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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진보의 죽음, 타살인가 자살인가?

[홍세화의 질문] 다시, '진보 정치'는 가능할 것인가? ②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 이후 전 세계는 '진보의 시대'가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죽은 개' 취급을 당했던 카를 마르크스와 <자본>이 각광을 받고, 세계 곳곳에서 좌파 정당이 기지개를 켠다. 워런 버핏, 빌 게이츠 같은 자본가가 나서서 '자본주의 위기'를 얘기하고, 한 때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결합된 유토피아를 얘기했던 이들도 다시 '복지'와 '노동'을 입에 올린다.

이렇게 '진보의 시대'로 이행 중인 세계와 한국은 정반대다. 최근 통합진보당 사태는 그 단적인 예다. 지금 한국에서 '진보'는 조롱과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진보'가 사라진 공백을 '이명박 대통령을 반대하며' '박정희의 딸만은 대통령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이들이 메우고 있다. 2002년 '무상 의료' '부유세' 등을 내세우며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당시 노무현, 이회창 후보와 공개 토론을 벌였던 장면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하지만 이 질문에는 모두가 침묵한다. 과거 진보 정당에 몸 담았던 이들마저 한 때는 '보수 야당'이라고 딱지 붙였던 민주통합당을 기웃거리는 상황에서 '진보'의 대변인을 찾는 것은 어불성설인가? 이런 상황에서 진보를 위한 최후 변론에 나선 이가 있다. 바로 진보신당 홍세화 대표다.

민주화 15년간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으로 활동해온 홍세화 대표는 최근 나온 <지금 여기의 진보>(이음 펴냄)에 실린 '파국과 절멸, 그 너머를 위한 노트 : 다시 진보 정치는 가능할 것인가'에서 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자처했다. 모두가 '진보'를 외면하는 이때에 '진보' 정당의 깃발을 부여잡고 있는 그의 말에 경청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보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프레시안>은 이음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서 21일 게재한 글의 앞부분에 이어서 뒷부분을 싣는다. (☞관련 기사 : 다시, '진보 정치'는 가능할 것인가? ①). <편집자>


▲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파국과 절멸, 그 너머를 위한 노트: 다시, '진보 정치'는 가능할 것인가 ②

진보의 죽음, 타살인가 자살인가

1

2002년에 20여 년의 파리 시절을 뒤로 하고 한국 사회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달 뒤 나는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었다. 노동자의 정치적 단결과 인간 해방의 가치를 추구하는 진보 정당의 당원으로서 살고자 했지만, 나는 억압적 정치 체제의 잔재들을 청산하고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실현하는 데 있어 기꺼이 자유주의 개혁 세력들의 파트너가 되고자 했다. 자유라는 가치는 강요된 굴종과 추방의 시대를 통과한 내게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자유의 확장이 사회적 진보의 조건이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진보 정치가 간신히 진입한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정치 공간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경쟁과 대립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도 속에서 여타 정치 세력들을 자신의 정치적 헤게모니 아래 자리매김하려 하는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포섭되거나 주변화되는 처지에 서게 되었다.

정치권력을 장악한 한국의 자유주의 정치 세력(특히 노무현 정권에서)이 진보 정치에 가한 모멸은 앞 절에서 이야기한 바 있듯이 노동하는 인간의 절규와 죽음을 경멸하는 것에서부터 분명해졌다. (다시 반복하자면,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차라리 진보주의와 명확한 선을 그었던 김대중 정권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풍경들이 곳곳에서 연출됐다.

권위에 대한 저항이 의미 있는 윤리적 가치에 대한 존중의 태도마저 저버리는 모습을 보면, 프랑스 68 세대를 향해 라캉이 던졌던 경고, "너희들이 즐기는 것을 똑바로 보라!"는 말은 노무현과 그의 정권을 채운 386 세대 정치인들에게도 정확히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체성을 달리하는 진보 정치와의 경계를 자의적으로 허물어뜨리려 했다.

