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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의 길, 이 책 '목차'가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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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의 길, 이 책 '목차'가 말해준다?

[프레시안 books] 사라 베이크웰의 <어떻게 살 것인가>

서점에서 누군가 이 책을 사본다면, 아마도 책 제목 때문일 터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사라 베이크웰 지음, 김유신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시쳇말로 죽이는 제목이다. 누군가 이에 대한 답을 준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복채를 2만 원도 안내고 용한 이한테 그 답을 달라고 떼를 쓰면 분명히 쫓겨날 터. 책이란 이래서 좋다. 싼 데다 어디서나 읽을 수 있는데다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리바이벌할 수 있으니까.

더욱이 이 책의 부제는 '프랑스 정신의 아버지 몽테뉴의 인생에 관한 20가지 대답'이라 되어 있다. 시쳇말로 입맛이 확 당긴다. 안 읽어보았더라도 <수상록>의 저자라는 사실은 들어는 보았으니 말이다. 더욱이 그 문구 위에는 작은 글씨로 '혼돈의 시대, 오직 스스로를 탐구한 삶의 철학자'라 되어 있다. 이거 상당히 자극성이 높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야말로 혼돈이라는 말로 정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때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살아야 한다. 한 발짝만 삐끗해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이니, 늘 고민하고 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몽테뉴는 스스로 탐구하여 그 길을 열었다니 멘토로 삼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을 다 읽고 할 수 있는 말은, 정말 어떻게 살고 싶은지 궁금하다면 책을 통독할 생각하지 말고 목차만 보며 묵상에 빠져도 된다는 것이다. 스무 가지에 이르는 그 요령은 그야말로 금과옥조이니 굳이 본문을 읽으며 머리 아파할 필요는 없다. 보라, 그 목차를.

1.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2. 주의를 기울여라 3. 태어나라 4. 책을 많이 읽되, 읽은 것을 잊고 둔하게 살아라 5. 사랑과 상실을 이겨내라 6. 작은 요령을 부려라 7. 의문을 품어라 8. 나만의 뒷방을 마련하라 9. 즐겁게 어울리고 더불어 살라 10. '습관'이라는 잠에서 깨어나라

11. 절도 있게 살라 12. 인간성을 지켜라 13. 아무도 한 적이 없는 것을 해보라 14. 세상을 보라 15. 너무 잘하지는 마라 16. 철학적인 사색은 우연한 기회가 있을 때만 하라 17. 성찰하되 후회하지 마라 18. 통제를 포기하라 19. 평범하고 불완전한 사람이 되라 20. 인생 그 자체가 해답이 되게 하라


▲ <어떻게 살 것인가>(사라 베이크웰 지음, 김유신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책읽는수요일
이거 프린트 해 벽에 붙여놓고 명상하면 그 자체가 선의 경지가 아닐런가 싶다. 두루 좋은 말이고 따라 할만하다. 물론 혈기 방장하고 현실 변혁 욕구가 강한, 나이대로 보아 젊은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터다. 너무 잔잔하고 평탄하고 내성적이라 여길 테니 말이다. 그러나 세상풍파를 겪어 본 이들은 회한에 젖어 이 구절들을 곱씹을 가능성이 크다. 짓궂은 제안 하나 하자면 이렇다. 이 책을 창조적으로 읽는 방법이 있다. 본문 읽을 생각이랑 아예 하지 말고, 목차를 적어놓고 그 항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죽 나열해보기. 단, 다른 항목과 겹치거나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말이다. 만약 해본다면 그 순간 우리는 몽테뉴가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 책을 완독하겠다 마음먹었다면 차례대로 읽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이 책은 몽테뉴의 <수상록>을 바탕으로 그의 삶과 사상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했다. 그런데 강조점은 삶에 놓여 있지 사상에 있지는 않다. 그래서 최근에 유행하는 고전 해설서처럼 중요한 내용을 제시하고 이에 대해 소상하게 해설하는 유의 책을 기대하면 실망할 터다. 인용하고 있는 <수상록>의 구절은 인색할 정도이고, 대신 몽테뉴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했다.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해서 평전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몽테뉴를 바라보지 않는다. 이 책은 한마디로 몽테뉴 '빠'가 썼다고 보면 된다. 그의 삶에 대해 칭송으로 일관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지은이가 왜 이 정도로 몽테뉴를 신봉하는가를 먼저 알고 읽어야 책의 논조를 이해하는 도움이 된다.

16장 '철학적인 사색은 우연한 기회가 있을 때만 하라'는 영국인들이 몽테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밝히고 있다. 지은이는 말한다.

