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은 어어 하는 사이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 극심한 통증이 찾아온 것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1층부터 4층까지 김장 배추를 여러 번에 걸쳐서 옮긴 후 물 한 잔 마시고 나서 좀 쉬려고 소파에 앉은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2010년 11월 말 어느 일요일 밤의 일이었다.
심야 전기 히터 위에 걸터앉아 있던 아내는 가슴을 치면서 떼굴떼굴 구르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장난치지 말라고 하고는 다시 텔레비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딸아이가 핸드폰을 누르는 것이 얼핏 보였다. 딸을 향해서 간신히 한마디를 던졌다. 조금 전에 계단에서 마주쳤던 의사인 여동생의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그 와중에 의사인 여동생을 떠올린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딸아이는 가슴을 붙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며칠 전에 같은 반 친구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서 죽었던 일이 생각나서 무의식적으로 119번을 눌렀다고 했다. 무슨 이유였는지 119번에는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딸아이의 연락을 받고 여동생이 바로 뛰어왔다. 나를 바로 응급실로 데리고 가야한다고 아내를 다그쳤다. 같은 건물의 다른 층에 살고 있던 남동생이 나를 업다시피 부축해서 차에 태웠고 아내는 운전을 했다. 다행히 집에서 10분 거리에 종합병원이 있었고 일요일 밤이라 교통 체증도 없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첫 통증을 느낀 지 20~30분 안에 병원 응급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응급 조치가 취해졌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당직 의사가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내 의식은 아련하게 희미해져가고 있었지만 나는 온갖 힘을 다 모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묻는 말에 충실히 대답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팔에 주사기를 꼽고 약을 투여하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도 여섯 개 정도의 비닐 튜브에서 내려오는 갖가지 약이 주사 바늘을 통해서 내 몸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내 몸 상태를 재는 기계들이 온갖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맥박수가 너무 낮은 것 같다는 간호사의 말이 들려왔다. 바로 옆에서 하는 말이 장막 저편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이 들렸다. 혀 밑에는 5분여 동안 작은 응급약 (나중에 알고 보니 협심증 치료제인 니트로 글리세린이었다) 세 알이 차례로 들어왔다.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마약 성분을 투여한다고 의사가 말했지만 더 이상 고개를 끄덕일 여력이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의식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아직은 상황을 분간할 정도의 의식은 붙잡고 있었다. 계기판의 숫자도 저게 뭘까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읽고 있었다.
다른 의사가 와서 비슷한 질문을 반복해서 던졌지만 더 이상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의식은 점점 더 약해져 가고 있었지만 가슴의 통증은 이 때 이미 어느 정도 완화되어 가고 있었다. 심전도를 재기 위해서 약물을 내 가슴에 발랐을 때는 차가운 느낌이 통증보다 더 가깝게 다가왔다.
통증이 줄어들면서 의식도 조금씩 또렷해져 가고 있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서 크게 한번 토하고 나서는 통증도 많이 완화되었고 의식도 제법 맑아졌다.
이 모든 일이 그야말로 아련하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면서 흘러갔다. 상태가 좀 호전되고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주변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계속 옆을 지키고 있었던 아내에게 이제는 괜찮다고 말할 여유도 생겼다. 다음 날 수업과 강연 그리고 그 다음 날 미팅 같은 일정을 취소하는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도 했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아내에게 넘긴 것도 그 시점이었던 것 같다. 딸아이 안부도 묻고 옆에 있던 남동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여동생한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여유도 부리고 있었다.
곧이어 의사가 와서 관상 동맥이 막히면서 '급성 심근 경색'이 와서 내가 쓰러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이미 심장의 한쪽 벽면의 근육이 죽었다고도 말했다. 철망 같이 생긴 일종의 스프링인 스턴트를 관상 동맥에 집어넣는 시술을 곧 시작할 예정이라면서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그런 질문을 했다.
이번에는 말로 대답할 수 있었다. 아내는 수술 동의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내 곁을 떠났다. 이 시점부터 이런저런 생각이 내 의식을 치고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나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서 수술실로 옮겨가면서 내내 천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바닥을 보면서 움직인 적은 있었지만 천장을 보면서 이동한 경우는 없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렇게 느낄 만큼 의식이 충분히 돌아와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젠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혹시 내가 죽는다면 그런 생각도 계속 밀려오고 있었다.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생각보다 적었다. 그럼 생각도 멈추겠지, 참 허무하네, 이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가족들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내와 아이들 걱정이 앞섰다. 죽으면 그냥 영영 이별이란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고는 사람들 생각이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밀려갔다.
