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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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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변덕남

[한윤수의 '오랑캐꽃']

아침에 출근하니, 필리핀 남자가 먼저 나와서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다.
"목사님, 도와주세요."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가방을 찾아달라는 얘기다.

구직중인 필리핀 노동자 아만(가명)은 철강재 가공 회사에 취직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회사에는 기숙사가 없었다. 사장님이 말했다.
"방을 얻어줄까? 아니면 컨테이너를 하나 사줄까?"
그는 지금까지 방에서만 생활해 왔지만 이번에는 컨테이너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친구들이 넓은 컨테이너에서 각종 전자기기를 늘어놓고 사용하는 걸 보고 무척 부러웠기 때문이다.

아만과 사장님은 서로가 만족하여 근로계약서에 싸인했다.
문제는 그날 오후에 발생했다.
사장님은 컨테이너를 사서 공장 한 켠에 세워주었다.
"한 번 들어가서 누워 봐. 침대도 하나 샀으니까."
하지만 아만이 막상 컨테이너에 들어가 누워보니 생각보다 훨씬 추운 게 아닌가.
그는 마음이 변하여 당장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당황했다.
"왜 그만 둬?"
"너무 추워요."
"밑에 전기장판 깔았는데 뭐가 추워?"
"그래도 추워요."
"벽에 스치로폼 더 두껍게 깔아줄게."
"싱크대도 없잖아요."
"밖에서 밥하면 되잖아."
"안 되요. 화장실도 멀고 싫어요. 그만둘래요."
사장님이 화가 났다.
"야, 그만두면 어떡하냐? 컨테이너와 침대 사는데 2백만원이 들었는데. 니가 2백만원 물어줄래?"
"........"
"말해봐. 2백만원 물어줄 거냐구?"
"저는요. 돈 물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만둘 거예요."
"그래? 그러면 2백만원 내놓고 가."
"지금 돈 없어요."
"돈 없으면 그 가방이라도 맡겨놓고 가."
그는 할 수 없이 가방을 맡겨놓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가방을 찾아달라고!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오히려 사장님이 하소연했다.
"일손이 딸려 죽을 지경인데 얘가 변덕을 부리네요, 하긴 두 달만 있으면 다른 노동자가 오거든요. 그때는 정식으로 직장 이동 시켜줄 테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일하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일을 하든지 그만두든지 강요할 수가 없어, 당사자에게 선택을 맡겼다.
"두 달만 일하라는데 안 되겠어?"
아만은 고개를 쌀쌀 저었다.

다시 사장님에게 전화했다.
"안된대요. 할 수 없네요. 가방 돌려주셔야지!"
사장님은 극도로 흥분했다.
"가방은 돌려주지만 내가 그놈 사기죄로 고소할 겁니다."
나는 웃었다. 사기죄는 재산상의 손해를 봐야 성립되는데, 사장님이 *재산상의 손해를 본 게 없으므로 사기죄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만에게 말했다.
"가서 가방 찾아가."
"사장님한테 얼마 줘야 되요?"
"얼마는 무슨 얼마? 그냥 찾아가."
변덕스러운 필리핀인은 감사 표시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이게 다 외국인 노동자가 부족해서 생긴 해프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산상의 손해를 본 게 없다 : 아만이 속임수를 써서 컨테이너와 침대를 들고 갔다면 사기죄에 해당되지만 컨테이너와 침대는 회사에 그대로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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