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박은 이 책에서 '사회주의'를 "국민이 대통령을 투표로 뽑듯, 노동자가 사장을 투표로 뽑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주의=프롤레타리아 독재+국유화'라고 이해되던 당시로서는 사뭇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관련된 몇 구절을 인용해보자.
"우리 당이 주장하는 재벌 회사의 공장을 노동자에게 맡기자는 말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다. 그 기업의 대표를 노동자들이 직접 뽑자는 것이다." "기업보다 더 큰 게 나라다. 나라의 대통령도 국민이 뽑는다. 그래도 나라는 잘 유지되고 있다. 하물며 재벌 회사의 대표를 공장 노동자들이 뽑는 것은 대통령을 뽑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아쉽게도 김종박의 이런 주장은 새로운 사회주의관으로 발전하거나 현실 운동과 결합되지는 못했다. 한때의 기발한 선전 아이디어 정도로만 사람들 뇌리에 남았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1992년 대선 이후,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 자본-노동 관계의 근본적 변화는, 점점 더, 현실 정치 의제가 될 수 없는 먼 미래의 이상이 되어갔으니까.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고 나서, 난 한 권의 문제작과 마주하고 있다. 김상봉(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이사장)의 신간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펴냄)가 그 책이다. 1980년대 사회과학 서적을 연상시키는, 거의 디자인이라 할 것이 개입되지 않은 흑백 표지가 이 책의 민낯이다. 그리고 이 표지 하단에는 단정적인 어조의 한 문단이 구호처럼 선명히 박혀 있다.
"기업을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줘야 한다. 이를 위해 많은 일을 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하나의 법률 조항, 바로 이것이다!-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철학, 주식회사를 뒤집다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김상봉 지음, 꾸리에 펴냄). ⓒ꾸리에 |
그런 그에게는 별명이 있다. '거리의 철학자'. 실제로 그는 왕성한 실천가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학벌 없는 사회'라는 교육 운동 단체를 만들고 키우는 데 앞장서왔다. 게다가 진보 정당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진보신당의 강령 제정 작업을 주도했고 지금도 그 부설 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래서 철학자인 그가 주식회사, 기업 지배 구조, 노동자 경영권 등을 다루는 신간을 낸 것이 아주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특히 김상봉은 최근 몇 년 새 '삼성 공화국'의 현실을 비판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일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가 지난 몇 년간 그의 삶의 궤적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저작이라고 느낄 법하다.
그런데 이것은 영 틀린 짐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것도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개하는 사유의 발단이 반(反) 삼성 운동보다 훨씬 오래된 것임을 밝힌다. 한국에서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되고 뒤이어 노동자 대투쟁이 폭발한 1987년에 당시 독일 유학 중이던 김상봉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고 한다.
"공장의 폴리스(polis)화. 폴리스로서의 공장. 즉, 하나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단위로서의 공장. 이때만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왜 사장은 선거를 통해 뽑으면 안 되는가?"
"왜 사장은 선거로 뽑으면 안 되는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분명 반 삼성 운동 등의 정세로부터 촉발된 것이기는 하되 그 뿌리는 1987년의 거대한 투쟁들의 여진 속에서 솟아난 이 물음에 있다. 그 해 이후 한국의 민주화가 먹은 나이 꼭 그만큼의 세월과 함께 숙성된 물음인 것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제1장 제목 자체가 "바보 같은 물음-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이다. 제1장은 이 질문을 던지면서 또한 이 질문의 답을 얻으려던 과정에서 저자가 맛본 실망과 좌절에 대해 토로한다. 저자가 보기에 카를 마르크스를 포함한 기존 좌파 이론가들은 모두 이 문제에 대해 속 시원히 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1장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신랄하며 논쟁적인 어조를 취한다. 기존 이론의 권위에 상당한 애착을 지닌 독자라면 이 장을 읽으며 혈압이 좀 올라갈 수도 있겠다.
