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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대리의 행방

[창비주간논평] 우리시대의 상처와 문학

"우리는 친구들의 궁색한 도시락을 흉보는 게 아니라, 함께 나눠먹었습니다. 도시락뿐 아니라 교복을 물려입고, 참고서를 돌려쓰고, 문제집을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풀었습니다."

60년대나 7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세대의 회고담이 아니다. 스물다섯 난 대학생이 중학생 때인 IMF 구제금융 시절을 돌이켜 쓴 글이다.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이 쓴 '근대 체험'에 대한 에쎄이에는 IT혁명이라든가 연예인 팬클럽, 성형, 촛불집회의 열기와 함께 IMF체제가 남긴 상처가 앞자리에 놓여 있다. 더러 가정이 해체된 아픈 기억을 가진 학생도 있었다. 이들이 앞으로 문학을 해나가는 데 사춘기에 겪은 IMF체제는 원체험으로 작용하며 다양하게 변주될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청년실업과 비정규직화가 사회적 일상이 되어버린 난파선에 곧 승선해야 할 처지이다. 그래서 '차라리 과거에 태어났더라면 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라고 쓴 한 학생의 자조 섞인 문장이 예사롭지 않다.

12년 전, 한 가장의 초상

2000년 벽두의 내 취재수첩에는 여의도 한강 둔치에서 만난 한 중년사내와의 인터뷰 기록이 남아 있다. 노숙자가 되기 직전의 처지에 놓인 한 실직자였다. 한때 남대문시장에서 점포를 가지고 의류도매상을 했지만 IMF로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삿짐쎈터 계약직 사원, 일용직 노무자 등 안해본 것이 없이 해보다가 그마저도 끊기고 몇달째 놀고 있었다. 마포가 집인 사내는 매일 아침이면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너 하루 종일 강변에 앉았다가 애들이 잠들면 집에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만난 날은 얼어붙은 한강을 직접 건넜다고 했다.

"왜 전쟁 때 피난민도 그렇게 언 한강을 건넜다잖소. 살려고 언 강을 건넜겠죠. 난 말이오, 얼음이 푹 꺼지길 바라고 건넜단 말요."

자진할 용기가 없어서 그런 짓을 했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생인 남매를 두고 있었다. 자신이 한때 중산층이었다고 말한 그가 묘사한 단란한 가정의 모습은 '조그만 자가용이지만 처자식을 태우고 한달에 한번씩 고향의 홀어머니를 찾아뵙고, 겨울이면 애들 손잡고 눈썰매장에 다니는' 것이었다. 그날은 두 아이가 학교에서 야외학습을 가는데 그 경비 3만원을 못 주고 왔노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이제 더는 가족을 유지할 수 없겠다고 했다.

"한번은 애들 엄마한테 고향으로 내려가서 생활해보자는 뜻을 비친 적이 있습니다. 펄쩍 뛰더군요. 우리 자식들도 당신과 똑같이 살게 된다, 소 팔고 논 팔고 그래야 학교 다니게 된다. 맞는 말이죠. 애들 코 꿰어 '가자!' 하면 가기야 하겠지요. 하지만 '우리 아빠 낙오자, 나도 낙오자' 그렇게 생각하며 자라겠지요."

그리고 그는 고향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국어책을 10장도 채 못 넘기고' 교문을 나서 서울로 와야 했던 그에게 고향이란 출세하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라 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자녀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김소진의 미완성 유작〈내 마음의 세렌게티〉

김소진은 〈내 마음의 세렌게티〉(《눈사람 속 검은 항아리》, 1997)라는 120장 분량의 미완성 단편소설을 유작으로 남겼다. 그는 애초 150장 분량의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작가로서 뒤를 메워서 완결해보고 싶은 마음이 인다. 시대를 더불어 살지 못하는 고인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망에 놓인 유작이 그런 충동을 일으키는지 모른다.

이 소설은 IMF체제를 한 해 앞두고 창작되었는데 금융위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급격히 빨려드는 당시 직장사회의 세태를 실감나게 그려놓고 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증권회사 사원들이 대거 대기발령을 받으며 회사가 마련한 연수교육에 소집된다. 대기발령자들은 '인간 개조 프로젝트'니 '권고사직 교육'이니 하는 소문으로 뒤숭숭한 가운데 연수원 행 관광버스에 오른다. 화자인 '나'는 인사부와 홍보부에서 주로 일했던 사원으로 연수 후 일선 영업현장에 투입된다고 해도 살아날 가망이 거의 없는 인물이다. 화자의 후배인 국제부 추 대리는 "형 모멸감을 참을 수 없어! 하수구통의 시궁쥐 알지? 그것들이 내 머리통에 깔긴 오줌을 뒤집어쓴 듯이 더럽고 역겹워!" 하고 절규한다. 명예퇴직 신청 기회를 놓친 걸 후회하는 축들도 있다.

