. 인문학은 다른 분야에서 토대 구실을 하거나 써먹을 수 있고 또 꼭 그래야 한다는 인문학의 유용성 의무. 알기 쉽지 않고 보호 육성되지 않으며 어디다 써먹기도 힘든 인문학을 도대체 왜 공부할까?
비평가 김현의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문학' 앞에 글자 '인'(人) 하나를 더해 바꿔본다.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인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 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 없는 인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다."
이것이 대답으로 충분하지 않다면(아마 그럴 것인데), 다시 묻고 경청하며 텍스트를 조회할 도리밖에 없다. 인문학은 무엇이며, 왜 공부하는가? 이 화두에 대한 돈오(頓悟)는 없으며 점수(漸修)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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