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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이 '지식인'을 쫓아낸 이유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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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이 '지식인'을 쫓아낸 이유를 기억하라!

[프레시안 books] 김영종의 <너희들의 유토피아>

아침에 해안 도로를 따라 작업실로 오면서 눈부신 강화의 갯벌에 넋을 잃는다. 생명감 넘치는 하루는 오늘도 이렇게 시작됐다.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날마다 일어나는 생의 재생이다.

며칠 전부터 독학으로 '자연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밴댕이 잡이로 유명한 후포 항 건너편 오솔길로 해서 마니산 자락에 오르기 시작했다. 오늘은 '자연의 언어' 학교를 결석하기로 굳게 마음먹고 그곳을 지나쳤다. 서평에 대한 응답의 글을 쓰기 위해서인데, 오창은의 서평은 그만큼 나에게 소중했다.

지난 토요일 서평을 접하면서 감사의 마음이 울컥하고 올라오는 걸 느꼈다. 이처럼 성실하게 글을 쓰다니! <너희들의 유토피아>(사계절 펴냄) 외에도 텍스트에 깔린 생각의 저변을 알기 위해 나의 다른 책 두 권을 더 읽고 내가 미처 실감하지 못한, '글쓰기 방식'과 '글과 세계관의 관계'뿐 아니라 '필자의 실패'까지 지적하는 것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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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들의 유토피아>(김영종 지음, 김용철 그림, 사계절 펴냄). ⓒ사계절
이 지면은 공적인 자리이기 때문에 감사의 표현은 개인 이메일로 대신하기로 하고, 그의 서평을 통해 드러난 '필자의 실패'와 관련해서 내가 환기하게 된 두 가지 점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자 한다.

<너희들의 유토피아>는 서두에 말한 나에게 반복되는 '재생의 삶터'인 '강화의 갯벌'을 조력발전소를 세운다는 미명 아래 시멘트로 가두어 초토화시키려는 정부의 프로젝트(2012년 착공), 즉 그들의 유토피아에 대한 절규의 서(書)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이에 대항하는 영종도의 시민단체 명칭이 '영종권익위원회'라니 개인적으로는 내 이름 두 자가 들어간 만큼 "아, 그렇다. 내 권익을 위한 위원회다" 이런 감동과 함께 그 권익의 절실함이 더욱 뼈에 사무친다.

그런데, 나는 '영종'(강화 갯벌)의 권익을 위해 어떤 항의를 행동으로 하고 있는가? 이는 나에게 정말 절박한 문제이다. 오창은은 서평에서 필자가 '비판적 지식인'의 위치에 서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지적 앞에서 복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

내가 그의 서평을 읽고 확연히 깨달은 것은 <너희들의 유토피아>가 지식인, 그 중에서도 진보적 지식인을 향한 비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내가 어느새 지식인 영역에 들어서 있다니 참으로 고통스럽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개념과 범주가 모호하긴 하지만 통념상 전문가적 지식을 소유한 자를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문명 회에서 지식인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어왔는지 일상 속에서 통렬히 깨달은 사람이다. 때문에, 나의 지식인 비판은 <헤이, 바보 예찬>(동아시아 펴냄)에서 풍자의 극치를 이루며, <너희들의 유토피아>에서 나름 이론적으로 해명하였다.

이 작업들을 하면서 내가 절감한 모순은 바로 오창은이 지적했듯이 지식인으로서 지식인을 비판하는 개운치 않은 한계였음을 실토한다. 이게 내 작업이 처한 실패의 현주소다.

그나마 내가 자가당착의 모순을 스스로 조금은 눈감을 수 있었던 것은 제도권에서 공부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대학에서 2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쫓겨난 뒤로 대학의 교육과는 영원히 인연을 맺지 못했다. 어쩌면, 이것이 열등감이 되어 사태를 일상 속에서 생생하게 직시할 수 있음으로 해서 '지식/학문' 비판을 통한 문명 비판이 (내 생각으로는) 획기적이고 적확할 수 있었다고 여긴다.

나는 사회에 대해 죄의식과 부채의식을 절감하지 못한 지식인을 가장 혐오한다. 이들의 죄과는 졸저에서 행한 비판의 칼날에 맡기고, 여기서는 비판의 행위가 '사회의 삶'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닌 '논리성'에 결박된 '논쟁'이 되면 앞서 말한 것처럼 지식인이 죄의식과 부채의식을 절감하지 못한 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비판의 행위가 '사회의 삶' 자체를 향하기 위해서는 비판자가 '열등감' 따위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경우에 다 그렇듯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열등감이야말로 '보고(寶庫)' 중의 '보고'임을 증언하는 넘쳐나는 사례들과 만난다. 역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사마천의 <사기>는 대표적인 사례다.

학자들은 억울하게 생식기를 거세당하는 형(刑)을 받고 분노와 열등감에서 사마천이 저 위대한 저서를 태어나게 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사마천의 사평(史評)을 읽노라면 공자 같은 성인이나 <시>, <서> 같은 경전으로 대표되는 '천하의 우상'과 싸우는 모습이 정말로 치열하다.