전해서 들은 일화인데, 청와대를 방문한 민주노동당 관계자들과 헤어지는 자리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혼잣말처럼 한 말은 방금 말한 지점을 극명히 보여준다. 노 대통령은 민주노동당 버스에 적힌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 민주노동당'이라는 문구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럼, 우린 일을 안 하는 사람들인가?"

자신들이 하는 '일'과 진보 정당이 하는 '일'을 한마디 농담으로 섞어버릴 수 있는 정치적 태도는 어떤 상황에서는 자신을 '진보적 자유주의자'라고 규정하다가도, 다른 상황에서는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는 목표로 보수주의 정치 세력에게 '대연정'을 제안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끝내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무책임한 선언을 푸념처럼 하고 물러나기 전까지.

그들 자칭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했던 일로 나는 어떤 자칭 자유주의 지식인에게서 '좌파 근본주의자'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이 끝나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 나는 자랑과 긍지로 생각하던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다. 탈당이라는 행위는 2002년 입당한 때로부터 6년 동안 일개 평당원으로서의 나의 눈에 비친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 정당이 보여준 이른바 '진보 정치'에 대한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열 석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킨 2004년의 감격으로부터 다음 총선까지의 4년,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4년이 지났다. 이 8년의 시간에는 민주노동당으로부터 탈당한 사람들이 만든 진보신당의 4년도 포함된다. 이 시간 동안 진보 정치를 지배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진보 정당(들)은 무엇을 하지 않았고, 대신 무엇에 열중했던가? 이 질문을 던지려고 먼 길을 돌아온 것 같다.

한마디로 작금의 통합진보당 사태는 다름 아닌 지난 8년의 종착점이다. 민주노동당이란 이름은 민주주의와 노동 정치를 연계시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민주주의의 확장을 통해 극복해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자 붙여진 것일 테다(그렇게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 너나없이 공통되게 지적하는 것은 '노동 (정치)의 실종'이다. 이 비판의 옳고 그름을 따져보기에 앞서, 우선 노동이 실종된 진보 정당이라는 것은 희·비극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붕어 없는 붕어빵'처럼.

나는 노동 '없는' 진보 정당이란 식의 표현은 현실을 올바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이 말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사태의 진실을 감추는 결과를 낳는다. 지난 총선에서 진보 정당(들)이 노동자 전략 지역에서 단 한 석도 당선시키지 못한 사태에 관한 보고서들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은 더 뚜렷해졌다. 진보 정당(들)은 '어떤 노동'은 외면하거나 거부하면서 '어떤 노동'과는 이해관계를 돈독히 일치시켜왔다고 하는 것이 현실에 가까운 말이다.

전일화된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적 위기는 항용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을 강제하는 이데올로기의 초석을 닦는 데 기여한다. 외환 위기로 시작된 1차 파국과 이 파국의 극복이라는 명분으로 진행된 노동 시장 유연화 과정은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하부 구조들을 그 근저에서 해체하고 파괴함으로써 총체적인 파국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2차 파국이 진행되는 과정의 특징 역시 자본의 단결과 노동의 분열로 나타났다.

