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브라질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노동 운동이 폭발하고 그래서 좌파 문화의 르네상스가 도래한 듯한 착시를 경험할 때에 나머지 세계에서는 좌파 정치의 결정적 후퇴와 대침체가 진행되고 있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에 걸쳐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에서 사회민주주의, 유로코뮤니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 우파에게 차례로 무릎을 꿇더니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는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역사상 가장 순수한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유일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시기는 지구 위에서 좌파로 살아가기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이제 막 소련 교과서 따위로 좌파 정체성을 습득한 한국의 젊은 운동가들에게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좌파 문화가 우리보다 훨씬 깊이 생활 속에 뿌리를 박고 있던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전향'이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었다. 입장을 고수하는 쪽이 더 희귀했으니 말이다.
이런 세월일수록 원래 서 있던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더없이 미덥게 느껴지게 된다. 물론 그게 불임의 교조주의를 뜻할 수도 있다. 좌파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밀교적 소집단들이 연상되기도 한다. 때로는 한 국가 전체가 그런 사이비 종교 수준으로 추락하는 일까지도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시대의 변화를 예리하게 주시하면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 본래의 이상을 강인하게 견지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세대에서 세대로 횃불을 이어주는 사람들이다. 단순히 건네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꺼뜨리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채로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연료를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지구 자본주의의 핵심부인 영어 사용 국가들에서 지난 수십 년간 이런 역할을 수행해온 지식인 집단을 꼽으라면, 나는 가장 먼저 격월간지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 번역하면 '신좌파평론')>를 들겠다.
이 정기 간행물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논쟁, 시장 사회주의 논쟁, 신자유주의 분석 같은 새로운 시류와의 대결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애초에 설정한 좌표, 즉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지향에서 결코 벗어나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꾸준하며 일관된 오랜 지적 항해에는 언제나 이 잡지의 선장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이 버티고 있었다.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고집한 좌파 지식인
페리 앤더슨의 이름을 알 만한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그의 1976년도 저작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Considerations on Western Marxism)>(이현 옮김, 이매진 펴냄)부터 떠올릴 것이다. 비단 한국에서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앤더슨의 문명(文名)을 널리 알린 것이 20세기 중반 서유럽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의 가장 훌륭한 개요인 이 책이다.
이후 앤더슨은 사상사 분야의 명저로 꼽힐 만한 저서들을 계속 냈다. 위 책의 후속편 격인 <사적 유물론의 궤적>(김필호·배익준 옮김, 중원문화 펴냄)도 그 중 하나이고, 그밖에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Arguments Within English Marxism, The Origins of Postmodernity 등이 유명하다.
▲ <현대 사상의 스펙트럼 : 카를 슈미트에서 에릭 홉스봄까지>(페리 앤더슨 지음, 안효상·이승우 옮김, 길 펴냄). ⓒ길 |
그렇다고 앤더슨이 좁은 의미의 사상사 전문가인 것은 아니다. 그는 도무지 이런 협소한 틀에 끼워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두 권의 대작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유재건·한정숙 옮김, 창비 펴냄)과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김현일 외 옮김, 까치 펴냄, 1997년) 덕분에 학계에서 역사학의 거장으로 인정받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역사학자라고만 하기도 힘들다. 그가 오랫동안 편집장을 역임한 <뉴 레프트 리뷰>에 실린 그의 글들을 보면, 역사학은 물론이고 철학, 법학, 정치학, 사회학 등을 종횡 무진한다.
이런 점에서 앤더슨은 20세기의 전문화된 학자보다는 고전 사회주의자들을 더 닮았다. 고전 사회주의자들 중에서 우리 시대 지식인들처럼 좁다란 대학 학과 편제 안에 갇힌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경제학 책도 썼고, 정치학 책도 썼다. 아니, 그들의 책은 그 자체로 경제학 책이자 정치학 책, 사회학 책이었고 철학책이자 역사책이었다.
이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현재와 같은 대학 구조 안에 갇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로 활동하던 공간은 사회주의·아나키즘 운동의 잡지나 신문이었다. 또는 노동자 학교나 정당의 토론장이었다.