제2장에서 저자는 철학자답게 자유, 소유, 권력 등의 근본적 개념들을 재검토하며 앞 장의 비판을 발전시켜나간다. 자유는 소유로부터 나올 수 없다는 것, 사람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권력 역시 소유의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을 차근차근 논증한다. 얼핏 진부한 상식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인 자본주의 현실은 이런 상식의 정반대를 진리로 전제하며 존립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철학적 비판 작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백미이자 압권은 제3장부터다. 이 장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기업의 가장 발전되고 일반화된 형태인 주식회사를 철저히 검토하고 그야말로 '해체'한다. 그리고 독일, 미국, 일본 등에서 발전한 주식회사의 여러 변형태들을 검토하는 제4장이 제3장의 이런 중심 논의를 뒷받침한다.
주식회사는 노동자와 사회의 다른 부분에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며 주식회사 자체가 상품이 되어 시장에서 팔리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주주 집단이 엄청난 이익을 향유한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다.
이 모든 현실의 밑바탕에는 주식회사를 존립시키는 제도적 중핵들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자본주의 법체계에서 주식회사에 부여되는 법인격이다. 김상봉은 법철학적 논의를 통해 이러한 제도적 중핵들을 사정없이 파헤친다. 그래서 그것이 결국은 한 더미의 무의미하고 허술하며 모순된 명제들의 조합에 지나지 않음을 밝힌다.
결론은 무엇인가?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법체계에서 주식회사의 주인인 것처럼 전제되는 주주들도 사실은 주인임을 내세울 아무런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주식회사는 본래부터 그렇게 주인 없이 성립된 생산 공동체다. 따라서 주주 소유권을 전제하고 그로부터 연역되는 경영권이라는 것도 거짓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가 보기에는 한국의 재벌 문제도 바로 이 근본적 문제에서 파생하는 것이다.
"(이건희 일가가) 수많은 주주들이 주식을 소유하고 있고 국가 경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대규모 기업 집단을 단돈 41억 원으로 저렇게 간단히 사유화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나라가 이 나라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지극히 역설적인 일이지만 주식회사에는 처음부터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주인일 수 있는 것이다." (220~221쪽)
저자는 이렇게 기존 현실의 논리적 토대들을 해체한 뒤에 제5장에서 자신의 오래된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소유에 따른 권력 행사의 논리가 원천 부정된 자리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과제는 이제 이 주인 없는 공동체를 어떻게 참다운 공동체로 만드느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상봉의 '서로주체성' 개념이 등장해 제 역할을 한다.
주식회사의 자산 제공자가 주주일지는 몰라도 주주는 결코 주식회사의 활동 주체는 아니다. 그런 활동의 주체로 우리는 노동자 말고 다른 어떤 집단도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경영권은 주주 '소유'권이라는 허상에서 의제될 것이 아니라 이들 활동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노동자와 경영자가 '서로주체'로서 마주할 때에 주식회사는 비로소 실체를 갖춘 공동체, 폴리스('공화국'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가 된다. 즉, 노동자가 경영자를 선출해야 한다.
그럼 주주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그는 이제 금융 투자자로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 김상봉은 이들 '수탈자들에 대한 수탈'로서 지극히 문명적인 방식을 제시한다. 소유권과 경영권 사이의 고리를 확실히 끊는 조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배당권이 여전히 인정된다. 하지만 경영권과는 안녕이다. 이들의 역할은 경영 감사 정도로 족하다.