자본의 총공세가 한국 사회를 '20 대 80', 나아가 '1 대 99' 사회로 양극화시키면서도 굳건히 지배력을 확장해온 비결은 바로 '80' 또는 '99'의 내부를 '포함된 자들'과 '배제된 자들'로 나누고 그 속에서 서로 적대하게 만드는 경계를 만들어낸 데 있다. 그 첫 번째 작업은 노동의 수직적 위계 구조에서 상층을 차지하는 부분에 대한 포섭이다. 가령 '대량 실업을 피하기 위해서는 해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따위의 궤변이 통할 수 있었던 참된 이유는 대기업 노동 조직들이 그러한 논리를 받아들이며 자발적으로 포섭된다는 데 숨어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을 중심으로 한 노동 운동 조직의 상층부는 전혀 새로운 성격으로 거듭난 자본주의가 "성장이 고용을 창출하기는커녕 오히려 고용 감축을 만들어내고, 또한 성장이 바로 그 고용 감축에서 비롯하는"(비비안느 포레스테) 작동 원리를 정면에서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노동 시장의 유연화는 다름 아닌 '생산의 유연화'에 노동을 조응시키는 강제인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이제 자본은 몇 대의 전화기와 컴퓨터만 있으면 노동을 포함시키지 않고, 실재적인 재화를 생산하지도 않으면서 이익의 단기간 확대가 가능한 금융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상층 정규직 노동은 아직 생산 현장에 자신들을 위한 노동이 존재하는 한 현실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그들은 '알고 싶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대기업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정규직 조직 노동을 대표하는 민주노총은 '포함된 자들'에 속한다. 이에 비해 노무현 정권 5년을 거치며 노동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 비정규직 노동자란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말일까? 단지 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걸 의미하는가? 그것은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름이다. 그것도 두 번 버림받은. 처음에는 자본과 권력에 의해, 그 다음에는 정규직 조직노동에 의해.

그렇다면, 파견 하청 노동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하층 노동들에 대해 상층 노동 중심의 민주노총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지 않았느냐고? 물론 자본과 권력을 향해서는 "비정규직 철폐 투쟁! 결사 투쟁!"을 열심히 외쳤다.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이 배제된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외면하면서!

진보 정치의 위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준비되어온 것이었다. 이를테면 '준비된 파국'이었던 것이다. 민주노총은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선거 부정이 드러났을 때 지지 철회 의사로 압박하면서 '노동 정치'의 복원을 요구했지만, 그 전에 이 조직은 먼저 자신들이 어떤 노동을 대표하는지를 밝혔어야 했다. 국민참여당이 포함된 3자 통합 이후에도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모든 수단을 동원해 관철하려 했던 민주노총 지도부가 진보 정당을 통해 추구해왔고 또 추구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대기업 노조의 경제적 이해를 해결해주는 '대리 정치 기구'로서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이 민주노총을 찾아가 탈당 의사 철회를 요청하며 허리를 숙이는 통합진보당 혁신비대위원장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 어떤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가? 2004년 대의제 민주주의 제도 안에 진입한 열 석의 민주노동당이 4년 동안 주로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필경 '무상 급식과 무상 교육'을 정책으로 제시하여 복지 담론을 선도하지 않았느냐고 답할 것이다. 유럽 좌파 정당의 전매특허인 복지 정책에서 배운 그러한 노력이 무의미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관리 사회형 복지 제도가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파국에 대처하기엔 역부족이라고 한계를 지적하는 것과 보편적 복지의 근처에도 도달해보지 못한 한국 사회에 그나마 기본적인 복지라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다른 의미를 지닌 문제이니까.

그러면 그것 말고 다른 일은? 자본의 공세로 파괴되고 조각난 노동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 정치 게임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의 모든 시간을 소비했던 것은 아닐까? 진보신당을 탈당한 어느 명망가 정치인처럼, 노동 대중 앞에서는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지만 돌아서서는 비정규직은 표가 안 된다고 속삭이면서. 울산의 한 비정규직 노동 운동 활동가가 이번 총선에서 노동자들이 진보 정당으로부터 고개를 돌린 이유를 설명하면서 했던 "자본가는 피를 빨고 진보 정당은 표를 빨았다"는 말이 설득력을 가지는 까닭이다.

