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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 "정권이 막은 TV 출연, '그래,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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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대수 "정권이 막은 TV 출연, '그래, 안 한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36> '한국 모던 록의 대부' 한대수

평생을 기타 하나에 의지에 바람처럼 구름처럼 자유롭게 살아왔던 한국 록의 전설 한대수가 59세에 양호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양호와 함께 자유롭던 창공에서 화폐가 필요한 땅으로 내려왔다.

"양호를 낳는 첫날부터 화폐가 필요했다. 이런 내가 59세에 아이를 낳고 보니 '사는 것은 바로 이런 거구나,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구나' 하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갑자기 돈의 노예가 된 것 같았다. 인류 역사에 B.C와 A.D가 있는데, (양호를 낳고 난 후) 나는 마치 B.C.에 살다가 A.D.로 온 것 같았다."

"뒤늦게 양호를 가진 것은 상당한 축복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조건이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양호를 낳은 것도 사실이다. 이 늦은 나이에 돈을 벌어야 하니 참 어렵다. 그래서 요즘 예수 생각이 많이 난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면 예수가 얻어맞고 또 얻어맞고 하는데 지금 내가 그런 느낌이다." '행복의 나라로', '물 좀 주소'로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자유와 반항, 예술의 아이콘으로 기억되는 한대수에게서 '이런 게 형벌을 받는 거구나' 싶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참 생경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양호에게 양호한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의 치열한 하루하루가 그의 지난 삶과 그렇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그건 그의 자유로움이 결코 진공 상태에서의 자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신 시절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TV 출연이 금지되고 '물 좀 주소'라는 곡이 물고문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는데, 솔직히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냐고 묻자 "음악은 음악일 뿐이기 때문에 타협이 힘들다. 어떤 사람에게 맞춰서 음악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비가 오네, 눈이 오네'를 '너도 살고, 나도 살고'로 자꾸 고치면 음악의 맛이 없어진다. 그림도 그렇고 글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창작자가 원래 생각한 대로 나가야 하지 안 그러면 창작이 죽어 버린다"라고 답한다.


또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 초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닌 할아버지(한영교)와 핵물리학자였던 아버지(한창석) 밑에서 태어났지만, 유학 시절 아버지가 실종됨으로써 굴곡진 삶을 살게 된 평범하지 않은 가족사가 청소년이었던 그의 영혼에 많은 아픔을 주었겠다는 질문에 "이 모든 과정들이 내 음악의 소재들이 됐다. 소설도 그런 소설이 없다. 스무 살에 미국에 간 아버지가 실종되었고 그 아버지를 다시 찾았다는 것 자체도 그렇고, 그가 한국말을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록앤롤(Rock & Roll) 자체가 그런 부모로부터 채워지지 않은 욕망,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불만 등에 관한 것인데, 이것들이 다 음악의 소재가 된 것 같다"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미국과 한국에서 경험했던 이방인의 느낌이 그를 고독하지만 홀로 설 수밖에 없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 한대수 ⓒ프레시안(최형락)

그리고 음악이 그를 고독하지만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음악인이어서 참 다행이었던 게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들을 때면 그만큼 1/n만큼 내 고통이 나눠지는 것 같았다. 참 고마웠다. 음악가로서 좋은 점 중 하나가 바로 고통을 많이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이 나의 음악을 듣고 감명을 받을 때, 내게도 그것이 치유가 된다." 음악이 그에겐 그이 거친 삶을 살아갈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행복의 나라로 가자던 그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가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를 만들긴 했지만, 솔직히 행복이 뭔지 잘 모르겠다. 행복을 일부러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냥 매일 아침 'Thank you, lord'라고 하며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며 'One day at a time'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사는 것이다"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가장 어두컴컴한 순간은 언제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매일같이 어두컴컴하다.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살짝 암담했다.

하지만, 자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정치적인 자유로는 인권, 평등 같은 것들이 있겠지만, 내적인 자유가 무엇인지는 공부를 더 많이 해야겠다. 나 자신의 껍데기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나. 사실상 죽음이 마지막 자유야. 나도 모르겠다. 하하하"라며 호탕하게 웃는 그에게서 그가 느끼는 행복과 절망은 종이의 앞뒤 면처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호에게 많은 사랑을 준 아빠, 그리고 양호로 인해서 많은 행복과 즐거움을 받은 아빠로 기억되고 싶다. 그리고 부디 양호가 날개를 펴고 이 세상을 자유롭게 거리낌 없이 날아다니며 살아갔으면 좋겠다"던 그의 눈에서 살짝 빛이 났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반짝하는 빛이 아닌 절박한 빛이었다.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다니기 위해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부단한 날갯짓을 해야 했던 그가 지금은 양호의 자유로운 날갯짓을 위해 부단히 양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다.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 올려다보았던 하늘이 그날따라 유달리 양호하게 보였다.

"제가 대수지 예수는 아니잖아요. 지금의 상황은 평생을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형벌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여섯 살이 된 양호가 너무 예뻐 지금의 삶을 견뎌내고 있습니다"라고 한 인터뷰를 읽었다. 지금의 삶이 형벌이라고 느껴지는 때는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나는 참 자유롭게 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참 자유롭게 살아왔구나 하는 게 더욱 느껴진다. 당시엔 내가 그렇게 자유로웠다는 걸 몰랐다. 혼자 살 때는 음악을 하면서 공연도 하고 앨범을 만들면서 조금씩 돈이 들어오니 사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친구들과 술을 한 잔 마시더라도 내가 계산 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나를 알아보는 술집 주인 덕에 공짜 술을 마시기도 했다. 사실상 돈이 별로 필요하지도 않았다. 뉴욕과 서울을 오가면서 공연하는 동안 호텔에서 머물기도 하고 돈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이 생겼고, 난생 처음 자본주의가 무섭다는 걸 깨달았다. 양호를 낳는 첫날부터 화폐가 필요했다. 서양 여자들은 보통 자연분만을 꺼려 제왕절개를 하는데 거기에 드는 수술비, 입원비 등 화폐가 많이 들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번 맞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37년을 뉴욕에 살면서 한 번도 돈을 모아본 적이 없었다. 뉴요커들은 주급을 받기 때문에 돈을 모으는 개념이 없다. 금요일에 주로 돈을 받는데, 받은 즉시 돈을 다 써도 며칠만 참으면 다시 돈이 나오니 모을 필요가 없다. 게다가 워낙 방값이 비싸니 돈을 모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억대 연봉을 받는 1퍼센트의 사람을 빼놓고는 다들 한 주 한 주 살아간다. 이런 내가 59세에 아이를 낳고 보니 '사는 것은 바로 이런 거구나,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구나' 하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갑자기 돈의 노예가 된 것 같았다.