그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 상황에서도 하느님 따위를 찾지 않은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즈음으로 잡혀있던 외국 출장이 취소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인도네시아의 어느 정글에서 죽어가고 있었겠지, 나는 운이 좋아, 그런 생각도 밀려들어왔다.
그러다가 생뚱맞게도 유학 시절에 읽었던 셔윈 뉴랜드의 [How We Die]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아내에게 나는 괜찮을 것이라고, 이젠 통증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혼자 집에 남겨진 딸아이 생각에 가슴이 좀 떨렸다. 그 아이가 날 살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술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 의사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다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고 말로 대답할 수도 있었다.
혹시 잘못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금방 이제 와서 뭘 더 바라겠느냐 그런 생각이 밀려들어왔다.
혈관 조영술을 통해서 풍선으로 혈관을 넓혀가면서 필요한 곳에 스턴트를 넣어서 막힌 관상 동맥을 뚫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의사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별 문제없이 시술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온갖 자질구레한 생각들이 오고갔지만 이제 나는 살았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안도하고 있었다.
결국 스턴트 두 개를 관상 동맥에 시술했다. 가슴이 좀 뻑뻑한 것 같은 느낌은 있었지만 다른 증상은 없었다. 회복실을 거쳐서 나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아내와 남동생이 다시 찾아왔다. 아내 손을 한번 잡아보고 걱정 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딸아이에게 잘 말해주라고 당부도 했다. 그 와중에 아내에게
내가 중환자실에서 지낸 이틀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확인은 안했지만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동안 내 앞 침대에 있던 할아버지와 왼쪽 대각선 방향에 있던 환자가 죽어서 나갔다. 스턴트 시술 후 이미 회복 단계에 들어선 나는 중환자실에서는 가장 멀쩡한 환자에 속했다. 중환자실에서 보낸 첫 밤이 지난 다음날 새벽에 아내가 면회를 왔다. 나는 내가 정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일반 병실로 옮겨서 얼마간 경과를 본 후 나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셔윈 뉴랜드 지음, 명희진 옮김, 세종서적 펴냄). ⓒ세종서적 |
집에서 요양 생활을 하면서 기운이 좀 돌아오자 나는 책장을 뒤져서
아내는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를 읽으면서 내가 말했던 내용과 책 내용이 좀 다르다는 말을 했다. 나중에 읽으면서 확인해 보라고 했다. 아내와 나는 평소에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는데, 아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아내의 태도는 죽으면 그야말로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두려운 것이지 죽고 나면 아무런 인식도 없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반면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나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내는 겨울 동안 이 책을 다 읽었고 내게 책을 넘겼다. 봄이 되면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를 정독하면서 읽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3월이 되면서 나는 나들이도 조심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책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내에게 뜻밖의 병환이 찾아왔다.
나는 내가 병자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허둥대면서 지난 1년을 보내야만 했다. 얼마 전에야 다시 이 책을 집어 들고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내의 말처럼 내가 떠올렸던 내 경우와 비슷한 상황은 이 책 속에 없었다.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의 첫 장인 '발렌타인의 몰락 : 심장 질환'에는 이런 사례가 소개 되어 있었다.
"9월 초의 무더운 늦여름 밤 여덟 시경, 맥카티는 흉골 뒤편에서 일어난 강한 압박감이 뒷골 부분과 왼팔 쪽으로 퍼져나가는 증세를 보여 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다. 압박 증세는 병원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 늘 하던 대로 캐멀 담배 몇 대를 피워대며 기름진 저녁식사를 끝낸 뒤, 세 아이들 중 막내에게서 걸려온 전화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에서, 대학교 1학년생인 젊은 여자와 성관계를 갖고 난 직후에 일어났다고 했다."
"응급실에서 맥카티를 진찰한 인턴은 잿빛으로 변한 안색에 발한 증세와 불규칙한 맥박 상태 등을 기록했다. 그로부터 10분이 지나 심전도 기기에 연결된 후부터 약하게 혈색이 돌면서 맥카티의 심장 박동은 정상치로 돌아왔다. 그러나 심전도는 심근 경색이 일어났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만 제외한다면 그의 상태는 거의 정상적으로 보였다."