이런 진보 정치의 현실에 대해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건넨 '고견'은 대체로 하나로 집약된다. 사회적 갈등을 제대로 반영하고, 실현 가능한 정책을 제시하고, 나아가 집권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책임 있는 정당 정치의 주체로서 인정받으라는 것이다. 이는 대표적인 '진보적 정치학자'라고 불리는 최장집의 지론이다. 그런데 노동 부문의 경제적·사회적 이해를 대변하고 정책으로 이를 실현하라는 주문은 자본주의의 어느 단계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타당성을 갖는 것일까? 이미 하나로 통합되기 어려운 현실에 놓인 각각의 노동의 이해를 모두 충족시킨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신자유주의적 교리에 따른 무한 경쟁의 추구는 발전한 서구 사회에도 극심한 사회적 격차와 모순을 가져옴으로써, 민주주의와 복지 사회의 기반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고 사람들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하고 있다. 이것이 2008년부터 본격화된 미국발 금융 위기의 세계적 현실이다. "알립니다, 자본주의가 오늘 새벽 마침내 자살을 하였습니다!?"로 시작하는 사회학자 서동진의 글(☞관련 기사 : 나꼼수 보며 '낄낄' '씨바'…"그럼, 세상이 바뀌니?")이 극적으로 일깨워주듯 "2008년의 금융 위기 이후, 우리는 마치 자본주의의 부고장이 조만간 도착할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 된 현실에서, 금과옥조처럼 모든 사회적 모순의 정당 정치로의 수렴을 요구하며 대의제 밖의 저항들을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간주하는 최장집의 거듭된 주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스스로를 '베버리안'이라고 말하는 최장집이 자주 언급하는 글이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1919년)이다. 그런데 베버의 이 글은 실은 정치적 당파주의로 가득 찬 특정 계급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적 메시지였다. 다시 말해 그것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물론이고 1918년의 독일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나온 "혁명에 반대하는 국가주의적 수사로 가득 찬" 선동문에 다름 아니었다(알렉스 캘리니코스).

한마디로 베버의 이 강연문에서 강조되는 '책임의 윤리'라는 것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회주의 운동은 물론이고 보다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억압받는 인간들의 여러 요구들을 망상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정치적 효과를 발휘했다. '레짐의 정치학'과 대의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최장집의 강박적 요구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의 주장은 벼랑 끝으로 몰려가는 배제된 노동과 아무런 연관도 맺지 못한 진보 정당을 더욱 의회주의에 매달린 채 권력 정치를 추구하는 길로 내모는 역할을 한 게 아닐까?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함께 국가 권력 밖으로 밀려난 자유주의 정치 세력과 참담한 노동 현실에서 눈을 돌린 진보 정치 세력이 다시 만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노무현과 유시민이 스스로를 일컫는 데 사용한 바 있는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다분히 희극적인 개념 조합 아래에서였다. '포스트-민주화 시대 대안 정당을 향한 각축'이란 글을 통해 이 한 쌍의 조합에 이론적 기초를 구축해준 이는 사회학자 조희연이었다.

조희연은 이 글에서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개념을 부활시킨다. 그리고 이것이 기존의 중도 개혁 자유주의(민주통합당 세력의 지향을 의미하는)가 담아내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며 해석의 진화를 꾀한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기존의 중도 개혁 자유주의가 담아내지 못하는 진보적 의제들을 자유주의의 확장 속에서 담아내고자 하는 담론적 노력"이라는 그의 수사학적 노력이, 결국 '비민주 진보 연합 정당론'이란 규정 아래 유시민의 국민참여당과 민족주의 계열이 당권을 장악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탈당한 정치 그룹 간의 3당 통합을 하기 위한 레드카펫의 역할을 했음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앞서 내가 지젝의 글에서 재인용한 "희극으로 반복되는 것이 원래 비극보다 훨씬 더 끔찍할 수 있다"는 마르쿠제의 말을 상기하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주통합당보다 더 오른쪽의 지향을 가지고 있던 자유주의 정치 세력의 한 분파의 정치적 재기 욕심과, 이 세력과의, 그리고 나아가서는 다수파 자유주의 정당과의 '연합 정치'를 숙주 삼아 의회주의 다수파 형성을 도모하려는 특정 진보 정치 세력의 정치적 계산이 결합하여 빚어낸 작금의 통합진보당 사태보다 더 끔찍한 사태가 또 있을까? 2012년 봄부터 진보는 무덤 속에 갇혀 있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진보는 타살당한 것일까, 자살한 것일까?