동시에 옥사나의 약물 중독 증세까지 더 심해졌다. 아이를 낳고 난 뒤 산후우울증이 더해져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한쪽에서는 부인, 한쪽에서는 아이, 나는 양쪽에서 얻어맞았다. 미치겠더라. 주위에 손을 벌릴 수 있는 일가친척도 없고 도움을 구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 삼촌, 고모도 없고 어머니는 지금 요양원에 계시는데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다. 나는 모자란 게 있어도 아이는 모자라면 안 되는데, 분윳값도 그렇고 기저귓값도 장난이 아니었다. 정말 막막한 상황에서 직장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던 차에 아리랑TV에서 연락이 왔다. 록 프로그램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라디오 진행을 시작했다.

ⓒ프레시안(최형락)

누군가는 '음악을 계속하면서 수입을 얻을 수 있지 않나'하는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 인생이라는 것이 클라이맥스가 있고 또 내려오는 시기가 있는데 나는 이미 12년 전에 클라이맥스를 맞았다. 내가 일본 공연 후에 25년 만에 서울에 왔을 때 난리가 났었다. 그때 같으면 이렇게 나와 인터뷰하지 못했을 거다.(웃음)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두 번, 펜싱 경기장에서 한 번, 세종문화회관에서 세 번, 이대 운동장에서 한 번 공연을 했고 3만 명이 몰렸다. 그때 속으로 '다들 왜 이러지?'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랬던 음악인생의 절정기에서 이제는 내려온 것이다. 당연히 음악으로부터 얻어지는 수입은 많지 않다.

내 딸 양호는 새로운 생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아이의 미래를 최대한 보장해 주고 싶다. 그래도 아버지인 내가 딸이 이 거친 세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총알은 보급해 줘야 하지 않나.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변해야 했는데 막상 사회에 뛰어들어보니 이 사회가 참 많이 변해있더라. 인류 역사에 B.C와 A.D가 있는데, 나는 마치 B.C.에 살다가 A.D.로 온 것 같았다.

양호가 태어난 순간이 형벌이라는 의미는 무엇이었나?

뒤늦게 양호를 가진 것은 상당한 축복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조건이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양호를 낳은 것도 사실이다. 요즘 청년들이 일자리가 없다고 하는데 이 늦은 나이에 돈을 벌어야 하니 참 어렵다. 출퇴근하는 것도 힘이 들지만, 옆에서 나를 뒷받침 해 줄 사람이 없다는 점도 힘들다.

내 하루는 예전과 완전히 반대가 됐다. 옛날엔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를 마시며 곡을 구상하면서 여러 자료들에 대해 연구하고 고민하곤 했다.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보고,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다시 집에 들어와서 책을 쓰기도 하고 곡 구상도 하고 작곡도 했다. 오후에는 (노래 가사처럼) 국수나 한 그릇 마시고, 낮잠 한숨 자고, 또 산책을 하러 나간다. 저녁쯤 되면 친구들에게 전화가 온다. 그러면 나가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떠들다 집에 돌아와 TV를 보다 잠이 드는 정말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지금은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아이 입힐 옷을 준비하고, 아이가 일어나면 씻기고 유치원에 데려다 준다. 그런 후에 9시 라디오 방송을 준비하기 위해 방송국에 8시까지 칼같이 출근한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은 굉장히 몰입해서 방송을 한다. 요즘 사람들은 말에 대해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방송에서 말 한 번 잘못 하면 난리가 난다. 방송국 국장에서부터 청취자들까지 모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서 재미있게 말을 하되, 종교적·정치적·사회적으로 어떤 입장에 있든 사람들로 하여금 모욕을 받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쓴다. 또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여성에 대해 지나친 농담을 하면 여론의 뭇매를 맞을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사실 두 시간 동안 참 피곤하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부인이 몸이 좋지 않으니 내가 직접 밥을 한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나는 된장찌개, 그녀는 스테이크 이렇게 두 번을 요리한다. 밥을 먹고 나면 집이 엉망이니 청소도 하고 집안일을 하다가 양호 유치원이 끝날 때 쯤 데리러 가서 집에 와 목욕을 시키고 놀아 준다. 애들이 힘이 좋으니 같이 놀아 주는 것도 엄청 힘들다.(웃음) 이렇게 하루가 다 간다. 밤에 누가 나오라고 해도 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 게 형벌을 받는 거구나' 싶었던 거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자유롭게 살아왔더라. 1958년도에 태평양을 왔다 갔다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나. 당시는 여권도 안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보통 사람들은 여권이 뭔지도 몰랐다. 그런데 나는 그때부터 태평양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면서 너무 일찍이 자유를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예수 생각이 많이 난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면 예수가 얻어맞고 또 얻어맞고 하는데 지금 내가 그런 느낌이다.

"어떤 때는 내가 정신병자가 되나 싶기도 한데 그 누가 채찍질해줄 사람이 가까운 사람이 몇 명 안 된다.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해야 된다"라고 한 인터뷰를 보았다. 자신이 힘들고 어려울 때 채찍질해주고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평생을 구속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를 희망했던 것의 결과이기도 한데, 지금 이 시점에서 그렇게 살아온 삶이 후회스럽지는 않은가?

하나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동안 그렇게 자유롭게 살았기 때문에 내 음악을 추구할 수 있었다. 결혼생활도 평탄치는 않았지만 많은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50년대·60년대 히피문화가 꽃피던 뉴욕의 황금기에 그곳에서 살았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고 고마운 일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때만큼 한국과 뉴욕을 그렇게 자유롭게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

그때는 'Flower Power'라고 모든 게 변하는 시기였다. 1964년도에 비틀스가 나왔고 지미 핸드릭스, 롤링스톤즈 등 여러 록 가수들이 세상에 나왔다. 사랑에 대한 시위, 평화에 대한 시위가 일어났고 사람들이 길에서 마주치면 "형제들이여 평화를!"이라고 외치곤 했다. 굉장히 아름다웠다. 젊은이들이 집을 뛰쳐나오니 나이 든 히피들이 'Digger's Free Store'라고 해서 작은 가게를 열어 물건 같은 것은 놓고 공짜로 가져가게 했다. '우리는 서로 형제'라는 의식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고 체제도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여성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성적인 자유를 얻었다. 1965년도에 피임약이 발명되었는데 이것을 통해 이제는 여성들도 성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60년대 여성 운동도 시작됐는데, 여성들이 거리에서 브래지어를 태우며 자유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이때부터 여성들이 직장을 갖기 시작하면서 성적 자유를 넘어 경제적 자유를 얻었다. 성과 화폐로부터의 자유, 이 두 가지로 이 시기에 여성의 자유가 완성됐다.

