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신(1817~1887년)의 '유속을 징계한다'는 글을 읽으면 한국 자본주의의 인간형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이응신은 당대의 인간형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군자와 소인 그리고 유속이다.
유속(流俗)은 한마디로 군자의 너울을 뒤집어쓴 소인이다. 이응신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옳고 그름의 중간에 몸을 두고 맑고 더러움의 중간에 발을 붙인다. 의상이나 취미는 남들을 따라하고 말과 행동은 시세와 부합하게 한다. 표 나게 정직해서 명성을 취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행동해서 미움을 받지 않는다. 사교에 정성을 기울이고 온화하게 공손하며 정보에 밝아 두루 통해서 비방을 듣지 않는다. 하지만 재물의 이득을 얻으려는 욕심과 남의 재물을 취하려는 속셈으로 밤낮 일을 꾸미는 버릇이 몸에 단단히 붙어 여기서 헤어나지 못한다. 심성이 무너지고 풍속이 점점 물들어 더럽고 비루해 더불어 일할 수 없다. 이것이 유속의 환난이다.
이응신은 이러한 유속이 앞으로 온천지를 뒤덮게 되리라 예견하며 후세에 소인이라도 나오면 그래도 볼 만한 세상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유속을 소인보다 더 심각한 악으로 보았다. 소인은 드러나니 박멸할 수 있지만 유속은 물(水)이라 빠져들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한국 자본주의의 인간형을 이응신이 말한 '유속'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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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과연 유속은 군자의 도덕에 배치되는가? 이응신의 시대는 자본주의가 싹트는 19세기의 한가운데서 세도 정치와 민란과 외세로 격변했다. 이 격변의 와중에서 '유속'의 다수를 이루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사대부 관료들과 아전, 부농, 부상 등 정경 유착 세력이었다. 이들의 수탈과 학정에 민란은 필연적이었으며, 이후 식민지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정경 유착 세력은 한국 자본주의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여기서 두 가지가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다. 하나는 유속의 가치관이 군자의 도덕에 배치되지 않는 점, 다른 하나는 한국 자본주의의 비주류(소외 계층) 역시 유속에 전염되어 유속의 가치관을 자신의 생체 속에 이식하고 있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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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도덕'이 '자본주의 정신'을 이룬다는 사실을 실증해 보였다. 자본주의는 탐욕적이고 프로테스탄트는 도덕적이라는 상식에 비추어 이는 놀라운 발견이다.
나는 전부터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 한국의 유학과 자본주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저명한 동양학자 오웬 라티모어가 동아시아의 자본주의를 유교 자본주의라고 말한 내용도 중요한 계기였다. 그 뒤 이응신의 글을 접하고 '유속'이 유학과 한국 자본주의의 관계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고리라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이응신의 군자-소인관은 멀리는 공자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직접적으로는 조선의 주자학인 성리학에서 나온다. 붕당 정치와 당쟁의 명분이었던 성리학의 예론은 조선의 주자라고 불리는 송시열의 노론을 중심으로 활짝 꽃피웠다. 당시, 군자는 성리학의 예론을 따르는 사대부 양반들이었다. 이들은 정경 유착의 검은 거래로 '방납(防納)의 폐해'를 조장해 백성들을 수탈했는데, 이를 혁파하기 위해 실시한 '대동법' 요즘 말로 하면, 경제 민주화 조치를 불온 사상이라 하여 극력 막았다.
성리학의 도덕을 동원해 사익(私益)을 극대화한 점에서 이들은 후대의 '유속'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들 군자가 시대에 맞게 변형되어 새로운 인간형으로 나타난 게 '유속'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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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에는 성리학, 특히 노론의 도덕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공자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도그마'다. 마치 로마 공인 기독교가 원시 기독교의 예수와 거리가 멀 듯이.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나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하였다. 화이부동(화합하되 같지 않음)하려면 남을 인정해야 하므로 화(和)는 타자를 전제한다. 반면, 동(同)은 타자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예컨대, 나는 '다른 나'가 있어야 나를 인식할 수 있고 나에 대해 화(대화)할 수 있다. 나에게 '타자 나'가 없는 경우를 우리는 정신병 상태라 한다.
소인이 동이불화하는 건 도덕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반면, 공자의 군자는 윤리를 통해서 화이부동 한다. 도덕은 신의 심판이고 심판의 체계이다(아담아 이 열매를 먹지 마라!). 반면 윤리는 이 도그마를 전도시킨다(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이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느니라!). 윤리는 사회 내에 내재한 신의 뜻을 따름으로서 존재를 초월적 가치들에 관계시키는 도덕을 대체한다.