"내가 침대 옆에 앉자마자 맥카티는 갑자기 목을 뒤로 꺾더니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끌려나오는 괴성을 질러댔다. 그리고 주먹 쥔 양손을 들어 가슴을 힘껏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목과 얼굴이 보라색으로 팽창되었다. 눈동자가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크게 부풀어 오른 뒤 그는 싶게 그리고 허덕거리는 한숨을 내쉬면서 숨을 거두어버렸다."
"소독된 수술 장비 포장을 뜯어내 외과용 메스를 잡아든 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놀렸다. (…) 피가 흐르지 않는 근육질을 몇 차례 메스질 하고 난 뒤에야 흉곽 내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메스를 내려놓은 뒤 나는 양 날개가 달린 금속제 견인기를 절개된 늑골 사이로 밀어 넣은 다음, 날개 쪽에 달린 미늘 톱니바퀴를 있는 대로 다 돌렸다. 그러자 손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생겼다. 나는 그 틈으로 손을 집어넣어 맥카티의 멈춰버린 심장을 힘껏 움켜잡았다."
이처럼 내가 수술실로 가면서 떠올렸던 (내 경우와 거의 같다고 생각했던) 내용과는 비슷한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다. 맥카티는 성관계를 맺은 직후 응급실로 실려 갔다가 갑자기 죽었고, 나는 배추를 나르고 나서 쓰러져서 응급실로 갔고 결국은 스턴트 시술 후 살아났다. 내가 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에 나오는 사례를 수술실로 실려 가면서 떠올렸는지는 (그것도 제멋대로의 기억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책을 이제야 다시 읽고 보니 그동안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던 자신이 쑥스럽기도 하고 그런 잘못된 기억을 진짜로 감쪽같이 믿고 있던 내 자신이 좀 우습기도 하고 그렇다.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는 저자인 뉴랜드가 의사로서 오랜 세월 동안 목격한, '죽음' 자체가 아닌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 죽어가는 과정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심장 질환, 알츠하이머 질환, 에이즈 그리고 암을 비롯한 각종 '질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살인, 사고, 자살, 안락사 같은 죽음의 과정에 대해서도 많은 사례를 들면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뉴랜드는 '우리의 진짜 적, 즉 정작 맞서 싸워야 할 상대는 바로 험상궂게 다가서는 질병이다'고 역설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상세한 과정을 알고 나면 죽음이라는 존재 앞에서 나름대로 공포와 두려움을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뒤에야 비로소 죽음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자기기만과 환멸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회백색 죽음의 공포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 call of death 1936. Kathe Kollwitz |
퇴원해서 집으로 오면서 일단 1년만 잘 버텨보자 그렇게 다짐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1년이 지났다. 아내의 병과 내 병이 겹치면서 혼란스럽고 견디기 힘든 세월을 보냈다. 그 사이 좀 달라진 것은 내가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잃어가는 수애가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에 징그러울 정도로 공감하고 집착하고 있다는 것과 고등학교 때 광주에 살던 한 문학 청년 친구가 써 보내왔던 "사는 것은 살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시구를 새삼스럽게 정색을 하면서 애절하게 떠올린다는 것이다.
그 사이 내 삶에서 정말 달라진 것은 아마도 죽음과 함께 살아갈 숙명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직접 겪었다는 것과 죽음의 그림자를 내 몸뚱아리로 그때그때 즉각적으로 느끼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것일 것이다.
네덜란드 유학 시절에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상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어부들이 청어를 잡아서 산채로 가져오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데 청어란 놈은 스트레스를 잘 받아서 잡히면 금방 죽어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잡아놓은 청어들 사이에 새끼 상어를 한 마리 풀어놓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청어는 상어를 피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죽어라고 도망을 다니게 되는데 그 결과 어부는 살아있는 청어를 팔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 1년, 나는 바로 그 청어처럼 살았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누구에게든 이 이야기를 막 쏟아내고 싶었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넋두리는 끝났고 나는 이 책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1년 동안 제법 의연하게 잘 버텨왔다고 자위해본다. 그런데…참…미치겠다. 그래도 또 1년만 더 버티고 살아 봐야겠다고 다시 다짐한다. 그 청어처럼.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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