<에세>는 18세기에 프랑스에서 수난을 겪었지만, 1724년 코스트가 몽테뉴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한 이래 영국에서는 그를 숭상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영국 독자들은 프랑스 밖에서는 처음으로 몽테뉴의 사상을 받아들여 몽테뉴를 자국에서 배출된 저술가로 여길 정도로 아꼈다. 영국인들의 사고방식에 몽테뉴와 주파수가 맞는 요소가 있었던 것 같다. 다른 나라에서는 지적 변화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데 이들은 그러한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몽테뉴와 주파수를 계속 맞추고 몽테뉴에게 열광하였다.

그렇다면 영국인의 어떤 기질이 몽테뉴를 좋아하게 했을까. 먼저, 가톨릭이 <수상록>을 금서라 하자 영국인들은 그 책을 읽으며 자신들이 가톨릭보다 한수 위라며 좋아했다. 자유롭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스타일이 맞았다. 추상적인 것보다 구체적인 것을 좋아한 몽테뉴의 취향과, 학자들을 불신하고 온건함과 안락함을 좋아하며 가게 뒷방에서 은둔하기 좋아하는 취향이 일치했다. 여행을 즐기며 이국적인 정서에 관심이 많으면서 완곡하고 보수적이다 느닷없이 급진적인 태도가 통했다. 일화가 많고 색다른 인물이 나오고 재치 있는 경구가 즐비하고 환상적인 세계가 나온 책이라 즐겨 읽었다. 한마디로 몽테뉴는 프랑스보다 영국에서 더 열렬한 환영을 받은 저자다. 이 책에서 과장과 억지의 흔적을 보더라도 좀 참고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이 목적한 바는 몽테뉴의 삶을 우리가 수용하면 난세를 잘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데 있다. 그러면 몽테뉴 삶을 지탱한 인생 철학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16장을 먼저 읽었다면 다음으로는 6장 '작은 요령을 부려라'를 읽으면 좋다. 이 장을 보면 몽테뉴가 이른바 헬레니즘 사상, 구체적으로는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회의주의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은이가 보기에 세 학파는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았다.

이 세 학파의 목표는 똑같다. 그리스어로 '에우다이모니아'라고 하는 생활 방식을 성취하는 것으로서, 에우다이모니아는 대체로 '행복' '기쁨' 또는 '인간적인 번영'으로 번역된다. 이는 풍요롭고 즐거운 인생,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등 모든 면에서 잘 사는 것을 뜻한다. 이 학파들은 에우다이모니아에 이르는 지름길은 아타락시아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하였다. 아타락시아는 '침착'이나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움'으로 옮길 수도 있고 '평정'을 뜻하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려나갈 때에도 기뻐 날뛰지 않고 모든 일이 꼬일 때에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냉정함을 유지하는 기술이다. 스토아주의 철학자들이 '아모르파티', 즉 운명을 '받아들이는 법'도 가르쳐준다. 스토아주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모든 일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인생이 평온할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알만하다. 몽테뉴는 어느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용의 삶을 살고자 했다. 이 점이 중요하다. 몽테뉴가 살던 시대는 종교 전쟁이 일어나던 때였다. 어느 한 극단에 속했더라면, 그의 삶이 어떤 혼란에 휩쓸렸을지 모른다. 적절한 부와 걸맞은 명예, 그리고 나름의 권력을 유지하며 산 비결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그러니 이 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지은이가 그리는 몽테뉴라는 벽화를 잘 감상할 수 없는 법이다. 대체로 지은이가 짠 목차대로 책을 읽는 것이 좋은 법이다. 그렇지만 이 순서대로 읽으면 여러모로 쓸모 있다. 과장하면, 이 두 장만 읽어도 이 책의 핵심은 다 파악했다 할 수 있을 성싶다.

근데, 문제는 이 책을 몰입하며 읽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삶이 이토록 평탄해서야 어찌 손에 땀을 쥐며 읽을 수 있겠는가. 요즘말로 하면 부모 잘 만나 할 만큼 공부하고 돈 걱정 없이 사는 박사님 같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선뜻 읽어보라고 권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망설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읽어보지 말라 할 수 없는 것은 아직 내가 철이 덜 들어 역사와 현실에 맞서 싸운 이들의 장렬한 삶을 희구하기 때문이 아닌가싶어서다. 그러니 최종 선택은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몫일 수밖에. 더 아쉬운 것은, 믿을만한 몽테뉴의 <수상록> 번역본이 없다는 사실. 나중에라도 출판되면 꼭 읽어보아야겠다는 결심은 이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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