그래서 드디어 이 책의 최종 결론이 완성된다.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 메커니즘
다소 길지만,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논지를 쭉 소개해봤다. 이 책의 성취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우선 마르크스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마르크스는 주로 과거 논의의 한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출연한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마르크스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간 주목하지 못했던 측면들을 새로 발견할 수 있었다. 가령 <자본> 3권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고도로 발전한 결과 만들어진 이것(주식회사)은 자본이 생산자 소유로 재전화―그러나 이제 소유는 개별화된 생산자들의 소유가 아니라 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즉, 직접적인 사회적 소유]로서의 생산자 소유이다―하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점이다. 또 다른 한편 그것은 재생산 과정에서 지금까지 자본 소유와 결합되어 있던 모든 기능이, 단지 결합된 생산자들만의 기능[즉, 사회적 기능]으로 재전화하기 위한 통과점이기도 하다." (<자본 3-1>(강신준 옮김, 길 펴냄), '제27장 자본주의의 생산에서 신용의 역할', 586쪽)
주식회사는 분명 마르크스에게도 중요한 연구 주제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역사적 시간은 이 주제를 탐색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이었다. 마르크스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일반적 기업 형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자본> 자체의 체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시대적 상황 때문에도 주식회사는 3권에서야 중요한 주제로 부상한다. 하지만 그조차도 충분히 자세히는 다뤄지지는 못한다.
그 결과로 <자본>의 독자는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본> 1권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자본가는 19세기 중반 영국 자본주의의 전성기에 자본가의 일반적 유형이었던 가족 기업 경영자다. 이 자본가 유형은 소규모 기업의 창업주이자 실질 소유자였고 경영에서는 무자비한 독재자였다. <자본> 1권을 접한 한국의 독자들이 이 책의 자본가 상(象)에 한국의 재벌을 쉽게 오버랩시킬 수 있었던 것(사실은 오인인데)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본>의 끝머리(제3권)에 다다라서 우리는 전혀 다른 자본가 유형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화폐 자본가와 생산 자본가가 서로 나뉜다. 화폐 자본가란 은행가, 주식시장 중개인, 주식 소유자 등으로서 현실의 자본가 계급은 점점 더 이들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러면서 자본가 계급의 다수는 직접적 생산 기능으로부터 유리된다. 반면 생산 자본가가 담당하던 감독 기능은 점차 전문 경영인이 담당하게 된다.
"주식회사(신용 제도와 함께 발달한다)는 일반적으로 이 관리 노동을 점점 더 자본(자기 자본이든 차입 자본이든)의 소유와 분리된 기능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 한편으로 자본의 단순한 소유주인 화폐 자본가에 대해서 기능하는 자본가가 대립해 있고, 또 신용의 발달과 더불어 이 화폐 자본 자신이 하나의 사회적 성격을 취하면서 은행으로 집중되어 이제는 직접적인 소유주들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이 은행들로부터 대부됨으로써,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차입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어떤 명목의 자본도 소유하지 않은 단순한 관리자가 기능하는 자본가 그 자신이 수행해야 할 모든 실질적인 기능들을 수행하게 됨으로써, 이제 기능인만 남게 되고 자본가는 별로 쓸모없는 사람으로서 생산 과정에서 사라진다." (<자본 3-1>, '제23장 이자와 기업가 수익', 509~510쪽)
주식회사는 이러한 역사 발전 과정에서 등장하고 정착된 기업 형태다. 마르크스도 언급하고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도 조목조목 따지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영락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어느 누가 배타적인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도 없고 단순히 주주들의 사적 소유의 총합이라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인 그런 물건이다. 그런데도 현실의 주식회사에서는 여전히 사적 소유의 논리가 지배한다. 그래서 이것은 반드시 모순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다.
"주식 제도 안에는 사회적 생산 수단이 개인의 소유로 나타나는 낡은 사회 형태에 대한 대립이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주식 형태로의 전화 그 자체는 아직 자본주의적 한계 내에 묶여 있다. 그래서 그러한 전화는 사회적 부와 사적 부의 성격 간의 대립을 극복하기보다는 그것을 새로운 형태로 바꿀 뿐이다." (<자본 3-1>, '제23장 이자와 기업가 수익', 590쪽)
사실상 이미 극도로 사회화된 자산의 사적인 전유(일상어로는 차라리 '횡령')―이것이 주식회사에서 작동하는 지배의 메커니즘이다. 마르크스는 이미 이것을 예감했고, 더 나아가 신용 제도의 발전과 함께 이러한 지배 메커니즘이 기업 울타리를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될 것임을 내다보았다. 주인 없는 주식회사 안에서 주주들이 주인 노릇 하는 것처럼, 금융 과두 세력이 사회 전체의 저축을 농단하리라는 것이었다.