공자가 죽기 전까지 탐독한 책이 <주역>인데, <주역>은 바로 하늘의 뜻을 알려주는 책이다. 다산도 동이불화를 강요하는 노론의 세상에서 귀양살이 18년 끝에 도달한 학문이 <주역>이었다. 노론의 도덕을 최종적으로 부정하는 근거가 <주역>에서 나왔다. <주역>은 사회가 화이부동하기 위해 '나'와 '타자' 사이에서 하늘의 뜻을 찾도록 돕는 윤리학인 것이다.
종교가 '하늘의 뜻'을 선택받은 백성의 전유물로 만들 때 이것은 전형적으로 타자가 없는 동이불화의 도덕이 된다. 동이불화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초월적 가치들에 준거해 선악적인 판단 즉, 도덕적인 판단을 한다. 이는 구성원 스스로 예속이 마치 자신들의 안녕이기라도 하듯이 예속을 위해 투쟁하게 만든다. 도덕은 이처럼 사회 구성원의 자발적 복종을 통해 지배자가 자신의 권력과 체제를 안정화하는 정치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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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소로가 <시민 불복종 운동>에서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 것은 공자의 화이부동의 행동 윤리와 같다.
시민 불복종 운동이 저항하는 '법'은 공동체의 도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운동은 사회적 약자들의 정당한 요구가 현실 고착적인 법과 도덕 앞에서 좌절될 때 최후의 수단으로 일어나는 아주 강력한 윤리적 행동이다. 그런데도 도덕성을 진보의 생명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전도된 의식이 만들어낸 희극이다. 도덕과 윤리가 구별 없이 사용되는 현실을 감안해도 최근의 사건은 확실히 도덕성을 문제 삼고 있다. <나는 꼼수다> 비키니 사건 그리고 이정희 경선 부정 사건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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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 사건은 사건 자체보다 부적절한 대응과 수습이 더 문제가 됐다. 진보 쪽은 "비키니 사진의 성적인 의미를 무시하지도 않고, 시위 방식의 발랄함을 인정하는 방식"을 원했다. <나는 꼼수다> 역시 같은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또 그런 차원에서 해명하려 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문제를 던지고 받는 과정에서 완전히 꼬여버리고 말았다.
사건 당시 <나는 꼼수다>는 도덕적 프레임을 지나치게 의식한(=반발한) 나머지 '가장 심오한 것은 피부다'(발레리)라는 선을 넘어버렸다. 무슨 말이냐면, 정봉주를 감옥에 처넣은 이명박 정부의 새디스트적 쾌감에 성 유머로 통쾌하게 한방 먹인 건 사실이지만 성적으로 치닫는 팬들의 농담이 성 도덕주의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자각을 놓쳐버린 것이다.
때문에 수구와 진보 양쪽의 공격을 받았다. 조롱하려던 성 도덕의 프레임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보수 언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다른 한편 페미니스트의 비판에 대해서 피해자 프레임 운운하는 악수를 둔 것이다. 여기에는 <나는 꼼수다> 수준에 해당하는 성 윤리 의식의 피상성이 자리 잡고 있다(피상성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꼼수다>를 성 도덕주의로 몰아붙이는 건 언어도단이다. 성 도덕주의에 대한 반발이 <나는 꼼수다>의 의도라는 걸 고려해야 한다. 만약 자신들이 관계되지 않았다면 <나는 꼼수다>가 이런 사건에 페미니스트적 견해를 취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페미니스트들의 문제는 <나는 꼼수다>를 마초적인 성 도덕주의자로 몰아붙임으로써 일찌감치 도덕적 판결을 해버린 것이다. 아무리 자신들이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타자와 대화하려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낙인찍는 것은 동이불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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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 사건과 관련해서 <프레시안>에 실린 서울대학교 교수 이근의 글이 가장 황당했다.
<나는 꼼수다> 비키니 사건은 저항적 매체의 남성적 특성에 심취하면서(마초이즘) 제대로 된 피아(彼我)의 구별을 상실한 <나는 꼼수다>를 보여준다. 즉, 우리 편이 아닌 저편이라는 범주에 이명박 정부뿐만이 아니라 남성의 지배 대상과 도구로서 여성을 포함시켜 버린 것이다. 이는 어쩌면 예견된 사건이다. 왜냐하면 <나는 꼼수다>가 처음부터 매우 남성적인 프로였기 때문이다. 이는 진행자의 구성과 사용되는 언어와 표현에서 알 수 있으며, 처음부터 남성성이 필요한 저항적 매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는 꼼수다>가 남성성을 통해 권력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여성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무뎌진 것이다.