2

거짓 중에서 가장 해로운 것은 '그럴듯한' 거짓이란 말이 있다. (구)당권파의 당파적 패권주의가 통합진보당 사태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게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통합진보당 사태가 '미래의 진보'를 위한 새로운 기회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진보 시즌 2'를 위해 입당 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그런데 진보에 대한 이들의 변함없는 애정에도 불구하고 통합진보당 내의 권력 정치 게임이 맞부딪혀 내는 파열음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다 많은 경우에 진보를 적용하면 진보가 확대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그러한 과잉이 정작 진보 정치를 질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듯하다.

통합진보당 사태 직후에 나온 반응들만 놓고 보자면 앞서 언급한 최장집의 평가가 단연 냉철하고 사태의 본질에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경향신문> 2012년 6월 4일자). 그는 "대한민국 진보는 이미 4년 전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당 사태로) 죽었다"고 4년 뒤에 선언하면서, 그 이유로 "현재 위기인 통합진보당은 (지난 4년 동안)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정치 활동을 하면서 그 자체의 존재 이유를 가진 진보가 아니"었고 "다른 정치적 역할이 있기 때문에 그 형태를 연명해오던 것이 그것조차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 통합진보당 사태"라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 "통합진보당은 진보의 허구적 존속일 뿐이었다"며, 이는 "총선, 대선이라는 국면에서 주요 엘리트들이 정치적 자원을 증대하기 위해 대의 없이 편의적으로 통합한 현상"이고 여기에 "반MB 전선 형성을 위한 야권 통합의 담론이 정치 환경에 큰 압력으로 작용하면서 민주노동당 당권파,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가 각기 이해관계를 추구하면서 편의적으로 통합했고 이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부정선거 사태가 발생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통합진보당의 출현을 두고 "중산층과 노동의 결합"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사실을 떠올리면 그의 이러한 설명은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것이 그의 진심일까? 그가 강조하는 책임의 정치, 책임의 윤리는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걸까?

통합진보당의 이론적 기초 역할에 동참했던 조희연의 경우도 군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당권파들에게 "전략적 양보"를 요구했지만, 왜 자신의 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나아가 왜 통합진보당의 '새로나기 특위'(당권파의 무력화를 목적으로 하는)가 내놓은 당 혁신안이 당권파로부터 멀어지려 하면 할수록 우경화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통합진보당의 우경화가 일시적인 것인지, 필연적인 경향인지에 대해서도.

철학자 김상봉은 언젠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기고한 '낡은 진보와 이별하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직도 진보 정치와 진보 정당 건설을 입에 올리는 정치인들에게 니체가 기독교인들에게 물었듯이 묻고 싶어진다. '당신들은 아직도 진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진보는 죽었다! 하지만 관성은 무서운 것이어서 사람들은 진보의 사망을 믿지도 않고 인정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오해는 계속되고 우리의 선량한 열정은 부질없이 낭비된다."

총선이 다가오기도 반년도 더 전에 쓴 그의 글은 파국을 맞은 진보의 처지에 비추어 서늘하리만치 무서운 예언으로 읽힌다. 그가 단언한 것처럼 진보는 죽었다. 설사 어제의 진보가 무덤 깊은 곳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다고 해도, 그런 진보는 제 숨 고르기도 힘겨울 터여서 오늘 괴물로 변한 자본주의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물신이 지배하는 세계의 어두운 뒷골목이나 배회하는 좀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현실 정치에 대한 아무런 경험이나 준비도 없이 진보신당의 대표가 된 지 반년을 지나오고 있다. 선택을 하는 위치에서 바라본 선거와 선택을 요구하는 처지에서 마주한 선거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한 사람의 명망 있는 정치인도 없고 권력 정치의 자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주변적 위치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배제된 자들의 서사'를 정치 공간에 떠오르게 하자는 것 하나였다. 그것으로 상황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설정하자는 것, 그러한 기대를 담은 제안이었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노동의 수직적 위계 구도에서 배제된 노동의 하위 주체들을 비례 대표 후보의 앞자리에 배치한다고 해서 당장 새로운 진보 정치의 구성과 내용이 채워지는 것은 아닐뿐더러, 애당초 그것은 짧은 시간에 가능한 목표가 되기도 어려웠다.