"주식 제도―이것은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사적 산업의 지양이며, 또 그것이 확대되어 새로운 생산 영역을 장악할 정도가 되면 사적 산업을 아예 절멸해버린다―이외에도 신용은 개별 자본가[혹은 한 사람의 자본가로 간주될 수 있는 사람]에게 일정 범위 내에서 타인 자본과 타인 소유 그리고 그럼으로써 타인 노동에 대해서까지 하나의 절대적인 처분권을 제공한다. 자기자본이 아닌 사회적 자본에 대한 처분권은 그에게 사회적 노동에 대한 처분권을 부여해준다.
(…) 이제 수탈은 직접적 생산자로부터 중소 자본가들에게까지 널리 확대된다. 이러한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출발점이다. 그러한 수탈의 관철은 곧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목표이며 궁극적으로는 생산 수단을 모든 개인들로부터 수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 3-1>, '제23장 이자와 기업가 수익', 588~590쪽)
마르크스 사후 주식회사 형태는 계속 발전했고, 신용 제도도 더욱 발전했다. 사회화된 자산의 사적 전유를 통한 지배의 작동도 가일층 확대되고 치밀해졌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어쩌면 그 극단적 발전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막상 마르크스의 후계자들은 이 논의와 분석을 그다지 심화시키지 못했다. 혁명을 주장하는 진영이든 개혁 노선을 취한 진영이든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남겨놓은 정도의 주식회사 비판이라면 선동의 재료로서 이미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에게 그 다음 과제는 결코, 각 나라에서 주식회사가 작동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분석하거나 그에 따른 대안을 발전시키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단지, 존재가 입증된 자본가 '계급' 전체와, 아니 사실은 그들의 대변자로 지목된 국가와 맞서 싸우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선호한 '국유화' 방식의 사회주의 이행 노선도 이런 무관심에 크게 일조했다.
한편, 개혁주의자들은 또 다른 방향에서 고민을 지워버렸다. 이들은 기업 단위에서부터 자본-노동 관계를 뒤집는다는 과제를 먼 미래의 이상 정도로 계속 뒤로 미루거나 아니면 현실 정치 의제에서 아예 배제했다.
물론 루돌프 마이드네르와 스웨덴 노동 운동이 1970년대에 시도한 임노동자 기금 같은 예외가 있기는 했다(<복지 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 : 임노동자 기금 논쟁과 스웨덴 사회 민주주의>(신정완 지음, 사회평론 펴냄)). 하지만 이런 사례들은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었다. '제3의 길' 노선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주식회사는 복지 국가와 공존해야 할, 대안 없는 선택지였다.
이렇게 다소 길게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이야기를 한 이유는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성취를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주식회사를 둘러싼 여러 제도들의 봉합점 역할을 하는 법인격 개념의 철저한 해체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가 아니라 관계(서로주체성)에 바탕을 둔 노동자 경영권의 근거를 철학적으로 정초한 것이다.
이 중 첫 번째 성과는, 기존 이론들과의 관계 속에서 본다면, 마르크스가 단편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친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 메커니즘 비판을 좀 더 완성된 형태로 전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법인 조직을 둘러싼 제도들의 비판을 통해 사회적 자산이 사적으로 전유되는 구체적 양상을 포착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법인 제도(주식회사를 비롯한)를 통한' '사회적 자산의 사적 전유' 메커니즘의 규명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성격을 더없이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살아 있는 주체들이 실질적인 결정권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주인 아닌 자들이 사회의 모든 처분권을 행사하는 시대, 어떤 임계점에 달한 인류사적 과도기다.
