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센터의 한글학교 학생 중에 한국어 잘하는 5인방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베트남인 광한이다.
광한은 센터 창립기념일에 공연한 베트남 합창단의 지휘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달포 전부터 한글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4킬로 쯤 떨어진 곳에 화성 시청에서 수십억을 들여 외국인근로자복지센터를 세웠는데 그는 그곳 부설의 한글학교에 다닌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려니 했다. 광한 뿐 아니라 많은 외국인이 그리로 갔으니까. 그쪽에선 상금이나 상품을 걸고 장끼자랑도 하고 배드민턴 대회도 열고 무료 진료도 해주니 외국인들이 매력적인 장소로 간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거기 잘 다니겠지, 별 일 없겠지 하고 말았다. 그리고선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광한이 큰 수술을 받고 입원해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어제였다. 무려 한 달 전에 사고가 있었다는데 내가 왜 이리 소식에 깜깜했을까? 즉시 아주대학교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침상에 가라앉아 누워 있었다. 얼마나 착 까부러졌는지 사람은 없고 침대만 있는 것 같았다. 팔과 가슴에 붕대를 감았는데 얼굴은 누렇고 검게 떠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눈물을 흘렸다. 내가 자기 아버지를 닮았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마치 베트남에 있는 친아버지를 본 듯해서일까? 그는 심신이 극도로 약해져 있었다.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으니까.
"내가 많이 울고 싶어. 나 집에 가고 싶어."
그는 떠듬떠듬 사고 경위를 말해주었다.
지게차에 물건을 싣고 다른 공장에 배달해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운전을 하고 그는 운전석 옆에 붙어 앉아 있었다. 공장에 다 와서 모퉁이에서 돌며 후진할 찰나에 지게차가 넘어졌다. 지게차가 넘어지면 대형 사고가 나기 쉽다. 사람이 먼저 튕겨나갔다가 넘어지는 지게차에 깔리기 쉬우니까. 우려한 대로였다. 방글라데시 운전사는 튕겨 나갔다가 뒤따라 넘어지는 지게차에 깔려 즉사했다. 광한은 더 멀리 튕겨 나가서 목숨을 건졌다. 가슴과 왼팔만이 지게차 모서리에 깔렸으니까.
목격자에 의하면 광한의 왼 팔은 살이 깊이 파여 뼈가 보였다고 한다. 하여간 그는 정신을 잃고 아주대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고 거기서 응급조치를 받았다. 간병인이 말했다.
"지금은 많이 좋아진 상태예요. 20일 전만 해도 팔이 허벅지만하게 부어 있었어요. 피가 얼마나 많이 나는지 시트를 여러 겹으로 겹쳐 깔아도 피범벅이 되는 거예요. 진통제를 계속 맞았죠."
객관적인 치료 상황을 알고 싶어 밖으로 나가 간호사에게 광한의 현 상태를 물었다. 간호사가 말했다.
"흉추에 골절이 있어서 절대 안정이 필요했죠. 또 왼쪽 폐에 혈흉이 있어서 흉관을 삽입하여 다 빼냈습니다. 왼팔은 죽은 살이 많아서 긁어내고 허벅지에서 피부를 떼어내 이식한 상태구요. 그래도 죽은 살이 계속 나와서 두 번에 걸쳐 떼어내고 이식했어요. 큰 고비는 넘겼어요. 소변은 누워서 혼자 봐요. 대변도 본인이 노력해야 하는데 별로 노력을 안 해서 의사 선생님이 5, 6일에 한번 관장을 해주고 있지요."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광한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집에서 엄마가 알면 놀랄까봐 핸드폰 번호 바꿨어요."
"잘 했어."
그 방에 있는 한국 환자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광한이 인기가 있더라구요. 주말에는 베트남 친구들이 굉장히 많이 와요."
"여자 친구가 토요일마다 와서 밤새도록 간호하고 일요일 늦은 밤까지 있다가 가요. 여자 친구 잘 뒀더라니까요."
사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후유증이었다.
집으로 가고 싶다고 조바심을 치는 광한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완전한 치료가 될 때까지는 절대로 베트남에 돌아가서는 안된다고. 그리고는 덧붇였다.
"베트남 사람 강해. 이겨야 돼. 알았지?"
그는 내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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