"<사기>는 단순히 개인의 울분과 좌절이 분출된 현실 비방의 차원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니며, 개인의 비극이 보다 절실하고 냉철한 역사적 진실의 추구로 승화된 것이었기에 저자의 사상과 주관, 그리고 개인의 감정이 강하게 작용하면서도 오히려 객관적인 역사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사기>,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

감히 졸저를 <사기>와 비교하려는 의도는 꿈에서라도 없다. 약자의 열등감이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할 때 진정으로 인류 보편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전범(典範)을 들어 말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사회적 연대의 진정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평소에 통탄해 마지않는 것 중엔 이런 게 있다. 빵을 세계적으로 잘 만드는 어떤 장인이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자신의 무학에 대한 보상으로 눈물을 흘리는 광경 같은 것 말이다. 이 뉴스를 접한 국민들이 함께 감격하는 문화에 대해 울분하지 않는 지식인— 바로 이런 지식인이 '논리성'에 갇혀 '사회의 삶' 자체를 바라보지 못하는, 죄의식과 부채의식을 결여한 지식인이다.

사회적 연대란 사회가 부당하게 부과한 약자의 열등감이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문화를 형성하는 데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서평자 오창은은 그 점에서 나에 대한 지적이 조금은 명확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제빵 장인이 명예박사 학위를 거부하고, 자신과 같은 후배들이 사회의 약자로 살 수밖에 없는 제도를 비판하고, 그럼으로써 사회의 약자들한테 헛되지 않는 용기와 희망을 주는 문화, 그런 문화에 일조하고 싶은 게 내가 바라는 사회적 연대이다.

나는 '사회적 연대'를 위해 지식인을 비판했다고 할 수 있겠다. 연암 박지원은 오죽하면 <허생전>에서 이상사회로 설정한 빈 섬에 '글을 아는 자'는 모두 불러내 배에 실어 되돌려 보냈겠는가? "이 섬에서 화근을 뽑아버려야 한다"며 말이다. 나는 연암의 지식인 혐오를 '현재'와 관련짓지 않고 읽는 것은 제대로 읽은 게 아니라고 본다. <너희들의 유토피아>, 그리고 특히 <헤이, 바보 예찬>은 연암의 분노를 '현재'에 올바르게 살려내려 애썼다는 점에서 부끄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비판적 지식인으로밖에 인식될 수 없는 건 철저하게 반성을 촉구하는 문제다. 행여나 지식인 영토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할 목적을 명분삼아 가면으로 이용한 것은 아니었는지 점검부터 해야겠다. 열등감에서 발로한 것이니 당연히 그 욕망은 없을 수 없었겠지만, 이제부터라도 각고의 노력이 필요함을 뼈에 새겨둔다.

슬픈 현실을 추가하자면, 비판은 지식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비판은 비판 대상을 비판함으로써 '간접적'(a가 무엇인가에 대해 그것은 a가 아니란 진술을 통하지 않고선 a를 말할 수 없기 때문. 즉, 부정을 통해야만 하므로)으로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생한 진실의 내용과 '직접' 만나 활동할 수 없다는 약점을 태생적으로 가진다. 이런 점에서 <너희들의 유토피아>는 사회의 삶 자체를 지식/학문 비판이란 굴절된 광선을 통해서 진실의 내용과 만난 작업이다. 다음 작업은 사회의 삶 자체에 직접 렌즈를 갖다 대려 한다.

또 하나, 오창은은 서평에서 대안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너희들의 유토피아>는 저격수가 자본주의 체제에 가하는 심각한 충격이기는 하지만, 테러리스트처럼 파괴적 효과만을 불러일으키는데 그치고 있다"는 그의 지적을 경청하고 잘해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다만, 혹시라도 독자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이 말만은 하고 싶다.

<너희들의 유토피아>의 최종 결론은 '대안'을 찾는 방식이야말로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건축적 방식 즉, 설계도(이데아)에 의해서 사회를 구축하려는 플라톤 이래의 2500년이나 된 서구철학에 대한 비판이라 요약해 좋을 것이다. <너희들의 유토피아>는 바로 이 철학을 부수기 위해서 무려 330쪽을 할애하였다고 할 수 있다.

'대안'은 창조주적인 누군가가, 아니면 어떤 집단이 '4대강 사업 안(案)'처럼 유토피아적인 청사진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추구하는 일이 자연사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형성'에 기여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관점에 서서 나는 오창은의 지적을 기꺼이 수용하여 더 나은 생산(작업)에 보탬이 되도록 할 생각이다.

이 글은 지난 11월 19일 '프레시안 books' 16호에 실린 오창은 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중앙대학교 교수)의 <너희들의 유토피아> 서평에 대한 논평이다. (☞관련 기사 : "유토피아? 꿈 깨!" 문명 저격수의 독설?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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