긴 말은 하지 않겠다. <나는 꼼수다>가 왜 이처럼 초호황의 인기를 누리는 걸까? 내 생각이 옳다면, 심층적인 것을 표면으로 끌어올림으로서 도덕적 허위와 위선을 벗겨내고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꼼수다> 스타일은 가장 현대적인 문학과 공명한다. 미하일 바흐친은 웃음, 광장의 언어, 축제적 형식, 육체적 하부의 이미지 등을 위대한 문학의 조건으로 꼽았다. 이 조건은 심층이 아니라 표면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가장 심오한 것은 피부'일 수밖에 없다.
이근은 이런 <나는 꼼수다>의 표현 스타일을 남성성의 젠더로 오해한 모양이다. 더 할 말이 없다. 심층적으로 파악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건을 얼마나 도덕적으로 재단하는가를 보여주는 본보기다.
▲ 민주주의를 이유로 이정희를 단죄하는 것은 옳은가? 혹시 지금 한국 정치는 도덕의 덫에 갇힌 것은 아닐까?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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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이정희의 경선 부정 사건에 대해서. 이 사건을 경기동부연합(주사파)과 연계시키는 보수 언론 등의 색깔 공세를 필두로 진보 쪽에서도 많은 비난과 논란이 있었다. 그중에서 <프레시안>에 실린 박권일(<88만 원 세대>의 저자)의 칼럼에 대해 말하려 한다. (☞관련 기사 : 박정희와 싸우다 박정희가 될 뻔한 이정희!)
보수 언론 등은 아니면 말고 식의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이지만 박권일은 이 사건을 민주주의의 룰을 어긴 중대 사범으로 규정하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비판이 훨씬 더 가혹하다.
모든 사건이 그렇듯 이 사건도 콘텍스트가 중요하다. 그가 자신의 글보다 닷새 전에 게재된 김주언의 칼럼을 읽어 보고서도 그렇게 썼다면 지독한 형식주의자요 도덕주의자다. 그러나 칼럼을 쓰고 있는 분이 이런 사실을 모르긴 어렵다. (☞관련 기사 : 이정희 사태, '여론 조사'와 '여론 조작'은 한 끗 차이)
문제는 민주주의에서 절차와 룰이 그의 생각처럼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는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꿈꾸었지만 민주적 절차를 이해하지 못해서 독재를 했다고 말한다. 나아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인식은 상당수 민주주의자들과 그들을 탄압하던 반민주주의자들이 사실상 공유하던 인식"이라고 강조한다.
나로선 납득이 가질 않는 소리다. 현재 민주주의 문제는 자유, 평등, 인권 등의 실질적 내용이 사라지고 형식적인 절차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런 절차 민주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진전이다.
룰과 절차를 우선시하는 원조는 소크라테스다. 이런 형식주의자들은 언제나 사태의 본질에 입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을 향해 심층으로 하강하는 태도는 본말을 전도시켜 사태를 그르친다. 악법도 법이란 유명한 말은 마치 법이란 본질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현실에서 '악법은 악법이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물론 박권일이 이 정도는 아니겠지만, 이정희를 박정희와 싸우다 박정희가 될 뻔한 사람으로까지 몰아세우는 건, "어느 정권 없이 불법 사찰"이라고 말한 박근혜와 유사한 정신상태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물론 나는 이정희의 경선 부정 사건을 변호하려는 게 아니다. 이글의 초점은 도덕적 잣대의 불편한 진실에 맞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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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부도를 낸 YS나 서울 시민에게 수십조 원의 빚을 안겨준 오세훈'과 '수억 원대의 불법 정치 자금을 받은 정치인'. 과연 누구 죄가 더 중한가? 수많은 사람을 실직시키고 가정을 파탄시키고 사회를 후퇴시킨 것에 비하면 비리 정치인의 죄과는 미미하다.
하지만 후자는 도덕적 비난을 뒤집어쓰고 구속과 벌금을 내야 하는데 김영삼이나 오세훈은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 절차 민주주의의가 갖는 심각한 문제이다.
