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여년간 사건의 핵심은 거의 밝혀졌고 그 수괴들은 법의 단죄도 받은 지금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 어느 종편 진행자는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방송했다고 한다. 이는 명예회복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에 의혹을 부추겨 명예를 훼손시키는 궤변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아도 사이버 상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와 의미를 깎아내리는 작태가 심해 많은 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있는데 일부 종편의 방송은 용서받지 못할 해악이다.
필자는 1980년 그해 2월 본사(중앙일보)에서 광주 주재기자로 발령받아 그해 11월까지 근무했었다. 서울 출신의 젊은 기자로 광주에서의 상황은 큰 충격이었다. 광주시민은 물론 여러 취재기자들이 똑똑히 본 현대사의 현장을 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 바 있다.(5·18특파원리포트,1997, 풀빛)
ⓒ노순택 |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중앙일보의 광주 주재기자 중 가장 말석이었던 나는 광주시 유동 지사에 나가 대기상태에 있었다. 이날 오후 무심히 밖을 쳐다본 나는 수십 대의 무장군인을 태운 트럭이 지나는 것을 보고 일이 터진 것을 직감했다. 군 트럭은 지나가면서 M16을 어깨에 걸치고 손에는 보기에도 묵직한 곤봉을 든 군인들을 내려놓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 쪽으로 이동을 쫓다가 본 것은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2인 1조로 차에서 내린 이들은 근처를 지나던 젊은이들을 불문곡직하고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한 젊은이는 무등경기장 부근 광주교에서 다리 난간에 기댄 채 매를 맞다 못해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주변에 있던 모든 시민들이 이 끔찍한 모습을 모두 목격했다. 기자인 나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런 사태가 이날 광주시 곳곳에서 일어났을 것은 직접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19일 오후부터 광주 상황은 학생시위가 아닌 시민이 참가하는 민주항쟁으로 타올랐다. 할아버지들도 손에 각목을 들고 나왔다. 시민들은 '전라도 사람 다 죽는다'하고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은 19일 광주시내를 공포의 도시로 만들었다.
5월 20일 광주 취재팀이 본사에 송고한 기사의 첫마디는 "사람사냥이 시작됐다"는 흥분에 찬 내용이었다. 물론 계엄하에서 나갈 수 없는 표현이었지만 계엄군의 만행을 더 이상 어떻게 나타낼 수 있으랴.
취재수첩에는 이들의 만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대검으로 찔러" "여자, 팬티만 입히고 마구 때리고 폭행" "집까지 쫓아가 마구 구타" "도망가는 시위대에 칼 던져"……
결국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이 광주항쟁을 유발한 셈이다. 공수부대의 진압작전은 비무장의 시민을 상대로 한 작전이라기에는 너무 잔혹했다.
20일 오후 금남로의 시민들에 섞여 있던 나는 계엄군의 무자비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들은 시민들이 돌을 던지고 덤벼도 일정거리까지 가까이 오기 전에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총알같이 튀어나와, 달아나는 사람의 머리를 쇠뭉치 같은 곤봉으로 후려갈겼다. 맹수가 사냥거리를 낚아채는 것 같았다.
나도 정신없이 달아났다. 금남로의 한 병원에 들어가 보니 머리 터진 사람이 즐비했다. 부상의 대부분의 머리가 함몰된 것이었다.
계엄군의 이같은 진압작전은 전쟁시 점령지에서 써도 비난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이다.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충돌도 이보다 더 처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계엄군의 살육은 결국 대규모 시민봉기를 불러일으켰다. 광주는 서울과 같은 대도시가 아니다. 한 다리 건너면 친구요 친척이요 동문인 곳이다. 옆집 아들의 죽음은 바로 내 자식의 죽음과 다름 아니다.
이 때문에 부마사태서 효과를 본 계엄군의 초전박살 진압작전은 광주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대한 분노를 촉발했다. 이대로 당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광주시민, 더 나아가 전남도민 모두를 감쌌다.
도저히 대한민국 국군이라고 믿기 어려운 만행은 많은 소문들을 만들어냈다고 나는 믿는다. 공수부대의 이성을 잃은 무자비한 만행은 어떤 유언비어라도 사실로 믿게 만들 만했다.
왜 신군부는 광주에 수천 명의 공수부대를 투입시켜 시민을 적군으로 상대했을까. 공비들과 싸워야 할 공수특전단을 시위 진압에 투입했을 때 일어날 결과를 계엄사는 몰랐단 말인가.
1980년도는 절대권력의 박정희 정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으나 신군부라는 반동세력이 또 역사를 후퇴시키고 있던 때다. 국민들은 계엄하에서 시들어가는 민주화에 실망과 분노를 품고 있었다. 광주가 아니었더라도 대한민국 어디에선가 유사한 민중항쟁이 일어날 만한 시점이었다.
계엄군의 만행은 잠재해 있던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에 기름을 부은 것과 같다. 여기에 광주지역의 특수성, 박정희 정권시대의 피해 의식 등이 어우러져 광주항쟁이라는 커다란 역사의 물줄기를 만들어냈다고 나는 확신한다.
신군부가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를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한 것은 민주화를 일거에 잘라버리고 제2, 제3의 항쟁에 본때를 보이는 작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재에 항거하고 이웃의 아픔에 눈물짓는 민중의식은 총검 앞에서도 이들을 맨주먹으로 나서게 했다.』(일부분)
이 글의 전체 제목은 <아직도 굳지 않은 핏자국> 이었다. 광주민중항쟁 17년 후 이 글을 쓰고, 또 17년이 거의 지났는데도 그 흘린 피는 굳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을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오늘의 일처럼 규명하고 교육하고, 되살려야 한다. 그것만이 그나마 희생자들에 대한 작은 명예회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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