지금도 나는 총체적인 사회적 파국과 더불어 절멸의 상황에 처한 진보 정치의 새로운 소생이 가능할지, 가능하다면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서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 물론 나는 안다. 내 옆에서 누군가 일러준 그것은 나도 이미 익히 알고 있는 해법의 하나이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타협한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진보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 새로이 통합한 진보 좌파 정당 건설의 길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다. '아뿔싸,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나?' (아, 글쎄 이미 '노동자는 하나'가 아니라니까!)

"혁명의 과정은 (……) 몇 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이것은 슬라보이 지젝이 이 글의 앞에 언급한 책에서 한 말이다.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완전히 다시 시작하는 것,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난 6월 말 한국을 방문한 지젝에게 던진 "당신에게 질문이란 무엇인가? 근본적 질문이 어디에 던져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내 질문에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이혼하려는 게 오늘의 위기"라고 그는 답했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났다는 의미겠다. "그렇다면?" 그에 따르면, "사회–정치적 공간 안으로 '배제된 자들의 침입'을 의미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지젝은 대화에서나 글에서나 흥미로운 농담을 통해 역설적인 상황의 내면을 들추어내는 능력을 지녔다. 한국어로도 번역된 그의 글 '상황은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 슬라보이 지젝 인터뷰>(궁리 펴냄))의 글머리에 놓인 농담은 단연 인상적이다.

그것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 군사령부 간에 주고받았던 전보에 관한 것이다. 독일 쪽에서 먼저 전보를 보냈다. "이곳 전방은 상황이 심각하긴 하나, 파국적이지는 않다"고. 오스트리아 쪽에서 답신이 왔다. "이곳 상황은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고. 정신분석학자이기도 한 지젝은 후자의 정신 상태를 가리켜 '물신주의적 분열' 혹은 '물신주의적 부인' 증상이라고 했다. 도대체 상황이 파국적인데 심각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그러한 태도는 파국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내면에 자리 잡을 때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거의 모든 공간에서 수없이 발생하는 배제와 소외가 놓인 간극을 미끄러지듯 스쳐가는 우리의 시선은 그로 인해 생겨나는 인간의 비참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난다. 우리가 스스로를 그 적대의 경계와 연루시키지 않는 한, 체제의 희생자들은 숫자로 쌓일 뿐이고 우리는 '별 일 없이' 이 물신의 세계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다. 세상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데, 나 자신이 파국의 희생자가 되기 전까지 '심각하지 않'은 것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쌍용자동차 대량 해고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죽어간 스물두 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의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 '배제된 자들'이란, 지젝에 따르면 '실체성 없는 주체성, 즉 사회적 존재로서 지녀야 할 실체를 박탈당한 주체'이다. 그들은 "사회적 위계의 '사적' 질서 안에 딱히 정해진 자리가 없는 연유로 보편성을 직접 표상하는" 사람(집단)이다. 마르크스가 명명한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 계급을 직접적으로 지칭하기보다는 사회적 박탈로 인해 비실체적 존재로 전락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바로 배제된 자들이 현대의 프롤레타리아트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든 사회적 연대든, 우리들의 목표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으로 '호모 사케르(homo sacer, 벌거벗은 생명)'이며 그것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예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 정치를 대의제 안에 가두고 제도 밖의 행위들을 배제하거나 부차적으로 위치 지을 때, 그 정치는 물신주의적 권력을 쫓는 행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민주주의로부터 달아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재정의하고 재구성하자는 말이다. 그것은 '배제된 자들의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이것이 가능할까? 지난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시도해보려 했던 것은 그 작은 시도였다. 거듭 말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나 "다시 시작을 반복하는 것"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진보 정치의 길은 이것뿐이다.