반세기 전, 20대의 페리 앤더슨이 대학을 박차고 나와 신생 저널 <뉴 레프트 리뷰> 편집자가 되었을 때 머릿속에 그렸던 것도 바로 이러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에서 대학 속으로 깊숙이 숨어든 서구 좌파 지식인들을 매섭게 비판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앤더슨에게는 서구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흔히 간과되던 좌파다움의 핵심 문제가 필생의 화두였다. 그 문제란 곧 이론과 실천 사이의 유기적 결합이었다. 실천의 장이 될 만한 혁명적 대중 정당이 부재한 현대 영국 사회에서 이 화두는 타파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뉴 레프트 리뷰> 지면을 통해서나마 끊임없이 영국 좌파의 갱신을 추구하면서 앤더슨과 그의 동지들(타리크 알리, 로빈 블랙번 등)은 이 화두를 놓지 않았다. 그 구체적인 여정은 <현대 사상의 스펙트럼>의 '옮긴이의 말'에 솜씨 있게 잘 정리돼 있다.
아무튼 이런 범상치 않은 지적 추구 덕분에 앤더슨은 '박사 학위 없는' 지적 거장이라는, 21세기에는 꽤 예외적인 지식인 유형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지난 수십 년간의 지적 경박함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았던 것 역시 이런 고집스러운 삶의 조형(造形)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앤더슨을 통해 만나는 좌파와 우파 사상가들
사실 <현대 사상의 스펙트럼>은 국내에 소개되기 쉽지 않은 성격의 저작이다. 저자의 명망성은 충분하지만, 책 내용이 한국 독서 시장에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앤더슨이 다루는 사상가들 중 상당수가 국내 독자들에게는 낯선 이름들이다. 현대 영국 보수주의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인 마이클 오크숏이나 영국 헌정 체제 연구의 권위자 퍼디낸드 마운트가 그 대표적인 예다.
앤더슨의 글 쓰는 방식 또한 장벽이다. 앤더슨은 독자를 고려하면서 글을 쓰는 타입이 아니다. 별 설명도 없이 현대 유럽 여러 나라의 정치적 사건을 비유로 들며, 한 문장 안에 보통의 상식 수준을 넘어서는 인문 지식을 몇 개씩 동원한다. 앤더슨의 박학풍을 어느 정도 쫓아가는 독자이거나 아니면 그것을 참아내기라도 하는 독자가 아니라면 읽어 내려가기 쉽지 않다.
굳이 이런 고충을 감내하면서까지 600쪽에 가까운 책을 손에 들어야 하겠냐면 딱히 반박할 말은 없겠다. 다만, 이 책의 몇몇 부분을 따로 떼어 놓고 읽는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필독의 값어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읽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가령 제12장 "내전, 전 지구적 혼란 : 로버트 브레너"나 제13장 "패배당한 좌파 : 에릭 홉스봄"이 그런 부분에 해당한다.
로버트 브레너의 <혼돈의 기원>(전용복·백승은 옮김, 이후 펴냄)이나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이용우 옮김, 까치 펴냄)는 좌파의 전 지구적 침체기에 나온 몇 안 되는 지적 노작들이다. 이들은 앤더슨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를 깨어 있는 정신으로 견뎌온 사람들이다. 앤더슨은 이들의 지적 탐구를,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저작까지 포함하여, 상세하면서도 비판적으로 정리, 평가한다. 이것은 냉담한 평론가가 아닌 동지의 비평이다.
특히 브레너를 다룬 장(章)은 독자에게 쓸모가 많을 것 같다. 어렵고 장황한 브레너의 책의 문제의식을 앤더슨은 참으로 요령 있게 정리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브레너 테제의 한계를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그것을 보완할 사상가로 지오반니 아리기를 함께 제시하기도 한다. 이 장은 브레너의 책을 읽기 전에 중요한 입문 통로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이미 읽은 이에게도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줄 글이다.
한데 그렇다고 좌파를 다룬 부분이 이 책의 제일 흥미로운 대목이냐면, 꼭 그렇지는 않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곳은 네 명의 '꼴통' 우파를 다룬 제1장 "완고한 우파 : 마이클 오크숏, 레오 스트라우스, 카를 슈미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였다.