연수원 행 버스에 다소 의외의 인물이 오른다. 사내 경제연구소에서 일하던 최기석씨다. 그는 국제금융 시장에서 구름처럼 떠돌다가 단기간에 걸쳐 매매차익을 남기고 빠지는 투기성 자금인 일명 '핫머니' 전문가이다. 모름지기 세계화라는 구호 속에 진행되는 이 구조조정의 칼바람에 그와 같은 국제금융 전문가가 목이 벤 게 화자로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연수원으로 가는 길에서부터 최기석씨는 엉뚱한 짓을 해서 화자의 마음을 졸인다. 숫자 파악을 위한 앉은번호 대열에서 빠진다든가 버스가 물웅덩이에 빠져 모두가 밀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눈총을 받아가며 뒷짐을 진다. 그 상황에서 그가 흘리는 말-- "모두가 야수가 되자는 건가……"

연수교육은 말 그대로 군대의 극기훈련이나 유격훈련을 방불한다. 군복을 지급받고 이름과 직급이 지워진 가슴팍에 단 표찰대로 '몇번 올빼미'로 호명된다. 피티체조는 물론이고 페인트 총탄을 지급받아 써바이벌 게임을 벌인다. 게임이되 결코 게임이 아니다. 코스마다 낙오, 경상, 중상, 전사 등의 판정을 내려 점수를 매긴 후 감점이 많은 교육생은 연수원 퇴원 조치가 된다.

최기석씨의 군복은 페인트로 얼룩져 있다. 구간마다 전사 판정을 받는다. "난 아무래도 안되겠어. 이게 도대체 무슨 짓들인지……" 그런 소리를 내놓던 최기석 씨가 지뢰밭을 통과하다가 느닷없이 화자에게 '아프리카에서 제일 넓고 신성한 초원 세렌게티'를 아느냐고 묻는다. 인기 다큐멘터리〈동물의 세계〉에 자주 나오는, 야생동물의 천국. 그에게 세렌게티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명확하게 그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양육강식이라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상징하는 정글의 이미지로 사용된 것은 아닌 듯싶다.

그들은 '잃어버린 유토피아'를 찾았을까

오히려 몽골 고비사막에서 죽음을 맞는 탈북 소년의 행로를 그린 정도상의 단편 〈얼룩말〉(《찔레꽃》, 2008)에 등장하는 세렌게티의 이미지와 상통하는 바 있다. 인간의 질서에 포박되지 않은 생명력 넘치는 자유로운 대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양육강식의 질서가 존재하나 무한증식과 무한질주의 욕망이 숨통을 조이는 비정한 세계는 아니다. 사자의 발톱 아래 놓인 가젤이래도 그는 온전한 생명으로서 운명에 맞서 있다. 적어도 얼굴 없는 기계가 쭉정이 털어내듯 하는 세계화 시대의 기업연수 교육장과는 사뭇 다른 세계이다. 그러니까 '내 마음의 세렌게티'는 '회복된 인간'일 수도 있고 '잃어버린 유토피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더 나아가지 못한다. 미완의 30매가 작가의 행로와 함께 영원히 남았다. 소설의 결말을 추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최기석씨는 연수교육장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는 연수 프로그램 중 하나인 '유서 쓰기'를 가장 멋지게 해낸 인물이다. 그는 가장 진정성있는 유서를 내놓았다.

"……이제 나는 세상의 똥으로 돌아갑니다. (…) 인간의 구불구불한 창자를 통과해서 이런 똥이 되기 전에 나는 싱싱한 푸성귀였군요. 맑은 샘물이었군요. 토실토실한 살코기였군요. 넓고 푸른 바다의 깊은 곳을 마음껏 헤엄치던 지느러미를 단 생선이었군요. 투명한 공기이자 햇살이었군요. 저 온갖 욕망과 허영과 오기와 아둔함으로 가득찬 나라는 껍데기 인간의 어둡고 탁한 터널을 통과하기 전에 말입니다. 똥이 다시 부드러운 흙과 투명한 바람과 서로 몸을 섞고 맑은 공기를 따라 푸성귀도 되고 짐승의 살이 되듯 일평생 똥이 가득 머물다 간 집이었던 내 몸뚱어리는 스스로가 똥이 되려 합니다. 거름이 되려 합니다. 끝내 다시 태어나려는 기억도 잊으려 합니다……"(368면)

'세계화'라는 구호 아래 수렴된 IMF체제의 전조를 예민하게 포착한 이 소설은 동시에 그 체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면에서 애초부터 결말이 불가능한 작품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또한 미완의 부분이 이 시대에 대한 어떤 거대한 괄호처럼 의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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