ⓒ프레시안(최형락)

흑인운동도 활발했다. 지금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든 것은 60년대 마틴 루터 킹의 인권운동을 통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마약 문화도 그때 시작됐다. 인류 역사 내내 존재하던 마약이 고급 기호품으로 주로 상류사회에서 자기들끼리만 즐겼던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것이 대중에게도 풀리게 된 것이다. 마리화나, LSD, 코카인 등이 시중에 마구 풀리니 사람들이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다. 지미 핸드릭스의 첫 번째 앨범 이름이 <Are you experienced?>이다. 즉 마약의 환상적인 여행을 해 봤느냐는 거다. 결국 그 사람은 마약을 너무 많이 해서 27살에 죽었지만 말이다.

당시는 이렇게 전체적인 관점이 달라지는 시기였다. 우리의 일상이 아버지가 열심히 일하고 봉급 인상을 받고, 1년에 2-3주 휴가를 내서 놀러 가고, 방이 두 개인 아파트에 살면서 큰 자동차 타고 다니는 그런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다들 그런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었다.

행복했던 뉴욕에서의 삶과는 전혀 다른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 채찍질을 해가며 살아갈 힘은 어디에서 나오나?

솔직히 힘이 하나도 없다. 겨우겨우 하루살이 인생을 살고 있다. 이제 할아버지가 다 됐고 힘이 다 빠졌다. 근래에 옥사나의 알코올 중독 증세가 더 심해지면서 병원에서 여러 번 치료를 받았는데, 사실상 우리나라 남자들의 1/3이 알코올 중독이라고 한다. 중독자가 있는 집안은 그냥 하루살이 같은 삶이 이어질 뿐이다. 오늘 하루 잘 지내면 감사한 것이고 미래를 생각할 수가 없다. 'One day at a time'이다. 오늘 하루를 안전하게 잘 보내고 나면 그다음 하루를 잘 보내면 되고 그 하루가 1년, 2년이, 평생이 될 수 있는 거다.

하루하루가 소중하겠다.

소중하면서도 굉장히 어렵다.

양호와 아내는 한대수에게 어떤 존재인가?

보통 사람들이 결혼할 때 '가난하든 부유하든 병이 들든 건강하든 서로 한평생 의지하며 살겠다'고 약속을 한다. 나도 그 약속처럼 아내와 좋은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리고 양호는 새 생명이므로 숙녀가 될 때까진 내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특히 나는 아버지가 실종되고 어머니가 재가하면서 부모가 없이 자란다는 것에 말도 못할 아픔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것을 양호한테 물려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작곡은 내 마음의 상처의 치유다. 그리고 내 음악이 여러분들의 상처에 치유가 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라고 했다. 스스로에게 가장 치유가 되는 노래가 있다면?

내 노래는 다 좋다.(웃음) 모두 그때그때의 기분을 담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서너 곡 밖에 안 되는데 아무래도 음악은 그 작곡가가 죽어야 귀에 들리는 모양이다. 베토벤도 그랬고, 모차르트의 음악들도 그랬고, 그들도 죽은 뒤에야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지미 핸드릭스, 존 레논 등의 음악도 그랬고, 우리나라의 김광석 씨도 마찬가지였다.

ⓒ프레시안(최형락)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런 것 같다. 첫째는 그 사람이 그리워서 음악을 듣게 되는 것이고, 둘째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동료 음악인들이 더 이상 질투를 느끼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연예인들 사이도 그렇고, 어느 전문 분야나 그들 사이에 질투심이 있기는 마찬가지 인데 아티스트들의 질투는 굉장히 무섭다. 어떤 아티스트가 굉장한 실력이 있으면 당시는 열렬한 질투의 대상의 되었다가 그가 죽어 버리면 더 이상 질투의 대상이 안 된다. 그러면서 그제야 그의 작품이 꽃을 피운다.

'물 좀 주소'라는 노래를 통해 여러 사람들이 상처를 치유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물'이라는 말에서 오는 상징적인 의미가 군사정권 하 엄혹한 시절에 무언가 '희망'을 이야기 것 같아 힘을 얻곤 했다는 사람도 있다.

고함을 지르는 창법이라서 그런가 싶다. 'Primal Scream'이라는 창법인데, 인간이 자기의 분노와 슬픔을 원시인처럼 내지르는 방법이다. '물 좀 주소'는 내 모든 억눌린 감정과 욕망을 모두 표현하는 노래다. 그래서 답답할 때 이 노래를 부르면 참 좋다. 시원하게 한 번 지르고 나면 속이 풀린다.

(사람들이) '물'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해석해 주니 나도 고맙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땐 '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가 물 부족 국가라고 하는데 전 지구적인 상황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전 세계가 석유를 갖고 전쟁을 하지만 미래엔 물을 두고 전쟁을 할 것이다. 사람이 물이 없으면 죽기 때문에 석유 전쟁보다 물 전쟁이 더 무섭다. 지금 보니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물은 사랑이요~' 누가 작곡했는지 참 잘했다.(웃음)

그 당시 한대수에게 '물'은 어떤 물이었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갈증이라고 할까. 어릴 때 어머니하고 같이 살다가 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어느 날 탤런트 애인이 우리 집에 찾아왔는데, 그 여인과 양호하게 사랑을 나누고 있다가 갑자기 어머니가 방문을 여는 바람에 들켜 버렸다. 그것을 본 어머니가 우리에게 물을 확 끼얹으며 나가라고 했다.(일동 웃음) 어머니와의 관계도 아주 복잡했다.

가사를 쓸 때 보통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이 있나?

나의 경우는 작곡과 작사 중 작곡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클래식, 재즈 등 가사가 없는 음악은 많지만 곡이 없는 노래는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곡이 중요하고 곡이 훌륭해야 좋은 가사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곡이 몸이라면 가사는 패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몸매가 아름다우면 아무거나 입어도 예쁜 것과 같다. 안 입으면 더 예쁘다.(박장대소) 나는 가사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인데 당시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서 표현하지만 돌려 말하지 않고 노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국수나 한 그릇 마시고, 치마 구경하고~' 하는 가사들이 나올 수 있다.

'지렁이'라는 노래 듣고 깜짝 놀랐다. 가사를 먼저 쓰고 작곡을 했나, 작곡을 먼저 하고 가사를 쓴 것인가 궁금했다.

