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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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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보증

[한윤수의 '오랑캐꽃']<208>

대구의 어느 공단 노동조합에서 전화가 왔다.
"파키스탄 사람인데요. 화성 센터에서 안 도와줘서 대구까지 왔다고 하네요. 왜 거기 문제를 여기까지 보내셨어요? 다시 화성으로 보낼 테니 도와주세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러죠. 보내세요."

다음날 파키스탄인이 왔다.
하지만 낯이 익다.
그는 못 받은 월급 100만원을 받아달라고 일주일 전에 방문했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그를 외면했다.
왜 외면했을까?

그가 말했다.
"월급은 나중 문제예요. 비자 기한이 지나서 그러니, 여기 사인 좀 해주세요."
내미는 종이를 보니까 체류기한 연장을 위한 신원 보증서다.

못해줄 것도 없지! 나는 사인을 해주려고 볼펜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직원들이 눈을 깜박깜박한다. 사인해주지 말라는 신호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일단 볼펜을 놓고,
호흡을 가다듬고,
화장실에 다녀와서 물었다.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됐어요?"
"8년이요."
"어떻게 8년씩이나?"
"두 번이나 산재를 당했거든요."
"등록증 좀 보여주실래요?"
비자가 일할 수 있는 취업(E-9) 비자가 아니라, 일을 할 수 없는 G-1(기타)이다. G-1 비자로 8년을 버텼다면 보통내기가 아니다. 빠꼼이!
순간 파악이 된다. 못 받은 월급은 *비자 연장을 위해 남겨둔 종자돈의 성격이 짙다.
이러니 직원들이 외면했구나.

직원 하나가 끼어들어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이 사람 능수능란하다고 할까요? 한국말도 너무 잘하고 한국 법도 우리보다 더 잘 아는데요 뭐. 그래서 직접 노동부 가서 진정하고, 진정서 접수증 가지고 출입국 가서 비자 연장하라고 한 거예요."

사태는 꼭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는 우리 직원 말대로 직접 노동부에 진정서를 냈고 그 진정서 접수증을 가지고 출입국에 가서 비자 연장을 시도했다. 그러나 출입국 관리는 접수증만 가지고는 안 된다며 추가로 한국 사람의 신원보증을 받아올 것을 요구했다.
뜻밖의 변수가 생긴 것이다.
그는 신원보증을 받으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전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천주교 00교구에까지 갔다. 그러나 보증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산재 당시에 도움을 받은 대구의 그 노동조합에까지 내려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도 보증을 서주지 않자 다시 화성으로 올라온 것이고.

나는 외국인 노동자의 신원보증을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서준 사람이지만 이 사람한테까지 서줘야 할까? 회의가 생겼다. 서줘? 말어? 갈등하다가 사실 확인을 해보고서 결정하기로 하고,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월급 안 준 게 있습니까?"
"있긴 있지만요. 실질적으로는 줄 게 없어요. 오히려 걔 때문에 회사가 피해를 보았는걸요."
"어떻게요?"
"G-1 비자 가진 사람을 취업시켰다고 벌금만 6백만 원 물었습니다."
"그래도 나머지 임금 100만 원은 주셔야죠."
"줄 게 있으면 주죠! 하지만 우리도 받을 게 있고 까부시면 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얘깁니다. 걔한테 꿔준 돈 받아달라고 한국 사람도 오고 파키스탄 사람도 와서 귀찮게 구는 바람에 대신 물어준 게 있어요. 많지도 않아요. 10만원, 20만원짜리들! 좀 깔끔치가 못하다고 할까요. 노름을 하는지 원! 그리고요, 정 돈 받으려면 이리 오라고 하세요. 서로 주고받을 것 따져보게!"
더 이상 통화를 계속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 통보했다.
"신원 보증 못 해줘요."
"왜요?"
"믿을 수가 없으니까."
"왜 못 믿어요?"
"8년 동안 한국 친구 하나도 못 사귄 사람을 누가 믿겠어요?"
그는 툴툴거렸다.
"비싼 돈 들여 대구에서 왔는데"
"그럼 거기 가서 해달라고 하세요."
"나 돈 받으면 (파키스탄) 틀림없이 갈 건데!"

물론 나는 그 말도 믿지 않았다.
갈 사람이 아니니까.

*비자연장을 위해 남겨둔 종자돈 : 3년 이상 체류한 사람이 비자를 연장하려면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체불금품이 있으면 그 돈을 받아가라고 일정 기간 비자를 연장해준다. 위 사람은 아마도 그런 비자 연장 목적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많은 금품을 정산하지 않은 채로 일부러 남겨둔 게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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