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직장 여성 김정숙(32·가명) 씨. 날이 밝자마자 밤새 고열과 싸운 두 살배기 막내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되도록 빨리 해결하고 출근하라"는 상사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병원을 나서며 아기를 시머어니에게 맡기고 급히 택시를 잡아탔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일을 절반만 하면 나도 참 좋겠다"고 김 씨는 말했다.
그러나 김 씨는 시간제 일자리를 알아볼 생각이 없다. 힘들어도 악착같이 전일제 일자리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시간제 임금은 너무 짜고, 이날처럼 아이가 아플 때 필요한 휴가도 좀처럼 보장되지 않는다. 물론 전일제 정규직인 지금도 '출근하라'는 상사의 지시를 받았지만, 그래도 일을 불가피하게 빼먹었다고 해고되지는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7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시간제 일자리도 좋은 일자리'라고 발언해 논란이다. 무엇보다 "시간제 일자리의 현실을 무시한 안일한 이야기"라는 지적이 많다. 김정숙 씨는 "시간제 일자리. 나도 먹고살 수만 있다면 찬성이다. 그런데 현실은 형편없지 않으냐"라며 "대통령이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말했다.
"큰 방향은 맞는데"…노동계, '악성' 시간제 일자리 확대 우려
'시간제 확대'는 박 대통령 이전에도 현오석 경제부총리와 고용노동부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주요 정책 방향이다. '고용률 70퍼센트 달성'과 여성의 일·가정 양립, 청년의 일·학업 양립을 위해서 일자리 나누기와 장시간 근로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차원이다.
이에 대해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남신 소장은 "큰 방향은 제대로 잡았다. 전일 근무가 불가능하지만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양질의 시간제가 늘어나야 하는 것은 맞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 소장은 "구체적인 로드맵이 없어 자칫하면 노동 시장에 만연한 '악성' 시간제만 확대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2013년 3월 경제활동조사-근로형태별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3년 기준으로 한 주에 평균 46시간을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월 253만3000원이었고, 평균 21.4시간 일하는 시간제 노동자의 임금은 월 65만1000원으로 조사됐다. 한 달을 4주로 놓고 단순 계산하면, 시간제 노동자의 시급(7605원)은 정규직 노동자 시급(1만3766원)의 절반을 간신히 넘는 셈이다.
각종 근로 복지 수혜 정도도 현격히 차이 난다. 전체 임금 노동자의 근로 복지 수혜율은 퇴직금 68.4퍼센트, 상여금 69.6퍼센트, 시간외수당 47.8퍼센트, 유급휴가(휴가) 59.4퍼센트로 조사됐다. 반면 시간제 노동자는 퇴직금 12퍼센트, 상여금 17.3퍼센트, 시간외수당 8.6퍼센트, 유급휴가(휴가) 8.7퍼센트로 수혜율이 상당히 낮았다.
사회 보험 수혜율도 마찬가지다. 전체 임금 노동자의 국민연금 가입률은 67.9퍼센트, 건강보험은 71.5퍼센트, 고용보험은 67.9퍼센트로 나타났으나, 시간제 노동자는 국민연금 13.9퍼센트, 건강보험 17.2퍼센트, 고용보험 16.3퍼센트로 조사됐다.
"조급한 성과주의에서 나온 어불성설"
상황이 이런데도, 박 대통령은 "시간제 일자리라는 표현에서 뭔가 편견을 쉽게 지울 수 없다"며 "새 출발을 하는 마당에 공모를 통해 이름을 좋은 단어로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엄연히 존재하는 문제를 이름을 바꾸어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편견'으로 돌린 것이다.
당장 노동계와 야당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아르바이트 노동자 모임 '알바연대'는 28일 "시간제 일자리의 대명사인 아르바이트는 법정 최저임금도 못 받는 열악한 일자리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고용률 70퍼센트 달성에 집착하기 전에 최저임금부터 1만 원으로 올려라"라고 주장했다.
민주노총 역시 논평을 내고 "이름을 바꾼다고 열악한 노동 현실과 나쁜 일자리가 새로 창조되는 것은 아니"라며 "낮은 (최저)임금, 높은 산업재해율과 비정규직 비율 등으로 한국의 노동 현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최하위권인데, 독일이나 네덜란드와 같은 외국의 예를 들어 억지로 인식의 전환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박 대통령이 고용의 질과 노동환경의 개선은 언급하지 않고 '시간제 일자리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면 좋은 일자리가 생긴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의 본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논평을 통해 질타했다.
이지안 진보정의당 부대변인도 논평을 내고 "대통령의 인식 수준이 참으로 실망스럽다. 조급한 성과주의에서 나온 어불성설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 "생활 임금 + 차별 없는 복지 + 자발성 갖춰야"
정부가 말하는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는 품위 있는 생활이 가능한 임금과 차별 없는 복지, 그리고 자발적인 선택이란 세 요소가 충족돼야 한다는 설명이 많다.
이남신 소장은 "한 달 안에 결정될 내년도 최저임금이 적정 수준으로 결정되고, 차별 없는 복지가 보장된다면 자발적인 시간제 노동자는 자연히 늘어날 것"이라며 "이런 조치가 없는 상태에서 고용률을 70퍼센트로 올리겠다는 선언은 새누리당이 그토록 싫어하는 포퓰리즘"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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