이 노래는 곡과 가사를 동시에 작업했다. 어느 날 옥사나가 치료를 받고 있는 병원에 갔다가 영감을 얻었다. 그 곳엔 정신병자도 많이 있었는데 그 중 어떤 할머니가 벽에 대고 혼자서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무언가 본인이 억울한 것들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았는데, 네 시간 내내 혼자서 그러고 있는 거다. 그래서 계속 듣다보니 마치 랩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바로 집에 돌아와 '지렁이'의 가사를 썼다.

다른 노래에 있는 '베토벤 생각이 나는구나', '피카소같이 마지막 연애나 한 번 하고 싶구나'와 같은 가사들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베토벤이나 반 고흐 같은 사람들은 죽고 난 뒤에 명성을 얻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피카소는 근래의 화가 중에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 부귀를 누린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돈, 사랑, 명예 등 모든 걸 누렸는데 부인 뿐 아니라 애인도 있었고, 정력도 좋아 아흔 살 정도까지 살았다. 그런데 그런 피카소도 마지막에 가서는 "연애나 딱 한 번 더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더라. 언젠가 뉴욕에서 피카소의 마지막 작품을 봤는데 전부가 포르노였다. 그것도 끔찍한 하드코어였다. 붓을 들 힘이 없어 연필로 드로잉을 하며 포르노를 그리면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 거다. 이처럼 피카소같이 늙고 아플지언정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연애나 한 번'하는 소망이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가사를 쓴 거다.

노래를 듣다보면 특정한 형식이 없이 매우 자연스러운 기운이 절로 넘친다. 어쩔 때는 그냥 고함이나 흥얼거림 자체도 리듬으로 들린다. 그런 실험들을 과감히 해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형식이 없는 것도 있지만 굉장히 짜임새 있는 형식을 갖춘 것도 있다. 재즈 풍, 하드 록 풍 등 앨범마다 조금씩 다르다. 고의적으로 형식의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이 전 앨범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음악이 너무 똑같으면 나도 그렇고 듣는 사람도 별로다. 음악을 만들 때는 당시 내 주위에 어떤 음악가들이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데, 뉴욕에 있을 때는 이우창 씨와 잭 리라는 재즈 뮤지션을 알고 지냈다. 그러다 보니 내 음악도 자연스럽게 재즈 분위기로 가더라. 또 어떤 때는 뉴올리언즈에서 프리저베이션 홀 밴드를 보면서 당시 내 음악도 블루스 느낌이 많이 났다. 함께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전환점마다에도 음악이 달라져 왔다.

▲ 딸 양호가 어버이날을 맞아 아빠를 위해 꽃을 만들어 왔다. ⓒ프레시안(최형락)

유신 시절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TV 출연이 금지되었다. 이후에는 '물 좀 주소'라는 곡이 물고문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고, 다른 곡들까지 연타로 금지곡이 되어 창작활동을 제한받게 되었다. 솔직히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나?

음악은 음악일 뿐이기 때문에 타협이 힘들다. 예를 들어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유럽을 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위한 심포니(3번 교향곡)을 썼다. 그러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스스로 왕관을 쓰는 것을 보고 '아, 저 사람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그 곡을 에로이카로 고쳐 썼다. 어떤 사람에게 맞춰서 음악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비가 오네, 눈이 오네'를 '너도 살고, 나도 살고'로 자꾸 고치면 음악의 맛이 없어진다. 그림도 그렇고 글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창작자가 원래 생각한 대로 나가야 하지 안 그러면 창작이 죽어 버린다. Custom Make가 아니다. 아이스크림처럼 고객이 초코 맛과 바닐라 맛을 섞어달라고 해서 섞어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돈이 툭툭 떨어져 나가는 게 보이면,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살짝만 입장을 바꾸면 돈이 들어올 텐데,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나?

나는 음악을 시작할 때부터 인기를 얻어야겠다거나 돈을 벌겠다는 목적이 없었다. 한국에 와서 음악을 하다 보니까 가수도 되고 인기도 얻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때 기타를 배우면서 혼자 작곡하면서 노래를 내 마음으로 표현하다보니 양호한 여인들이 와서 음악도 좋다고 하고 같이 피자도 먹으러 가자고 데이트 신청도 했다.(웃음) 그냥 즐거움으로 음악을 한 것이다. 한 동안 서울에 와서도 그런 식으로 음악을 했다. 오비스 케빈이나 세시봉 같은 가수들과 무대에 함께 서면서 자유롭게 노래한 것이지 한 번도 '나는 가수가 되겠다, 돈을 벌겠다'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그래서 정권이 강제로 내게 TV 출연을 하지 못하게 했을 때도 '오케이, 안 한다'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되니 사람들이 내게 돈을 주면서 함께 음반을 만들자고 했다. 나는 속으로 '내가 가수가 됐나, 왜들 이러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까지 전혀 목적의식이 없었던 거다. 요즘은 가수가 되려면 어릴 때부터 트레이닝을 받고 얼굴도 고치고 해야 한다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대수를 가리켜 '한국 모던 록의 대부'라고 하는데, 어느 순간 스타가 됐을 때 그동안의 중심을 잃고 흔들리지는 않았나?

유명해진다는 것은 십자가와 같이 큰 짐을 지는 것과 같다. 일반인으로 살 때는 누구 하나 쳐다보는 사람도 없고 술을 마시건 애인과 키스를 하건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름을 얻고 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달라진다. 유명인은 도마 위에 얹어진 생선과 같다. 사람들이 막 자르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마이클 잭슨이다. 그는 너무 어릴 때 유명해져서 나중에 가서는 가게에서 우유조차 사는 것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프라이버시가 없어지고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명해진다는 것은 다루기가 힘든 괴물과도 같다.

그렇지만 적당하게 유명해진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게 조금 유명해지면 '누구누구는 알아보는데, 왜 난 못 알아봐' 하는 심리가 생기는데 그러면 더 유명해지려고 노력한다. 유명해지는 것은 양면성을 가진 칼이다. 잘 자르면 맛있는 사시미가 되고 못 자르면 희생을 낳는다.

양면성을 가진 칼을 본인은 어떻게 조절할 수 있었나?

자연스럽게 조절했다. 어떤 사람들은 유명인이 되면 선글라스를 끼고 태닝한 차 뒤에 앉아 다니는데, 난 그런 게 없다. 내 맘대로 거리를 다니고 지하철을 타고 백화점에 가서 쇼핑도 한다. 분위기에 따라 사람들이 많이 달려들 때도 있고 전혀 안 그럴 때도 있다. 사람들이 사인을 해달라면 해주면 된다. 물론 어떤 때는 피곤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다.