그나마 슈미트나 하이에크는 국내에도 어느 정도 소개되어 있지만, 오크숏이나 스트라우스는 번역된 저서도 별반 없다. 앤더슨처럼 자상한 설명과는 거리가 먼 필자를 통해 처음 접하기에는 너무 낯선 인물들이다. 그런데도 막상 그의 필치를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의 다른 어느 대목보다 핍진하게 읽힌다. 그만큼 저자는 치열한 대결 의식으로 이들의 인생 역정을 서술하며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것은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에서 꿈꾸었던 이론과 실천의 재결합이 1970년대~1980년대의 패배 때문에 하염없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앤더슨이 동시대 사상사 읽기에 집착하는 이유를 얼마간 암시해준다. 무엇보다도 그의 관심사는 적들의 진영에 속한 최상의 사상가들을 읽어내는 일이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실천들과 결합된 가장 강력한 이념들을 분석하고 그 균열 지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하이에크를 비롯한 네 명의 '꼴통' 우파들이야말로 이러한 작업의 최적의 상대들이다.
덕분에 우리는 길지 않은 분량의 논문을 통해, 지난 30여 년간 우파 헤게모니의 지적 뿌리가 된 사상가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전 지구적인 반(反) 혁명을 준비해온 과정을 조망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언젠가 에드워드 파머 톰슨이 앤더슨이 오크숏에 대한 글을 쓴다는 소식을 듣고 "오크숏은 악당"이니 "어조를 강경히 하라"고 충고했다는데(285쪽), 앤더슨은 그 유지를 제대로 받든 셈이다. 하드보일드 소설 속 탐정 같은 앤더슨의 냉정한 탐문 수사는 다른 어떤 폭로보다도 우리의 전의를 북돋운다.
문제는 민주주의, 봉기적인 민주주의!
앤더슨이 '꼴통' 우파 사상가들에게서 읽는 것은 마치 종말론 신도마냥 이들을 지배하는 성전(聖戰)의 비전이다. 네 명 중 유일하게 파시즘과 직접 연관된 한 사람, 카를 슈미트는 이것을 가장 묵시록적인 어조로 표명한 바 있다. 그는 데살로니가후서의 사도 바울의 문구를 그대로 인용한다.
"사실 그 악의 세력은 벌써 은연중에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한 자를 붙들고 있는 자가 없어지면 그때에는 그 악한 자가 완연히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당신의 입김과 그 광채로 그 자를 죽여 없애버리실 것입니다." (57쪽에서 재인용)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억제되어온 악의 세력, 최후의 심판에 의해 절멸되어야 할 그 악의 실체는 무엇인가? 독일 파시스트(슈미트), 영국 보수파(오크숏), 유대인 네오콘 선구자(스트라우스) 그리고 오스트리아 출신 시장 지상주의자(하이에크)가 모두 대적이라 생각한 그것은 무엇인가? 앤더슨은 이렇게 답한다.
"캄캄한 뚜껑은 이 일단의 사상가들의 집단적 노력에 어울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무언가를 억제하기 위해 고안된 구조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종국에 가서 그들이 억제하고자 했던 것은 민주주의의 위험성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법 이론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민주주의의 위험성을 법의 부재의 심연으로서 이해했고 두려워했다. 즉 아노미의 미스터리, 무법의 미스터리였다." (57~58쪽)
민주주의. 하지만 4년에 한 번씩 있는 선거, 양대 정당 사이의 선택, 사법 엘리트들의 막강한 최종 결정권 등으로 상징되는 그런 민주주의는 아니다. 이런 민주주의라면 오히려 슈미트나 하이에크 패거리가 즐거이 감내할 만한 것이다. 이런 차원의 민주주의는 지금 이 땅에서도 이미 작동하고 있다.
저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좀 더 원초적인 의미, 즉 봉기의 민주주의다. 인류 역사에서 진정 새로운 헌법적 합의를 만들어온 민주주의, 보통 '혁명'이라는 사건으로 폭발해온 그런 민주주의다. 1987년의 기억이 이미 아련해진 한국 사회는 몇 년 전 촛불 항쟁을 통해 이것을 다시 얼핏 맛보았다. 그리고 지금 지중해 양안(이집트로부터 스페인 그리고 그리스)에서는 그 유령의 돌연한 귀환이 지배자들에게 불면의 밤을 선사하고 있다.
이런 유의 민주주의와 선을 긋는 것이 비단 우파뿐만은 아니다. 중도파 역시 이것을 억제하기 위해 애써왔다. 어쩌면 슈미트가 사도 바울의 문구에 따라 "그 악한 자를 붙들고 있는 자"라고 표상한 것은 이들 중도파 사상가들일지 모르겠다. 앤더슨이 제2부 "철학"에서 다루는 세 명의 사상가, 존 롤스, 위르겐 하버마스 그리고 노르베르토 보비오 같은 대의 민주주의의 형이상학자들 말이다.