파국과 절멸 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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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여기의 진보>(이음 펴냄). ⓒ이음
귀국한 지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 10년의 시간은 진보 정당 당원으로 살아온 시간과도 고스란히 겹쳐진다. 짧지 않은 이 시간을 지내오면서 내가 가장 빈번히 들었던 것은 "세상을 바꾸려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이유로 세상을 바꾸기도 전에 사람들이 어떻게 먼저 바뀌는지를 줄곧 지켜봐 왔다.

그리고 진보 정치와 조직 노동의 상층부가 스스로를 '민중 권력'이라 강변하던 그 시간은, 권력과 자본에게는 물론이고 그들에게조차 외면당하고 배제된 노동자들의 숫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훌쩍 넘어선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민중 권력이란 말은 진보 정치라는 이름으로 권력이 어떻게 물신화되는지를 명확히 확인해주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과문의 탓인가, 나는 이제껏 민중의 일상이 권력적인 것을 본 적이 없고 권력자의 일상이 민중적인 것을 본 적이 없다. 적어도 이 땅에서는.

총선이 끝난 뒤로부터 석 달을 경과해오는 동안 나는 문득문득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계엄령>이란 제목의 영화다. 영화를 볼 때 주인공보다는 조연이나 엑스트라의 자리에 서보려 하는 나의 습성 때문인지, 줄거리를 온전히 기억하진 못하는 대신 순간순간 포착된 장면이 기억 속에 박혀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

줄거리는 대충 이런 것이다. 중남미 독재 정권의 경찰 조직을 훈련시키는 역할을 하던 미국인(이브 몽탕)이 게릴라 조직에 납치된다. 감옥에 갇힌 동료들의 석방과 몇 가지 민주주의적 조치가 게릴라들의 요구였다. 그들은 잡아온 미국인의 범죄 행위를 입증하기 위해 그를 심문한다. 그런데 그들은 사실을 들이대며 추궁할 뿐 고문은 하지 않는다. 그가 비밀경찰들에게 고문 방법을 전수해주던 자인데도. 마침내 인질 협상은 타결되지 못하고, 미국인 인질은 자신이 죽을 것을 예감하면서 게릴라 대장에게 묻는다. "나는 기독교 문명을 위해 싸우는데 당신들은 대체 어떤 문명을 위해 싸우는가?" 게릴라 대장이 답한다. "우리는 '약하고 무너진 것들의 문명'을 위해 싸운다"라고. '기독교 문명'을 위해 싸운다는 '고문 방법 전수자'와 '약하고 무너진 것들의 문명'을 위해 싸운다는 '고문하지 않는 피고문자'. 그렇지만 고작 '약하고 무너진 것들의 문명을 위해서'라니…….. 보수나 진보를 가릴 것 없이 더 많은 성장과 과실을 약속하는 이 맘몬의 세계에서 그것은 너무 초라한 목표 아닌가? 그 정도의 정치적 비전을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거는 것인가?

통합진보당 사태가 한참 시끄럽게 진행되던 어느 날 나는 대장암과 어렵게 싸우고 있는 이재영 씨(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진보신당에 이르기까지 정책과 관련된 일을 도맡아 했던)가 인터뷰를 한 기사를 읽었다. 그의 이야기 가운데 잊히지 않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한 당권파의 비리 따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기자가 물었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이유가 당권파의 그러한 행패들 때문이었느냐고. 그가 답했다. "그 당이 '가난한 자의 정당'이 될 수 없을 것 같아서"라고. 약간은 쑥스러운 듯, 지나가는 말처럼 허허로운 심정으로 말하는 표정이 글에서도 읽히는 듯했다.

나에겐 바로 이 말이, 사위어가는 육체 속에서도 온전히 살아 숨 쉬는 이 감각이, 아주 소중하게 다가왔다. 눈물겹게. 그의 이 한마디가 어쩌면 우리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몰두하는 동안 우리 안에서 사라져버렸거나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어떤 감각과 자각을 일깨워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것이 자본이 인간에게 모멸을 가하는 이 불의의 시대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좌파의 영혼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늘 이 파국과 절멸의 저 너머에서 다시 희망의 빛 한줄기로 떠오르고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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