ⓒ프레시안(최형락)

지금과 같이 스마트폰이 있는 사회에서 스타는 개인의 사생활이 노출되기 쉽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오만 것(모든 것)을 다 촬영한다. '내 옆에 한대수 할아버지 있다'며 글을 올리고, '코를 후비고 있다'라며 사진을 올리는 것이 모두 가능하다. 심한 경우엔 스마트폰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망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유명 디자이너인 존 갈리아노가 술을 마시고 반(反) 유대인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을 누가 촬영하여 대중에게 공개하는 바람에 한 방에 가 버렸다. 패션계 상권을 유대인이 모두 잡고 있는 상황에서 그 디자이너의 발언이 파장을 일으켰던 것이다.

<뚜껑열린 한대수>(도서출판 선 펴냄)라는 책에 보면 "큰곰은 군을 제대하고 나서 인생관이 많이 변했다. 인류에 희망을 더욱더 잃었고, 그것이 음악에 반영이 됐다"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영이 되었나? 그리고 군대를 굳이 안 가도 되지 않았나?

당시 미국과 베트남이 전쟁을 하고 있었고, 우리 군인도 베트남에 참전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나도 물론 군대에 가야했다. 그런데 그 시간은 정말로 힘든 시간이었다. 거의 죽을 뻔 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많이 맞았다. 그때 인간은 악한 동물이란 것을 느꼈다. 선임들이 훈련을 가혹하게 시켰고, 군기도 심하게 잡았다.

3년 3개월이라는 시간을 어떤 식으로 견뎠나? 선임이 되었을 때는 어떻게 했나?

군인이란 존재를 철학적으로 본다면 무조건 복종하는 존재다. 계급적 질서에 따라 상관의 지시가 내려오면 질문도 못 하고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적을 왜 죽여야 하느냐'고 물으면 안 된다. 살인 기계처럼 그냥 죽여야 한다. 그 자체로 군인이라는 것은 내 철학과 너무 안 맞았다. '내가 왜 나와 아무런 이유도 불만도 상관도 없는 저 사람을 죽여야 하나? 국가적으로, 사상적으로, 종교적으로 다르다고? 저 사람도 한 인생이고 나도 한 인생인데 누구에게 죽일 권한이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자체로 너무 괴로웠다. 매일같이 때리니 더욱 괴로웠다. 심지어 때리지 않을 때는 '언제 빠따 때리려고 하나? 언제 집합 시키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에 잠이 안 왔다. 새벽 3시에 깨워서 때릴 때도 있었는데, 그날 그렇게 맞고 나서야 '이제 자겠구나' 하고 마음이 놓일 정도였다.

내가 병장이 됐을 때 나는 한 번도 후임들을 때리지 않았다. "대수 너 때문에 기합 다 빠졌다"라고 동료들에게 욕도 많이 얻어먹었지만 그래도 야구방망이로 사람을 때리는 것은 못 하겠더라. 내가 원래 덩치가 크기도 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작아서 때릴 데도 없었다. 보통 선임이 되면 복수심 같은 게 있어서 후임들을 더 괴롭힌다고 하는데 나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군대 시절에 평화에 대한 감수성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은 지금 시대 청년들 중에도 육체적으로 힘들다 보면 인성이 바뀔 수도 있을 텐데, 본인이 생각하는 것을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도 바꾸지 않는 힘은 철학으로부터 나오는 건가.

기본적으로 나는 평화주의자다. 나 같은 사람은 군인이 되면 안 된다. 사람을 때리는 것은 나와 맞지 않는다. 사람을 세워 놓고 어떻게 동물을 패듯이 할 수가 있나.

가족사가 참 평범하지 않다. 할아버지 한영교 박사는 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낸 분이고, 아버지는 핵물리학자,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인 소위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미국에 유학 간 아버지가 실종되면서 굴곡진 삶을 살게 되었는데 결국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그런 아버지와의 만남이 본인에 어떤 영향을 준 것 같나?

이 모든 과정들이 내 음악의 소재들이 됐다. 소설도 그런 소설이 없다. 스무 살에 미국에 간 아버지가 실종되었고 그 아버지를 다시 찾았다는 것 자체도 그렇고, 그가 한국말을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그렇게 그리워했던 아버지를 만났지만 기대했던 관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록앤롤 자체가 그런 부모로부터 채워지지 않은 욕망,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불만 등에 관한 것인데, 이것들이 다 음악의 소재가 된 것 같다.

아버님의 실종이라는 상황 뒤에 '빅 파워'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 국가의 이익 때문에 한 개인의 인생이 지워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치,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된 건가?

그렇다.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이 컸다. 미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당시 말도 안 되게 힘이 약한 상태였고 가난도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미국에게 항의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다. 당시 미국의 힘은 필리핀 등 각국의 대통령도 마음대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미국은 전 세계의 가난한 나라에게 원조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도 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부자 아저씨가 돈을 주면서 '너는 이걸로 머리 깎아라, 너는 여기로 시집가거라' 하는 식으로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님이 그렇게 되는 걸 보면서 그 가족의 일원으로써 권력이 우리 가족을 주목하고 있는데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 '빅 파워'의 존재가 무서웠을 수도 있는데, 그럴수록 위축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저항적인 노래를 부른 게 신기하다.

무섭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마치 편집증 같은 증상인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대부분 나의 감정들은 음악을 통해 많이 해소됐다. 사실 내 노래 '파라노이아'가 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작곡을 했는데 들어보세요.

노래나 책에 보면 평화, 빈곤, 민주주의, 전쟁, 인권 등에 대한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많다. 미국에서는 동양인으로, 한국에서는 양키로 놀림을 받으면서 늘 경계인의 삶을 강요받았다. 이런 것들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되었나?

그 당시는 유학이란 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가서야 처음으로 내가 동양 사람이란 것을 느꼈다. 그들은 나를 무조건 '차이니즈', '칭총'이라고 불렀는데 말하자면 '중국 놈'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백인들의 우월감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것 같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혼란의 시기를 보냈다. 물론 너무 어려서 체제에 대해 이해를 잘 못해서이기도 했지만, 스스로가 물 위의 기름처럼 이 사회에 잘 융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때부터 나는 완전히 독립주의자가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내 나름대로의 독립적인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내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찾아 계속 밀고 나갔다. 내가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Herd Mentality'인데 니체가 말한 '소떼 근성'을 별로 안 좋아한다. 왜냐하면 때로는 'Herd Mentality'가 옳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각 개인이 행동하고 판단하는 'Individual Thinking'을 좋아한다.