이렇듯 우파, 중도파가 혐오하는 거리의 민주주의가 앤더슨에게는 동시대 사상사 비판의 근거가 된다. 그의 이성이 터하는 곳은 냉전(1960년대)과 신냉전(1980년대)에 맞서던 핵무장 철폐 운동이나 베트남 민족 해방 전쟁에 연대해 일어난 1960년대 말 봉기들의 기억이다. 현기증마저 느끼게 하는 이 노(老) 현학자의 얼굴은 놀랍게도 바리케이드 위에 선 젊은 넋의 가면이었던 것이다.
'위안 없는 저항'의 달인의 시선이 머문 것, 중국
2011년은 앤더슨 식의 '비판의 무기'가 다시금 '무기의 비판'으로 전화한 해였다. 사람들은 바리케이드 위의 젊은 혼을 불러내기 위해 더 이상 1968년의 기억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 이집트에서, 칠레에서, 스페인에서 그리고 그리스에서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현대 사상의 스펙트럼>은 아쉽게도 2008년(금융 위기)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매듭 이전에 나온 책이다. 지금 우리가 실감하는 혼돈과 격동이 이 책에서는 아직 희미한 예감의 영역일 뿐이다. 금융 위기 '이후'의 정세에 대해, 2011년 봉기 '이후'의 시대에 대해 앤더슨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이를 위해서는 또 다른 책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겠다.
다만 앤더슨이 편집 사령탑으로 있는 <뉴 레프트 리뷰>의 글들에서 그와 그 주위의 동지들의 시각을 엿볼 수는 있다. <뉴 레프트 리뷰> 최근호(2011년 11/12월호)에 '권두언' 격으로 실린 이 잡지 편집위원 마이크 데이비스의 글 "Spring Confronts Winter"("봄이 겨울을 마주하다")를 보자. 이 글은 2011년에 활짝 열린 전 지구적 저항의 봄에 대해 전망하면서 그 열쇠는 중국 노동 계급이 쥐고 있다고 진단한다.
"2억의 중국 공장 노동자와 광원 그리고 건설 노동자들이야말로 이 혹성에서 가장 위험한 계급이다. (북경의 국무원에 확인해보라.) 이들이 과연 거품에서 완전히 깨어날 것인지가 아마도 전 지구적 사회주의(a socialist Earth)가 여전히 실현 가능한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NLR, no. 2/72, 15쪽)
데이비스의 글은 느닷없는 것이 아니다. 최근 <뉴 레프트 리뷰>의 주 관심사를 대변한 것일 뿐이다. 요즘 이 잡지는 매 호당 거의 3분의 1의 분량을 중국 관련 글들에 할애하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현대 사상의 스펙트럼> 역시 중국 이야기로 끝난다.
앤더슨은 14편의 사상사 에세이들 뒤에 중국에서 활동한 아일랜드계 영국인이었던 자기 아버지에 대한 회상을 덧붙였다. 그의 아버지는 혁명 전 중국 본토에서 해관(海關) 감독관으로 복무했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 이야기를 늘어놓는 뜬금없는 종장(終章)을 통해 앤더슨은 자신의 유년의 뿌리가 중국에 있다는 것을 넌지시 내비친다. 이것은 이후 그와 그의 저널의 주된 관심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 암시하는 전주곡으로 읽힌다.
앤더슨은 냉철한 것 하나로는 최고인 사람이다. 때로는 그것이 너무 지나쳐 욕을 먹기도 한다. 가령 <뉴 레프트 리뷰>의 21세기 첫 호를 내면서는 당대를 "종교 개혁 이후 처음으로 전 세계 사상계에 어떠한 의미 있는 저항 세력도 존재하지 않게 된 시대"라고 했다가 급진 좌파 동료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의 화살을 맞아야 했다. 너무 지독한 비관주의라는 것이었다.
<현대 사상의 스펙트럼>에서도 앤더슨은 "위안이 없는 저항은 위안에 의존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강하다"(471쪽)는 신조를 꿋꿋이 견지한다. 그러면서 이 "위안 없는 저항"의 달인은 만년의 아리기 식의 선망어린 눈빛(중국을 '대안 모델'로 접근한 그의 마지막 저서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길 펴냄)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동쪽을 응시한다.
앤더슨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전 지구적 사회 세력 관계의 균형을 뒤흔들 지구 위의 한 지점, 바로 중국 산업 현장의 화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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