노동자 경영권 없는 재벌 개혁은 신자유주의 강화!
'법인 제도를 통한' '사회적 자산의 사적 전유'에 대한 이러한 비판과 분석은 지금 당장 한국 사회의 현안을 살피는 데도 유용한 나침반이 되어준다. 그것은 이번 총선에서도 쟁점 중 하나로 부상한 재벌 문제다.
총선 시작하기 전, 새누리당까지 포함해서 모든 정당이 재벌을 개혁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진보 정당만의 주장처럼 되어 있던 '경제 민주화'가 모두의 구호가 되었다. 물론 막상 총선 공약으로 나온 것을 보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가령 새누리당 공약은 공약으로 낼 것도 없이 지금 당장 정부, 여당이 해야 할 일들을 생색내듯이 나열한 것일 뿐이다.
민주통합당은 이런 새누리당을 비판하면서 "출자 총액 제한 제도 재도입, 순환 출자 금지, 금융-산업 분리 강화 등"을 공약한다. 이러한 공약은 민주통합당이 바라보는 재벌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지금 재벌의 문제는 총수 일가가 자신들이 실제 소유한 주식 지분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결책은 모든 주주가 자신이 소유한 지분만큼만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다. 즉, '1주 1표'의 주주 자본주의 질서를 철저히 확립하는 것이다.
지난 2월에 통합진보당 대표 이정희가 발표한 '맞춤형 재벌 개혁 로드맵'도 민주통합당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각 재벌 그룹에 대해 맞춤형 처방을 내놓는다고는 하지만, 일관된 것은 민주통합당과 마찬가지로 "출자 총액 제한 제도 부활, 순환 출자 금지 등"을 통해 재벌의 경제 집중력을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정희의 방안이 실현된다면, 10대 재벌 그룹은 해체되고 총수 일가는 다른 대주주와 마찬가지의 지위가 된다.
민주통합당 공약이나 이정희 대표 로드맵은 새누리당 공약에 비해서는 '재벌 개혁'이라 할 만한 측면이 있다. 재벌 권력에 손을 대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재벌 개혁'이 곧 '경제 민주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의 방식대로 하면, 재벌 권력은 약화되는 대신 전체 대주주 집단의 권력은 더욱 강화된다. 즉, 주주 자본주의가 강화된다.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경제 현실의 미시적 기초가 되는 기업 단위 질서가 주주 자본주의다. 주주 자본주의의 강화란 다름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강화다. 그렇다면, 위의 '재벌 개혁' 안들은 경제 민주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강화의 통로라는 이야기가 된다. 최근 '재벌 개혁' 논의에 대한 장하준의 다음과 같은 비판은 이러한 맹점을 잘 짚고 있다.
"재벌, 특히 삼성은 참 나쁘다. 자식들에게 편법 상속을 했고, 우리 사회 엘리트들을 매수했다. 여기에 대해선 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벌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삼성그룹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삼성 계열사의 주인이 누가 되나. 국가가 주인이 된다면, 그건 차라리 낫다. 하지만 실제론 해외 투기자본이 주인이 될 게다."(☞관련 기사 : "'삼성생명 국유화' 요구하는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대개의 '재벌 개혁'론이 한국의 재벌 문제를 주주 자본주의의 모순과 별개로 바라본다. 그래서 일단 재벌을 해체하여 '정상적인' 주주 자본주의 질서를 수립해야 하고 주주 자본주의의 문제는 그 다음부터 고민하면 된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 여기에는 자본주의적 근대화 이후 사회과학의 표준적 틀이 되어온 '보편'-'특수' 구도도 작동한다. '보편적인' 자본주의와 '특수한' 한국 재벌 문제 식의 구도 말이다.