언론이 정치인의 비리를 머리기사로 다루는 가장 큰 이유는 '의제' 설정의 파워를 장악하기 위해서다. 국민의 알 권리보다는 자신들의 파워를 유지 확대하려는 목적이 더 일차적이다. 사실 대다수 국민들은 정치인의 비리에 대해서 언론과는 다르게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 이명박 정부가 비리 백화점이란 걸 국민들이 몰라서 지난 선거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건 아니다.
국민들의 관심은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의 효과다. 소위 이 '피부 효과'를 '심층의 본질'로 대체하려는 게 도덕이다. 이것은 무상 급식을 둘러싸고 포퓰리즘 논의가 진보, 보수 양쪽 진영에서 어떻게 쟁점화되었는가를 상기하는 것으로 족하다.
일반 국민에게도 피부에 닿지 않고 수구 세력에겐 사익을 챙기는 명분이요 정적을 치는 무기일 뿐인데도 누구를 위해서 도덕을 지행합일의 가치로 믿어야 하는가?
나에겐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상대로 대결하는 꼴, 혹은 회사 돈은 오너가 다 빼갔는데 업무 합리화에만 목메는 꼴. 진보 쪽 정치인에게 결벽증처럼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식자우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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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다시 읽었다.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이론이나 사변보다는 사물의 실제적인 진실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결과 도덕을 제거하고 권력을 순수하게 실익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군주론은 귀족한테 휘둘리는 왕권을 굳건히 세워 나라를 외세로부터 지키고 백성들을 수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쓴 책이다. 만약 이런 목적이 없었다면 이 책은 비정한 정치공학 책에 불과했을 것이다.
독서 중에 우리의 역사와 현실이 겹쳐서 지나갔다. 조선 후기 사회도 사대부가 왕권을 좌지우지해 나라가 넘어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신음했다. 마키아벨리와 같은 탈도덕의 관점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권력은 도덕을 명분으로 내걸면서 실익을 추구하고 또, 언제든지 실익을 위해서 새로운 명분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게 정치의 현실이다.
마키아벨리 정치론은 그 자체만으론 악용되기 쉽고 인민 권력론이 뒷받침돼야만 제몫을 다할 수 있다. 전자는 도덕을 배제하는 칼이고 후자는 윤리를 행동화하는 양심이다. 둘의 관계가 '뱀처럼 영리하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게'라는 성서의 비유처럼 될 때 상생한다.
이 문제는 다시 정치와 도덕의 문제로 돌아온다. 사실 도덕성 시비는 네거티브 전략이다. 비전이 없을 땐 네거티브 전략만 난무한다. 네거티브 공세를 뚫고나갈 수 있는 힘은 비전에서 나온다. 곽노현 사건은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비전은 건강한 시민의 활력을 먹고 자란다. 광장에서건 마을 회관에서건 시장에서건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때 시민 사회가 활력에 넘치며 윤리적 가치가 의제로 등장한다. 이것이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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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신은 '유속'이라는 새로운 인간형을 세상에 알린 공에도 불구하고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가 신봉한 군자는 비전이 없기 때문에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식민지 시대 이래 한국의 지배 권력은 이응신의 군자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운 한국의 성인(聖人)들은 성리학적인 군자상이다. 학교에서는 시민의 윤리가 아니라 이런 성인의 도덕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교육은 비전 없는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기름진 토양이다. 식민지 통치와 해방 후 독재 정권은 비전을 금지했다. 재벌 중심의 신자유주의도 비전을 불허한다. 노무현 정권은 비전이 없는 정권이었다.
민주통합당은 노무현을 벗어난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비전이 없기 때문에 죽은 자를 보내지도 못하고 있다. 오직 이명박 정부 심판에만 의존하고 있으므로 불가피하게 도덕성이 정권 교체의 최대 무기가 됐다. 이 때문에 도덕성은 전략 전술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무엇보다도 진보의 생명은 '윤리에 기초한 비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봐도 도덕성은 엘리트의 전유물이다. 또, 이것은 우월성과 직결된다. 더 나은 교육을 받을수록 사익을 탐하고 거기에 걸맞은 도덕으로 분식하는 유속과 같은 인간이 된다. 고학력 사회가 된 한국은 이응신의 우려대로 누런 띠풀(삘기)이나 하얀 갈대 같은 유속이 땅을 온통 뒤덮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우리의 자화상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마저 이응신의 목소리다. 즉, 성리학 군자의 꾸짖는 음성이다. 출구 없는 이런 폐쇄 회로가 우리 사회의 비전을, 진전을 결정적으로 가로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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