여러 사회 중에서도 한국 사회에 이런 문화가 더 심하다. 예를 들면 경기고-서울대 출신, 경상도 출신, 전라도 출신, 해병대 출신 등의 그룹들이 있어 자기들끼리는 잘 돕지만 다른 그룹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과연 이런 그룹들이 형성되어 그들끼리만 위하는 것이 모든 사회에 유익할 지 의문이다. 영어로 이것을 '클리키즘(Cliqusim)'이라 한다. 양호하지 않다.


스스로의 정체성 만들어 갔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니체도 말했듯이 사람이 그룹에 속해 있으면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히틀러의 나치즘처럼 'Group Thinking'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로 인해 600만 명의 유대인이 사살됐다.

미국과 한국에서 경험했던 이방인의 느낌은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하는데, 이것을 오히려 혼자 다독이며 새로운 나만의 정체성을 찾는 홀로서기의 시간들로 어떻게 확보할 수 있었나?

홀로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모두는 양면성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악함과 선함, 여성성과 남성성 등 전부 이중성을 갖는다. 나 같은 경우는 동양과 서양의 양면성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뿐이다. 이러한 양면적 정체성은 아티스트에게는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 두 문화를 밀가루 반죽하듯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아티스트들 중에는 두 문화를 가진 사람이 많은데 그 중에서 살바도르 달리, 피카소, 베토벤 등이 그렇다. 피카소는 스페인 사람으로 파리에 가서 프랑스 문화를 흡수해 초현실주의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고, 독일인인 베토벤도 비엔나에 가서 오스트리아의 여러 문화를 흡수했다.

그렇지만 한 개인의 삶으로서 양면적 정체성을 갖고 산다는 것은 지옥이다.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어떤 그룹에도 낄 수 없으니 인생사가 항상 힘들고 고독하다. 나는 그 사람을 분명히 이해한다고 생각하는데, 저 사람은 내가 경험한 것을 해보지 않고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고독해지는 길 밖에 없었다. 그 고독을 음악으로 풀어낸 것이다.

유신정권 때 노래가 금지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2005년 CBS라디오에서 본인을 탄압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 "30년 동안 작고 가난했던 나라가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급성장한 예는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내 노래 '물 좀 주소'보다 줄 물조차 없었던 가난극복이 더 절실했다. 박 전 대통령은 나쁜 일도 많이 했지만, 국론분열보다 밝은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 분이 이뤄낸 경제적 성과만은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이야기해 논란이 된 것이 있었다. 한대수라는 인물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자유·해방·억압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고, 더욱이 유신정권에 의해서 예술적 기회를 박탈당했던 장본인이었기에 이 발언의 진의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았다.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있었다면?

지금 세대는 과거 우리 세대가 어느 정도 가난했는지 실감이 안 날 거다. 고기도 없고 하얀 쌀밥도 없었다. 막 결혼 했을 때 작은 고기 한 점을 가지고 여러 번 먹기도 했다. 경제가 없으면 개인의 삶도, 문화 예술도 없는 것이다. 경제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야 문화 예술이 있고, 거기에서 혁신적인 발명들도 나올 수 있고 평화로운 세상도 꿈 꿀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 부분을 가능케 하도록 엔진의 시동을 걸었다. 난 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 사실에 대해서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대수가 말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 2011년 공연 당시 ⓒ조상호

음악적 제재를 당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미워할 이유는 없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적으로 경제발전의 시동을 걸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가 이만큼 올 수 있었다는 건 누구라도 인정해 줘야 한다. 정치인 중에서 한 가지 문제도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칭기즈칸을 가리켜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고 백만 명을 죽이면 정복자다'라는 말을 한다. 전 세계를 휩쓴 대단한 위인이지만 그도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한 결과가 무엇인가'라는 판단은 '그 사람의 90%의 나쁜 점을 볼 것인지, 나라를 위해 희생한 10%를 볼 것인지' 하는 사이에 있다. 내 생각에는 50 대 50이다. 좋은 50이냐, 나쁜 50이냐는 여러분이 판단하시오.

작년에 새누리당이 추진하는 일자리 프로젝트의 로고송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서 "1970년대 저항가수의 '원조' 격인 한대수가 새누리당이 추진하는 일자리 프로젝트의 로고송을 만들었다"라며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기존의 저항가수 한대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대수가 왜 굳이 새누리당의 로고송을 제작했나'라고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혹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나?

그건 정정해야 한다. 나는 새누리당 행사를 위해 노래한 적이 없다. 새누리당과 관련된 'K-move'란 단체에서 젊은이들을 해외로 보내 트레이닝을 시키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는데, 그 단체의 로고송을 만든 것이다. 새누리당과 간접적으로 관계되어 있긴 하지만 새누리당을 위해 노래를 만든 건 아니다. 당 행사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다만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구하는 일을 한다는 취지가 좋아 참여하게 된 것이다.

12년 전 민주노동당에서 내 노래 '행복의 나라로'를 가지고 로고송을 만들어 선거에 쓴 적이 있다. 그 때 고맙게도 다섯 명이 당선돼 난리가 났다. 그 덕에 노회찬 씨와 술도 한잔 했다. 물론 내 노래를 써서 당선된 건 아니지만 노래 안에 있는 가사도 좋고 이것이 선거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내 노래를 로고송으로 쓰지 않는 당이 이상한 당이다.(웃음) 특정 정당에 속한 것도 아니고 당보다는 인물을 본다. 사람들이 나더러 새누리당과 관련된 단체의 로고송을 불렀으니 "(새누리당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 않나?"라고 하는데 맞다.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재인 씨와도 홍대 앞에서 만나 악수하기도 했다. 사람이 참 좋더라. 부산 출신에 나와 같은 학교를 나왔더라.

그런데 '정치가'라는 것은 전문 직업이기 때문에 경험이 있어야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성장 과정에서부터 정치를 물과 공기처럼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그런 인물의 면모를 보는 것이지 당을 보는 게 아니다. 나도 그렇고 국민들도 모두 박 대통령이 잘하기를 바란다. 남북한의 갈등문제가 풀기 어려운 숙제처럼 남아 있지만 이것들까지도 앞으로 박대통령이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 정치인들이나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Open Dialogue'라는 말을 좋아한다.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자는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많이 성숙했다. 예를 들면 삼성, 엘지 등은 이제 애플이 겁낼 정도로 대단한 글로벌 회사가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면에서 아직 미성숙한 부분이 많이 있다. 항상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을 포용해야 하는데 '저 사람 하고는 맞지 않기 때문에 만나기도 싫어'라고 하면서 아예 안 만난다. 그러다보니 국회 안에서 온갖 투쟁이 일어나고 난리가 나는 거다. 당신과 내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가지 바람은 초등학교 때부터 토론 수업이 있었으면 좋겠다. 뉴욕에서 공부를 할 때 역사나 사회 시간에 서로 다 볼 수 있도록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 함께 토론을 자주 했다. 어릴 때부터 나와 의견이 다르더라도 화내지 않고 받아주는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진보적인 영역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고 스스로 저항인사로서의 상징적인 부분도 갖고 있다. 한국의 진보적인 정치인들를 볼 때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 것 같나? Open Dialogue가 잘되는 것 같은가?

