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 한바탕 전쟁을 치른 주민들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부터 일어나 차를 몰고 산길을 달렸다. 평밭 마을 주민 장재분(57·여) 씨의 휴대전화로 127번 공사 현장에 경찰들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장재분 씨는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씻지도 못하고 뛰어나왔다. 이건 정말 전쟁"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차를 몰아 127번 공사 현장에 도착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내가 죽어서 끝내겠다"며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다.
▲ 21일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바드리 야산 송전탑 공사 현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마을 주민들이 공사 장비인 굴착기에 쇠사슬로 몸을 묶고 저지에 나섰다. ⓒ연합뉴스 |
목숨 건 주민들
한국전력이 765킬로볼트 송전탑 건설을 재개한 20일 오전부터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위양 마을과 대항리 평밭 마을은 전쟁터가 됐다.
언뜻 보면 한적한 시골 마을처럼 보이는 평밭 마을. 그러나 마을 입구의 길 양편에 있는 나무와 나무 사이는 노끈으로 묶여 있었다. 마을 진입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주민들은 한국전력의 장비가 밀고 들어올 경우를 대비해 경운기와 트랙터 등도 세워놨다.
평밭 마을 입구의 나무에 매달린 밧줄은 언제든 목을 걸 수 있도록 미리 매듭지어져 있었다. 이 마을 주민 한옥순(66·여) 씨는 "내가 죽으면 시신을 청와대로 옮겨 달라고 유서를 써놨다"며 "보상이고 뭐고 이 마을을 지키지 못하면 내 한목숨은 그냥 버리겠다"고 말했다.
모든 주민들이 "목숨을 걸었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부상자가 속출해 공사 반대 마을들은 거대한 종합병원이 돼가는 판국이다.
20일 오전, 평밭 마을 주민 이금자(82·여) 씨가 병원으로 옮겨진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경찰이 농성장을 봉쇄하려고 하자 이를 막기 위해 웃옷을 벗고 준비해놓은 오물통을 던지다 의식을 잃었다.
주민들 부상 속출
목숨을 걸었다는 주민들의 말은 한낱 엄포가 아니었다. 21일 새벽 6시께, 경찰들이 위양리 평밭 마을 127번 공사장에 진입하자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여기저기에서 "경찰이 죄 없는 할머니들을 보호해야지 왜 한국전력 편에 서서 할머니들을 괴롭히느냐"는 원성이 터져 나왔다.
상황이 심각한 곳은 부북면뿐만이 아니었다. 21일까지 산동면에서 3명, 단장면에서 1명이 병원으로 실려갔다.
송전탑 반대 운동이 격렬한 밀양시 4개 면(부북면, 상동면, 산외면, 단장면) 1484가구 3000여 명 가운데 80퍼센트 가량이 60세 이상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고령인 마을 주민들이 식사는커녕 아예 집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공사 장비가 들어올 것에 대비해 현장에 자리를 잡고 있다. 109번 공사 현장이 있는 도곡 마을에서는 김영자(57·여) '밀양 765킬로볼트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총무가 굴착기 아래에 드러누워 공사를 막아섰다. 단장면 바드리 마을의 주민들은 89번 공사 현장을 지키고자 모닥불 하나로 추위에 맞서며 밤을 새운다.
같은 마을의 공사 현장이라도 길이 좋지 않아 이동 시간은 꽤 긴 편이다. 일례로, 평밭 마을의 127번 공사 현장에서 128번 공사 현장까지 가려면 돌멩이 투성이인 비탈길을 40여 분 걸어야 한다. 한 현장이 조용해지면 다른 현장에서 난리가 난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휴대전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젊은 사람도 힘들어서 손사래 치는 험한 산길을 정신없이 오른다.
"농사일 제쳐놨다"
21일 오후, 새벽부터 평밭 마을 입구의 농성장을 지키던 권병구(77·남) 씨가 "모내기 철이라 한창 바쁠 때인데 농사일이고 뭐고 다 제쳐놓고 여기 나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위양 마을에서 고추와 깻잎 농사를 짓고 있다. 공사 반대 투쟁 중인 마을 주민들은 모두 농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민들의 평범한 일상은 지난 2001년부터 흔들렸다. 당시 정부는 울산시 울주군의 신고리 핵발전소(5·6호기)에서 경상남도 창녕군 북경남 변전소까지 송전탑 161개를 건설하기로 했다. 이 중 69개가 밀양시 5개 면(청도면, 부북면, 상동면, 산외면, 단장면)에 집중됐다.
급기야 지난해 1월 16일에는 산외면 주민 이치우(74) 씨가 송전탑 건설에 항의해 분신자살하기도 했다. 이에 한국전력은 지난해 9월부터 공사 현장에서 한 삽도 뜨지 못했지만 16일 돌연 공사 재개의 뜻을 밝혔다.
765킬로볼트 송전탑은 35층 건물 높이 정도의 거대한 송전탑이다. 24시간 내내 코로나 소음(기계음)을 내뿜는다. 송전탑이 내뿜는 전자파도 주민들을 불안하게 한다.
집 앞에 들어서는 송전탑
밀양에서 유독 송전탑에 대한 반발이 극렬한 이유는 송전탑이 들어서는 위치 때문이다. 실제로 송전탑이 계획대로 모두 들어서면 상당수의 주민들이 송전탑으로 둘러싸인 채 살아야 한다.
장재분 씨가 그 예다. 129번 송전탑은 장재분 씨의 집에서 5분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들어선다.
한옥순 씨는 "조환익 한국전력 사장도 직접 마을을 방문해 '내가 봐도 송전탑이 너무 집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며 주민을 위로해놓고 나중에 딴소리하니 정말 어이가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렇듯 주민들은 보상도 거부한 채 송전탑 반대를 외치지만 한국전력은 여전히 전력 수급난 때문에 공사를 강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루빨리 신고리 핵발전소 3호기가 생산하는 전기를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신고리 3호기의 전력량은 전체 전력의 1.7퍼센트(2013년 하계기준)이다. 게다가 시도별 전력 자급률을 보면 서울은 2.9퍼센트에 불과하지만 경상남도는 200퍼센트가 넘는다.
이계삼 '밀양 765킬로볼트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가장 약자이자 가장 전기를 적게 쓰는 밀양 주민들이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라며 "이제는 전기 수요가 있는 곳에 소규모 발전 시설을 지어서 밀양과 같은 사회적 갈등을 줄여나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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