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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수의 '오랑캐꽃']<125>

눈이 움푹 들어간 여성이 찾아왔다. 얼굴이 누렇고 어두운 것이 병색이다. 태국인으로 이름이 솜짜리(가명)다. 도장(塗裝) 공장에서 2년 반을 일했는데 페인트의 독성 때문에 목과 눈과 배가 아파서 직장을 옮겨 달란다.

참으로 안타깝다. 외국인노동자는 1년에 한 번은 직장을 옮길 수 있거늘, 왜 두 번의 기회를 다 놓치고, 아프고 나서야 찾아왔을까? 사장님이 싸인 해주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옮길 방법이 없는데.

사장님은 솜짜리가 옮기려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걔 애인이 있을 때는 가만히 있더니, 애인이 나가니 따라 나가려고 마음이 변한 겁니다."
글쎄다. 사장님의 말에도 일면의 진실이 있을 것이다. 애인이 있었다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옮기려는 이유가 그것만은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그 공장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 공장에서는 자동차의 연료탱크와 도어 핸들을 도장하여 납품하는 일을 주로 한다.
1층에서는 도어 핸들을 도장한다. 한국인 부장과 한국인 아줌마 그리고 태국 여성 한 사람이 이 일을 맡는다. 도어 핸들은 부피가 작으므로 도장할 때 분사하는 페인트의 양이 적고 입으로 들이마시는 양도 적다. 따라서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연료탱크를 도장하는 3층이다. 연료탱크는 부피가 크므로 분사하는 페인트의 양이 많고 사방에서 돌아가며 뿌려야 하므로 입으로 들이마시는 양이 상당하다. 마스크를 3장 겹쳐 써도 페인트는 머리와 목과 눈과 귀로 스며들어온다. 건강에 이상이 생길 수밖에. 한국인 기술자 한 사람과 태국 남자 하나와 솜짜리가 이 일을 맡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기술자는 들어오자마자 금방 그만두고 나가니 언제나 새 얼굴이다. 하기야 한국인이 이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오래 근무할 리 없지!

작년에 건장한 태국 여성 하나가 3층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독성이 강해서 그런지 60에서 70키로 나가던 사람이 40에서 50키로로 몸무게가 줄었다. 기침 할 때마다 오줌을 쌌다. 기침이 너무 심해 괄약근이 조절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쓰러져서 병원 신세를 지다가 회사를 옮겼다. 지금은 U시에서 일한다는 소문이 들릴 뿐이다.

이상한 것은 태국 남자. 그는 아프지 않으냐고 물으면 언제나 "괜찮다!"고 말한다.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솜짜리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다.
"왜 괜찮은지는 모르겠어요."

솜짜리는 그 건장한 여자의 대타로 3층으로 올라간 것이다. 3층으로 올라가서 처음 나타난 증상은 얼굴과 팔다리 등 사방이 가려운 것. 하지만 이제는 목과 배가 아파서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정말 그만두고 싶지만, 그만두면 태국으로 보내버린다니 그것도 못할 노릇이다. 왜냐하면 태국으로 가면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키울 방법이 막막하니까.

그녀는 11년 전에 결혼했다가 두 딸을 낳고 나서 5년 전에 이혼했다. 남편에게 딴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솜짜리에겐 두 딸이 희망인데 그애들을 생각해서라도 돈을 더 벌어야 한다. 그러려면 한국에 남아야 하고 한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직장을 옮기는 수밖에 없다.

나는 사장님과 한 번 더 통화했다.
"회사 사정이 어렵겠지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2년 반을 근속한 사원인데 건강이 안 좋다니 봐주시지요."
사장님은 말이 통하는 분이었다. 솜짜리가 두 달만 더 일하면 놓아주겠다는 뜻을 비쳤으니까.
"자동차 하나가 단종(斷種)이 되요. 그럼 이 연료탱크도 끝이거든요. 그때는 붙잡고 있으래도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죠."
"좋습니다. 그때는 꼭 싸인 해주시는 겁니다."
나는 사장님의 의견에 동의하고 그녀에게 두 달 동안만 참으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녀는 빨리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종합병원의 정확한 진단을 받고 싶어 했다. 나는 보건소 C선생에게 협조를 구했다. C선생이 솜짜리를 S의료원으로 데리고 가서 내시경과 혈액검사를 받게 해주었다. 내시경 결과는 금방 나왔다. 위장은 이상이 없단다. 하지만 혈액검사 결과는 일주일 후에나 나올 것이다.
나는 솜짜리에게 두 가지를 환기시켰다.
"검사 결과가 아주 안 좋게 나오면 옮겨줄 게요."
그녀가 좋아했다. 검사 결과가 아주 안 좋게 나오는 것을 좋아하다니! 이 역설 앞에서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하지만 검사 결과가 *안 좋게 안 나오면."
그녀는 한숨부터 쉬었다.
"안 좋게 안 나오면요?"
"앞으로 두 달 동안 더 일해야 되요. 알았죠?"
그녀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어요."
나는 그녀를 회사로 돌려보냈다.
돌아서서 가는 그녀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다.

*안 좋게 안 나오면 : 역시 그녀가 우려했던 대로 결과는 안 좋게 안 나왔다(건강은 좋게 나왔다는 뜻). 혈액검사도 정상, 간 기능 검사도 정상, 위 내시경 검사도 정상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사장님은 예상보다 두 달 일찍 그녀를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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