그러나 재벌 문제는 그런 '특수한' 질병이 아니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이 문제가 오히려 보편적인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이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한 형태라고 분석한다. 그 보편적인 모순이란 곧 '법인 제도를 통한' '사회적 자산의 사적 전유'다.
주식회사는 주인 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법체계는 이 사회적 자산의 경영권을 주주라는 특정 집단에게 맡긴다. 하지만 주주는 사실 일종의 채권자에 불과하다. 이들에게는 경영의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는 대주주들의 묵인과 담합 아래 소수 과두 세력이 기업을 지배한다. 한국에서는 이 과두 세력이 총수 일가로 나타날 뿐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이렇게 재벌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그래서 대안도 민주통합당 유와는 전혀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 경영권이 당면 중심 과제가 된다. 노동자가 이사를 선출하자, 그래서 총수 일가의 전횡도 아니고 주주들의 '1주 1표'도 아닌 노동자의 '1인 1표'로 운영하는 기업을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몇몇 '진보적' 재벌 개혁안은 노사 공동 결정 제도를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출자 총액 제한 제도 재도입, 순환 출자 금지 이후의 다음 단계 과제로 미뤄두거나 혹은 이러한 조치들에 따르는 보완책 정도로만 제시한다.
이에 반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결론은 이렇게 주장한다. 노동자 경영권이야말로 재벌 개혁의 몸통이고 가장 먼저 추진되어야 할 과제라고. 순환 출자 금지 등은 오히려 이것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를 보완할 부분적 수단일 뿐이다.
▲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다니다 백혈병을 얻어 사망한 고 박지연 씨. 그가 삼성전자의 경영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과연 그런 비극이 일어났을까? ⓒ프레시안(이상엽)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이후'의 과제들
나는 "주식회사의 경영은 노동자가 한다!"는 것이 우리 시대 노동 운동과 사회 변화의 중심 구호가 되어야 한다는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결론에 깊이 공감한다. 그래서 감히 이 책을 이 시대 모든 깨어 있는 노동자와 민주 시민의 필독서로 추천한다. 이 책의 독자가 변호사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어본 이들의 숫자만큼만 되어도 한국 사회의 균열이 지진으로, 화산으로 폭발하는 것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이라는 이 책의 결론에 동의하더라도 그 결론에 수반되는 수많은 의문점들, 더 해명되어야 할 숱한 쟁점들은 남는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기업 내의 민주화를 강조하다 보니 이러한 또 다른 고민거리들은 굳이 부각시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한 가지 사례만 들자면, 이런 것이다. 노동자가 이사를 선출하기 시작한 주식회사가 이제 그 다음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느냐는 문제. 당연히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이사를 일상적으로 감시하고 주요 경영 사안을 숙의하기 위해 노동자 평의회 같은 현장 대의 기구를 만들고 운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는 필수 과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끊임없는 감시와 요구가 향할 방향, 그것이다.
만약 노동자 경영 기업이 지금과 마찬가지 정도의 경쟁 압력 속에서 생존해야 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주식회사를 우리 시대의 아테네로 만들었더니, 그 아테네가 끝없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격랑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면?
이렇게 되면 노동자 스스로 노동 시간을 연장하고 사회적, 환경적 비용을 늘리더라도 당장의 수익 기준을 충족시키는 데 골몰하게 되지는 않을까? 억압과 착취를 이제는 자본가의 명령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의 투표로 결정할 뿐인 상태가 출현하지는 않을까?
노동자 경영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 경영 기업이 활동하는 경제 생태계 전반의 변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노동자 경영 기업이 작은 공화국들로 지속, 발전하기 위해서도 영구 평화에 가까운 경제 생태계가 만들어져야한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이런 문제까지는 짚지 않는다. 하지만 '경제 민주화'라는 21세기의 숙제를 완수하려면 이런 물음을 생략하거나 우회할 수는 없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좀 더 총체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확고한 출발점이 필요하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분명 그런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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