아주 모자라다. 문제가 있으면 회의를 해 볼 생각도 안하는 경우가 많다. 회의를 하자고 불러내도 불참해 버리니 답답할 노릇이다. 문화 예술이 간접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준다면 정치는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치를 잘하면 그게 최고의 예술인 것이다. 정치란, 바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계속 얼싸 안는 거다. 서로 다른 점이 있으면 '넌 그렇게 생각하니? 난 이렇게 생각한다.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자'라고 해야 하는데 이게 잘 안 된다. '넌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럼, 너랑 안 만나. 함께 밥 먹을 생각도 하지 마'라고 해버린다.

정치에도 위트가 필요하다. 나는 버락 오바마를 존경하는데 그는 연설을 참 잘하는 사람이다. 그 때문에 대통령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심각한 경제 문제, 청년 실업 문제, 이민자 문제 등을 말할 때도 중간에 늘 농담을 한다. 그런 부분들이 참 좋더라. 우리 정치인들도 Open Dialogue로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것을 많이 배웠으면 한다. 사상이 달라도 OK. 설득하려 노력해보고 그래도 설득이 안 되면 OK. "We agree to disagree(우리가 서로 다를 수 있는 것을 인정하자)" 이렇게 나와야 한다.

60·70년대 예술가들을 비롯해 한대수를 따르는 많은 젊은 음악 후예들이 많다. 한국 사회에서 예술가란 어떤 존재여야 할까?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상당부분 예술과 예술가의 필요성이 떨어졌다. 인터넷 이전에는 음악을 듣고 울기도 하고, 그림을 보고 '아, 이런 그림이 정말 있구나' 하고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인터넷이 등장하고 나서는 사람들의 모든 것이 인스턴트가 돼버렸다. 이제는 인터넷에서 검색만 하면 원하는 정보가 다 나온다. 그러다 보니 창작자나 철학자의 필요성이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이 깊이 없이 피상적이 되어버렸다. 그게 조금 슬프다.

스마트폰 하나로 게임까지 모두 해결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고를 안 한다. 사고의 과정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았다. 젊은 세대들이 점점 더 결혼하기가 힘들어지는 것도 자꾸 과정보다는 결과만 따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사실 결혼이란 연애라는 과정 속에서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고 내가 이 여자와 살면 어떨까 생각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 없이 이 사람이 얼마를 버는지, 얼마나 똑똑한지, 건강한지, 아이는 잘 낳을지, 집안은 어떤지 등을 빨리 분석해 버리고 결혼 여부를 결정해 버리기 때문에 쉽게 결혼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사회에 문화 예술이 바로 서는 게 필요할 것 같다.

예술이 설 자리가 많이 없어졌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사진을 하나 찍으려고 해도 노출, 셔터스피드 등 사진에 관한 모든 것들을 공부해야 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엔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버튼만 누르면 사진이 다 잘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실은 사진작가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나도 뉴욕에서 사진을 배웠고 사진작가 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사진을 찍기 위해 유학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요즘 카메라 기술이 얼마나 좋은가. 사진을 비롯해 모든 예술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많이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시대만 하더라도 예술인이 지식인이었다. 이런 예술가들을 통해 관념의 창구가 대중들에게 열려 있었고 이들의 작품을 통해 대중들이 '아, 이런 예술이 있고, 이런 조각이 있구나' 하고 경험하는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중들의 수준이 너무 높아 예술로써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어려워 졌다. 그러니 아티스트가 리더의 역할을 못 한다. 또한 대중들이 이미 너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서 마음의 캔버스가 좀 검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페인트를 칠해 줄 영역이 별로 없다.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하얀 부분이 남아 있어야 예술가가 칠해 그 영역을 칠해 줄 수 있는데 다들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최근에는 화가든, 철학가든, 소설가든, 음악가든 대가라고 할 만한 이들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클래식 음악에서도 구스타프 말러가 마지막 대가이고, 록도 60년~70년대 이후 사실상 제자리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예술도 산업화가 되면서 이 분야에서까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모든 예술이 산업화가 되면서 화폐와 바로 연결 되었다. 과거에는 화폐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각자의 예술만을 추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포드주의(Fordism,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량생산과 소비를 지향하는 자본주의적 기술체계와 작업조직의 지배적인 방식) 이후 모든 게 화폐와 연관되기 시작하면서 음악가도 이젠 자신의 앨범을 씨디(CD)로 만들어 팔지 않는다. 잘 팔리지 않는 씨디 보다는 유투브나 다운로드 서비스로 팬의 숫자를 확보한 뒤 대기업에서 그 노래를 광고로 사용할 때나 돈이 된다. 음악이 직접적으로 수익원이 되지 못하고 자동차 광고, 비누 광고, 영화 속 등에나 쓰여야 돈이 되게 됐다. 데미언 허스트라는 영국의 화가는 유명한 기타 브랜드에 그림을 팔아먹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예술가 중 하나가 됐다. 이렇게 모든 것이 돈과 연관이 된다. 슬프다.

유럽의 경우에는 국가 차원의 문화예술을 육성하고 보호하는 정책들이 많다. 우리나라에도 뮤지션 유니온 등이 생겼는데, 국가가 예술인들을 지원해 주는 제도가 생긴다면 어떨까?

그런 제도가 생긴다고 해도 모든 예술인을 흡수할 수는 없다. 지금 홍대만 하더라도 인디밴드가 무척 많다. 100만 명의 예술인 중 하나를 흡수할까 말까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 예술을 추구하는 건 참 힘들다. 가시밭을 넘어 지뢰밭 같다. 그야말로 꼭 예술을 해야겠다는 용감한 사람만이 창작의 길을 걸을 수 있다. 나 스스로도 아무에게나 예술을 하는 것을 권하고 싶지 않다. 우리 양호도 예술의 길로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인이 꼭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예술가들의 창작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명을 줘야 하는데 이제는 그것이 어려워졌으니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고민이 많다. 그런데 싸이는 참 잘하는 것 같다.

