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상담으로 한창 바쁜데, 까무잡잡한 얼굴에 눈이 반짝반짝하는 방글라데시인이 나타나서 왔다 갔다 한다. 이름이 악발(가명)이다. 뭘 도와줄까 물으니 한국말을 배우고 싶으니 한글학교로 안내해 달란다. 하지만 그는 한국말을 아주 잘했다.
"한국말 잘하는데 뭘 그래?"
하면서도 한글학교로 안내했다.
학교로 가는 길에 그가 이상한 얘기를 꺼냈다.
"여기 한글학교는 무슨 좋은 점이 있는지 한 번 설명해봐요."
요즘 *한국말 배워주는 데가 쌔고 쌨으니까 비교 검토해보아서 최고로 잘 해주는 쪽으로 가겠다는 뜻이다.
기가 막히다.
마치 회사에서 첨단 기술을 빼낸 IT기술자가 경쟁업체를 찾아다니며 어떤 특별대우를 해줄지 묻는 것 같다.
얼마나 아니꼬운지 작년 추석에 먹은 오려 송편이 넘어오려고 한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좋은 점? 없어."
사실 우리 한글학교는 좋은 점이 별로 없다. 빌려 쓰는 교실도 낡고 후진데다가 예쁘고 젊은 여교사들도 유학 가거나 취업하고 없다. 그저 나이 많은 선생님들이 성실하게 가르칠 뿐이다.
나는 그를 한글학교 교장인 윤 선생에게 데려다주고 돌아섰다. 문제는 그 후에 불거졌다.
윤 선생이 학생들에게 받아쓰기를 시키는데 악발은 받아쓰기를 하지 않고 영어로 뭐라고 씨부렁거리더니 딴청만 부렸다. 베트남 학생들이 숙덕거렸다.
"쟤는 받아쓰기 안 하네."
"다 아는 가봐."
"알긴 뭘 알아. 영어 잘한다고 잘난 척하는 거지."
이때 교실 뒤에서 수업을 참관하던 보조교사 김 선생이 말했다.
"윤 선생님, 영어로 하세요. 악발이 영어 잘한대요."
윤 선생이 말했다.
"나 영어 모르는데. 중국어 밖에 모르는데."
그리고서 첫 시간이 끝났다.
다음 시간은 박 선생이 가르치는 중급반 시간이다.
박 선생이 악발에게 자기소개를 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악발은 못 알아듣는 척 가만히 앉아 있다. 미국에 살다 와서 영어를 곧잘 하는 보조교사 김 선생이 "Please, Introduce yourself!"
하자 그는 마지못해
"나 방글라데시에서 온 지 8개월 됐어요. 좋아하는 음식은 불고기요."
하는 식으로 몇 마디 하고는 들어갔다.
그러나 악발은 한글공부 자체에는 흥미가 없는 듯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우두커니 앉았더니 벌떡 일어나서는
"나 저 사람하고 영어로 얘기해도 되요?"
하며 보조교사 김 선생을 가리켰다.
중간 중간 계속해서 수업을 끊는 악발의 행동에 박 선생은 기가 막혔지만
"그래. 가서 얘기해."
하고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한참 동안 영어로 속닥거렸다.
악발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으나 10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일어섰다.
"나 가야겠어요."
박 선생이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그래, 잘 가."
그가 문을 열고 나갈 때, 박 선생이 한 마디 더 했다.
"잘 가. 나는 영어 못해."
그는 휙하고 매섭게 돌아보더니 나갔다.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악발이 나타나지 않은 건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말 배워주는 데가 쌔고 쌨으니까 : 지방자치단체나 외국인센터, 교회나 절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공공도서관에서도 외국인에게 한국말을 가르친다. 바야흐로 한국말 가르치기 붐이다. 왜 이럴까? 한글교실이야말로 차리기 쉽고 생색도 나며 정부 지원을 받기도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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