'싸이 신드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아쉬움이 있는 것은 싸이의 노래가 유투브의 조회 수는 높지만, 미국 라디오에서는 잘 안 틀어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선 라디오에서 어떤 노래를 많이 틀어줘야 그 노래의 빌보드 순위가 올라간다. 그런데 그게 전혀 안 되고 있다. 싸이 열풍은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역사적인 사건이다. 뉴욕에서 파리까지 사람들을 열광시켰으니 대단한 일이다. 싸이가 히트곡을 한 두 개 더 만들고 음악인생을 끝낼지, 아니면 비틀스나 롤링스톤즈와 같이 오랫동안 음악적 인생을 계속 살 것인지는 우리 예술이 풀어야할 큰 숙제다.

싸이에게도 약간의 반항적 기질이 있다. 선배로서 싸이에게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싸이가 여기까지 걸어온 것은 그가 상당한 실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거기에 오동통한 게 참 귀엽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터뷰 할 때 영어가 된다는 것이다. 영어가 되지 않으면 그렇게 많은 해외 방송에 나갈 수가 없다. 지금까지 이런 사람이 없었다. 또한 그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고 고통도 많이 받았다. 군대를 두 번이나 갔지 않나?

복잡하게 볼 필요도 없이 할 말은 간단하다. 댄스든 블루스든 록이든 좋은 음악을 계속 발표 하는 수밖에 없다. 이 정도의 주목을 잘 활용해서 실력 있는 아티스트로 성장해야 한다. 이것은 간단하지만, 창작인에게는 굉장히 힘든 이야기다. 그래서 꾸준히 히트를 이어갔던 비틀스가 위대하다는 거다.

앞으로 음악활동을 함에 있어서 어떤 활동들을 하고 싶나?

나는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곧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어떤 사람은 건강관리를 잘하면 일흔 살까지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음악가는 예순이 넘으면 목소리를 잃는다. 파바로티도 죽기 전에 목소리 잃었고, 탐 존스도 재작년에 목소리 잃었다. 나도 점점 목소리를 잃어 가고 있다. 주위의 친한 음악가들이 날더러 더 늦기 전에 마지막 녹음을 해야지 않겠냐고 해서 곧 앨범 녹음에 들어갈 것 같다. 나중엔 하고 싶어도 못 하니까 말이다.

만약 앨범이 나온다면 앨범 이름은 '폐허'가 될 것이다. 타이틀 곡은 'Nuke me baby'라는 노래를 생각 중이다. 최근 핵무기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다. 모든 나라가 핵무기 보유국이 되고 싶어 하는데 이런 식으로 가다간 전 세계가 핵무장화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구가 참 슬플 거다. 핵무기를 각기 위해서는 실험을 해야 하는데 그 때다마다 방사능이 새어 나오고 그것이 감당하기 어렵게 되면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릴 것이다. 이것에 대한 나의 생각을 블루스로 표현하려고 한다. 약간의 유머도 섞어가면서 말이다. 내 목소리를 잃기 전에 녹음에 들어갈 것이다.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면?

내가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를 만들긴 했지만, 솔직히 행복이 뭔지 잘 모르겠다. 행복을 일부러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냥 매일 아침 'Thank you, lord'라고 하며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며 'One day at a time'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사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 가장 어두컴컴한 순간이 있었다면?

매일같이 어두컴컴하다.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어두컴컴하다고 하지만 위트가 정말 넘친다. 그런 유머나 위트는 어디서 나오나?

글쎄, 나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마 여러 문화를 겪었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양호합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상생활에 위트가 없으면 재미가 없다. 사는 게 비극이다 보니 많이 웃고 웃겨야 한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사실 많은 부분 비극적이다. 사실 양호가 태어났을 때 '내가 죽기 전에 아버지라는 걸 경험하는 구나' 하는 기쁨도 있었지만, '(아이가) 이 험악한 세상에 태어난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슬픔도 있었다. 대학교도 들어가야지, 소울메이트도 찾아야지 하는데 말이다. 앞으로 양호가 갈 길을 생각하니 안 되기도 했다.

예전에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는 내용을 봤다.

그동안 힘들 때가 많았다. 군대 시절도 힘들었지만 특히 첫 번째 결혼하고 그녀와 헤어졌을 때 정말 힘들었다. 스무 살 때 만난 그 여자는 내 몸의 반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그와 헤어지고 나니 내 삶의 목적이 사라졌다. 매일 아침 일을 나가기 전 옷을 입을 때도 '내가 뭐하려고 출근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일을 하면서도 '내가 뭐하려고 돈을 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인이어서 참 다행이었던 게 그때 고맙게도 작곡을 많이 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 돌아와서 앨범을 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3집 '무한대'다.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들을 때면 그만큼 1/n만큼 내 고통이 나눠지는 것 같았다. 참 고마웠다. 음악가로서 좋은 점 중 하나가 바로 고통을 많이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이 나의 음악을 듣고 감명을 받을 때, 내게도 그것이 치유가 된다.

양호에게 어떤 아빠로 기억되고 싶나?

양호에게 많은 사랑을 준 아빠, 그리고 양호로 인해서 많은 행복과 즐거움을 받은 아빠로 기억되고 싶다. 그리고 부디 양호가 날개를 펴고 이 세상을 자유롭게 거리낌 없이 날아다니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한대수에게 사랑이란?

사랑은 사람을 죽인다. 사랑은 희생이며 완벽한 사랑을 하려면 자기 자신을 다 줘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사랑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을 다 주다보면 상처가 클 수밖에 없다. 인연이 잘 연결돼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된다면 참 양호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랑이 인생을 만들어 가는 거다. 인생사 화폐만을 바라보고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재미가 없다. 사랑이 있어야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다.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우리 때는 가난해서 고통스러웠다. 지금 젊은이들은 굉장히 복잡한 사회 속을 살면서 넘치는 정보들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에 고민이 많을 것 같다. 남녀 관계를 비롯해 사람과의 관계도 과거와 달리 너무 복잡해져서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는 우리가 사는 지금이 젊은이들이 살아가기에 참 힘든 때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뒤 각자의 목적의식을 뚜렷이 갖고 스스로가 이 사회를 위해서, 이 지구를 위해 어떻게 이바지 할 수 있는지 잘 고민해 실천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Peace & Love'가 주목적이 되어야 한다.

한대수에게 자유란?

자유란 것이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인데 과연 완벽한 자유가 있을까.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 완벽한 자유에 대해서는 나도 계속 고민해 봐야겠다. 정치적인 자유로는 인권, 평등 같은 것들이 있겠지만, 내적인 자유가 무엇인지는 공부를 더 많이 해야겠다. 내 자신의 껍데기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나. 사실상 죽음이 마지막 자유야. 나도 모르겠다. 하하하.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정인선)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상호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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